이지당과 부소담악이 멋졌던 대청호 선비길
1. 일자: 2023. 2. 14 (화)
2. 장소: 대청호 선비길
3. 행로와 시간
[석호리 돌거리고개(09:28) ~ (도로 3.5km / 석결마을, 이평마을) ~ 보오리 정자(10:47) ~습지공원(11:00~30) ~ (서화천/다리) ~ 이지당(12:07~15) ~ 환평리갈림/도로(12:35) ~ (도로 / 식약청, 환평리, 추소리) ~ 황룡사/부소담악 유원지(13:40) / 15.6km]
8구간은 옥천군 추소리에서 석호리를 잇는 13km라 안내하지만, 먼저 다녀온 이들의 기록에 의하면 15km에 육박하는 거리로, 등로의 대세는 도로이며 호수길은 이지당에서 지오리 보골까지와 석결마을 부근으로 채 3km 남짓이다. 고도 140m에서 출발하여 90m로 내려섰다가 다시 230m로 오른 후 100m 대로 떨어진다. 누적 고도가 380m로 둘레길 치고는 오르내림이 꽤 있다.
이 구간의 명소는 부소담악 조망, 이지당, 메타쉐콰이어 숲으로 추정된다.
부소담악은 부소무니 마을 앞 물 위에 떠 있는 바위 지형으로, 해양수산부가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하천 100곳 중 하나로 선정한 곳이다. 700m 가량의 암봉들이 병풍처럼 장관을 이룬다. 들머리에서 5km 지점에 위치한 이지당은 조선 중엽 네 문중이 합작하여 세운 서당이다. 보골 메타쉐콰이어 숲도 멋지다 한다.
선답자의 후기를 보니, ‘선비길이라는 이름은 멋지지만 선비가 걷기엔 불편한 곳이 제법 있다.’는 말에서 길의 대강을 예상할 수 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옥천군은 대청호 오백리길에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나도 큰 기대는 없지만 의외의 반전이 있을지도 모르다는 작은 바램은 품어본다.
(여기까지는 트레킹을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는 이와 많이 달랐다.)
< 대청호 오백리길 8구간 이모저모 >
들머리가 바뀌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변경한 것 같다. 역방향으로 진행한다. 새 들머리인 돌머리고개를 오른다. 모처럼 날이 맑다. 하늘은 휑하니 높았고 푸른 빛은 차갑다. 언덕을 올라 바라보는 풍경에 물길이 보인다. 올라섰다 내려서더니 찻길을 따라 1.5km쯤 되는 긴 오르막이 나타난다. 고도를 꽤 치고 오른다. 희한한 건 오르는 동안 차의 왕래가 없다는 게다. 그만큼 외진 곳이란 반증이다.
석결마을과 이평마을을 지난다. 길에는 대청호 둘레길을 알리는 그 어떤 표시도 없다. 우틀하여 도로와 잠시 이별한다. 메타쉐콰이어 몇 그루가 심어져 있는 비탈을 내려선다. 설마 이걸 보고 숲이라 하진 않겠지 하며 실소했다. 보오리를 알리는 커다란 비석과 정자가 서 있는 마을을 지난다. 이어 크지 않은 정원 공간을 지나자 금강을 알리는 표지와 함께 물줄기 따라 다시 긴 도로를 걷는다. 겨울의 삭막한 도로 걷기는 무척 지겹다.
11시 무렵 커다란 습지공원에 도착한다. 공사 중인 영상을 보았는데 작년 말에 마친 모양이다. 커다란 연못이 산재해 있고 크기도 무척 넓은데 겨울이라 그런지 주변은 휑하다. 꽃 피고 녹음이 우거진 계절에는 명소가 되겠다.
잠시 호수가에 앉아 쉬어 간다. 햇살은 따사로운데 바람이 거세다.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커다란 고목이 있는 물가에서 바라보는 강 건너 산비탈의 갈색 낙엽과 바위의 풍광이 근사하다. 일행들은 하나 둘 흩어지고 홀로 걷는다.
금강 줄기인 서화천을 따라 20여분을 걸어 이지당에 도착했다. 강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이지당의 모습은 단아하고 위풍이 당당했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정성껏 짓고 잘 관리되는 근사한 서당이었다. 화려하지도 누추하지도 않는 품격 있는 곳이다. 강가에 위치하여 물과 어우러진 놓임새와 앉음새도 그만이다, 마음에 꼭 드는 공간이다. 집 주변 이곳저곳을 둘러 본다. 길지 않은 시간이건만 ‘구경 한 번 잘 했다.’란 말이 절로 나올 만한 명소였다.
황골 갈림을 통해 고개를 치고 오른다. 오늘은 평소와는 달리 길안내가 충실하다. 갈림마다 어김없이 산악회의 띠지가 붙어있다. 한적한 마을 옆 도로를 치고 오른다. 생각이 머문다. 기억의 둘레에는 늘 몇 사람의 얼굴이 맴돈다. 오늘은 토지 속 인물들이다. 내 자신의 모습도 투영된다. 시대가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특징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살아온 시대의 때가 묻기 마련이다.
힘겹게 치고 오르니 도로와 만난다. 굽은 2차선 찻길이다. 보행자를 위한 길은 없다. 위험하다. 밑을 내려본다. 지나온 등로가 선명하다. 미리 알았다면 옆길로 치고 올랐을 게다. 식약청 부속 건물을 지나자 제법 큰 마을이 등장한다. 환평리와 추소리는 그 경계를 모르겠고, 길을 걷는 내겐 무의미하다.
도로에서 바라보는 마을은 터가 무척 좋아 보인다. 양지 바르고, 물가를 끼고 있어 풍광도 좋다. 집들의 지붕 색도 화려해 풍요로움이 느껴졌다. 물가 언덕에 근사한 커다란 카페가 있다. 축대 난간에 서서 풍광을 살핀다. 그 중심에는 부소담악이 있었다. 숲 속 정자가 랜드마크 역할을 하며 그 밑으로 병풍을 두르듯 낮은 흰 바위벽이 수백 미터 길이로 이어진다. 장관이다. 예상보다 기대보다 훨씬 더 멋지다. 회색과 푸른색과 갈색 빛이 어우러진 숲이 주는 색감도 참 좋다. 한참을 서성이며 바라본다.
도로는 계속 이어진다. 당초 날머리보다 한참 더 간 황룡사 밑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무척 멀게 느껴졌다. 세심종이라는 종파의 절 밑에 버스가 주차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물가로 이동한다. 제법 너른 유원지가 형성되어 있다. 별장으로 추정되는 고급 주택들도 여럿이다. 호숫가를 돌며 주변 풍광을 감상한다. 좋은 곳에는 금줄이 쳐 있다. 개인 땅인가 보다.
트레킹을 다 마치고도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 식당에 들르니 혼자 먹을 음식이 마땅치 않다. 걸음을 돌려 지나온 카페를 찾는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2층 창가에 앉는다. 부소담악과 대청호를 흐릿한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꽤 괜찮다. 트레킹을 마치고 호수가 바라보이는 카페 2층 창가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 좋았다.
< 에필로그 >
일년 중 이맘때는 산도 들도 물길도 풍광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걷는 길에 눈도 꽃도 열매도 없는 황량한 계절이지만, 길가 양지바른 곳에 푸른 싹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음은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총 15km 거리 중, 도로가 절반을 넘었고 나머지도 대개 마을 길이었으며, 흙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예상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길을 마치고 드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다. 이지당과 부소담악 전망이 열 몫을 했다. 강가에 위치한 작은 집이 이리 멋질 수 있구나 하게 만든 이지당, 물길 따라 길게 이어진 부소담악 주변 풍경은 일당백이었다. 코스를 역방향으로 정한 건 신의 한수였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이지당과 부소담악을 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선택에 감사한다. 하나 더, 걷다 길을 잃으면 ‘알바했다’여기지 말고 ‘개척했다 생각하라’ 란 대장의 말도 인상적이다. 고수는 도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