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꺾은 한국 선수, 방송사 때문에 못 봤다
이준목 입력 2021. 07. 30. 11:54
올림픽 인기종목 편식중계, 특단의 개선책 필요
[이준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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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 배드민턴 남자단식 '최강' 모모타 완파한 허광희 28일 일본 도쿄 무사시노노모리 종합 스포츠플라자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배드민턴 남자 단식 조별리그 A조 2차전에서 허광희(26·삼성생명)가 모모타 겐토(일본)를 상대로 스매시를 하고 있다. 세계랭킹 38위인 허광희는 이날 1위 모모타를 2-0(21-15 21-19)으로 완파, 대이변을 연출하며 8강으로 직행했다. |
ⓒ AP/연합뉴스 |
2020 도쿄올림픽 배드민턴 남자 단식에 출전중인 허광희(삼성생명)은 지난 28일 세계 랭킹 1위인 일본의 모모타 겐토를 2-0으로 누르고 8강에 진출하는 깜짝 이변을 일으킨 바 있다. 이 경기는 '올림픽 배드민턴 역사에 남을 이변'으로 평가받는다.
모모타는 2019년 11개 대회 정상을 휩쓸며 배드민턴 남자 단식의 간판으로 꼽히는 스타였고, 일본 언론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전 종목 선수를 통틀어 금메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수로 꼽히기도 했다. 그랬던 모모타가 상대적으로 무명에 가까운 한국의 허광희에 완패한 것은 일본에 큰 충격을 안기며 각종 외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런데 정작 허광희의 모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이 경기가 TV 생중계가 아니라 녹화방송으로 뒤늦게 중계됐다. 당시 오후 8시부터 온라인 중계는 진행됐지만 한국에서는 문자로 경기 진행 상황만을 보여주는 게 전부였고 배드민턴 팬들은 실시간 해외 중계까지 찾아다녀야 했다. 같은 시간 지상파 3사에서는 양궁, 체조, 수영, 펜싱 등 주로 인기종목들과 뉴스가 방송됐다. 심지어 지상파가 운영하는 스포츠 전문 채널에서는 모두 일본과 프랑스의 올림픽축구 조별리그가 방송되기도 했다.
팬들은 한일전이었고, 세계 랭킹 1위와 맞붙은 경기였음에도 방송사들이 TV생중계를 편성하지 않는 데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냉정히 말해 허광희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고 승리 가능성이 높지 않기에 편성에서 외면당한 셈이다. 방송사들은 하루가 지나서야 뒤늦게 부랴부랴 해당 경기를 특집 하이라이트로 편성하며 수습에 나섰지만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과는 감동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고질적인 문제 '비인기종목 차별'
허광희 경기중계를 둘러싼 해프닝의 본질은, 국내 올림픽 중계의 고질적인 문제인 '비인기종목 차별'의 문제점을 또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낸 장면이라는 평가다. 올림픽에는 워낙 많은 종목들이 있고 아무래도 양궁, 펜싱, 유도, 태권도 등 메달 가능성이 좀더 유력한 종목들 혹은 야구, 축구 등 대중적 관심이 집중되는 종목들의 비중이 더 클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이미 거액의 중계권료를 지불하고 시청률 경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방송사로서도 인기 종목에 편성을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과도한 전파낭비로 종목간 뚜렷한 '서열화'와 박탈감을 부추기는 것은 물론, 다양한 종목을 즐기고 싶은 시청자의 권리까지 침해하는 것은 분명히 개선이 필요하다. 허광희 경기 중계 논란에서 많은 팬들이 가장 분노했던 것은 국내 유력 종목들과 겹친 지상파는 그렇다치더라도, 스포츠 채널에서 한국 경기도 아닌 외국팀(일본과 프랑스 축구 조별리그)인 데다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경기 때문에 우리 선수들의 경기가 외면받았다는 데 있다. 심지어 올림픽 일정이 한창 진행중인데도 메달권 종목이나 유명 선수들의 경기는 재방송까지 반복해서 틀어주면서 시간을 때우는 게으른 편성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대표적인 인기종목으로 꼽히는 야구나 축구에서 한국팀의 경기가 있는 날은, 다양한 종목을 즐기고 싶은 비주류 스포츠 팬들에게는 가장 괴로운 '블랙홀'과 같은 시간이다. 8강 진출에 성공한 올림픽 축구대표팀의 조별리그 3경기, 지난 29일 열린 야구대표팀과 이스라엘의 조별리그 1차전 등은 모두 방송3사가 동시에 생중계했다. 방송사별로 중계진을 제외하고 다른 똑같은 화면이 3사 채널을 통해 전송되며 내용상 큰 차별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는 결국 박찬호, 이승엽, 허구연, 조원희, 안정환, 최용수 등 각 종목 유명 해설자들의 인지도와 입담대결에 의존해야 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결국 야구-축구와 방송시간대가 겹치는 다른 종목들은 무조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심지어 같은 시간에는 여자배구 슈퍼스타 김연경을 보유한 대한민국 대 도미니카공화국의 조별리그 경기, 양궁 남자 개인 32강전 등 평소같으면 많은 관심을 받았을 나름 유명 종목들의 비중있는 경기조차 모두 녹화로 편성됐다. 이런 상황은 야구-축구가 조기 탈락하지 않는 한 올림픽 내내 계속될 것이다.
올림픽 취지 무시하는 '중복 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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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 도쿄 올림픽 배드민턴 예선 24일 오후 무사시노노모리 종합 스포츠플라자에서 도쿄올림픽 배드민턴 남자 복식 예선 라운드 대한민국 대 말레이시아 경기가 열리고 있다 |
ⓒ 연합뉴스 |
사실 월드컵이나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같이 단일 스포츠에 관련된 초대형 이벤트라면 그래도 해당 종목의 인기나 상징성 등을 고려할 때 중복 중계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줄 만하다. 하지만 올림픽은 어디까지나 종합 스포츠 제전이다. 모든 국민이 다 야구나 축구팬만 있는 것도 아니다. 프로화되어 이미 부와 명예를 충분히 누리고있는 인기종목들에 비하여 올림픽같은 무대가 아니면 제대로 관심을 받을 기회가 없는 종목도 즐비하다.
또한 올림픽은 한국만의 무대도 아니기에 다른 국가의 경기라도 각 종목에서 세계 최고 선수들의 기량을 즐기고 싶은 스포츠팬들은 많다. NBA(미국프로농구) 최고의 선수로 구성되어 올림픽 4연패에 도전하는 미국 농구대표팀 '드림팀'의 경기, 정치-사회적으로는 한국과 앙숙관계이지만 각 종목에서 세계적인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이나 중국 스타들의 경기, 혹은 평소에 자주 접할 기회가 없는 유럽팀들의 경기도 볼거리가 풍부하다. 하지만 시청률에 목을 매야하는 방송사들에게는 '중계의 다양성' 따위는 현실성 없는 딴 세상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 같은 중계 편식 현상의 부작용은 지난 수십년간 월드컵,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국제적인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열릴 때마다 지속적인 문제점으로 거론되어 왔지만 여전히 개선이 되지 않고 있다. 인기 종목이나 메달 유력 경기가 진행되면 거의 전 채널이 같은 경기에 올인하는 것이 이제는 당연한 관행처럼 굳어졌다.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는 도쿄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국민의 시청권 보호를 위해 지상파 3사에 과다한 중복 동시 편성을 자제하라는 권고를 보내기는 했지만 법적인 강제성이 없는 형식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앞으로는 뭔가 제도적으로 규제를 도입하더라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보인다. 애초에 올림픽의 존재 취지라는게 스포츠를 통하여 다양한 종목과 인종과 언어, 문화들이 공존하자는 것이었는데, 정작 우리 방송사의 스포츠 중계는 오히려 인기 종목 위주의 서열화와 승자독식, 결과지상주의라는 '차별'을 공공연하게 부추기는 기형적인 형태가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방송사들의 편성권의 자유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정작 시청자들의 채널 선택권의 자유가 오랫동안 침해되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국민의 공공재라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이런 부분에 대한 개선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직무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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