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經典會上
법화경일일법문 안락행품제14:다라니(陀羅尼)를 얻고-19位,
법을 듣고 환희(歡喜)가 되어-17位
공양(供養)을 하며-18位
다라니(陀羅尼)를 얻고-19位
불퇴지(不退智)를 깨달으니,-20位
부처님께서 그 마음이
불도(佛道)에 깊이 든 것을 아시고,-21位
곧바로 최상(最上)의 정각(正覺)을
이루리라는 수기(授記)를 하시되,-22位
“그대 선남자(善男子)여!
반드시 미래세상에-23位
무량(無量)한 지혜(智慧)와
부처님의 대도(大道)를 얻으면,-24位
불국토(佛國土)는 장엄청정(莊嚴淸淨)하고
광대(廣大)하여 견줄 바가 없으며-25位
또 사중(四衆)이 있어
합장(合掌)하고 설법(說法)을 들으리라.”14-97,3 26位
문법환희 이위공양 득다라니 증불퇴지
聞法歡喜 而爲供養 得陀羅尼 證不退智
불지기심 심입불도 즉위수기 성최정각
佛知其心 深入佛道 卽爲授記 成最正覺
여선남자 당어내세 득무량지 불지대도
汝善男子 當於來世 得無量智 佛之大道
국토엄정 광대무비 역유사중 합장청법
國土嚴淨 廣大無比 亦有四衆 合掌聽法4
1-득다라니(得陀羅尼)에서 증불퇴지(證不退智)까지는 몽중독송품(夢中讀誦品)에 속하고, 또 계위에서는 일교묘각에서 19위와 20위에 속한다.
2-서품에서 8만보살의 계위와 공덕을 말씀하셨는데, 원교에 입각하면 계위에 나열에 단계를 두게 된다. 따라서 천태보살이 나눈 계위는 다음과 같다.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어서 물러섬 없는 분들이라.
[皆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退轉]
다 아뇩삼보리(阿·三菩提)에서 물러섬이 없다 한 것은 위계(位階)를 밝힘이다. 아뇩(阿·)을 이곳의 말로는 무상도(無上道)라 하니 경묘(境妙) 속에서 설한 바와 같으며, 위계는 위묘(位妙) 속에서 설한 바와 같다. 불퇴전(不退轉)이란 위(位). 행(行). 염(念)에 대해 물러섬이 없음을 논한 것이다.
皆於阿뇩三菩薩不退轉者 明位也.阿뇩.此云無上道.如境妙中說.位如位妙中說.不退轉者.約位行念論不退.
마땅히 네 가지로 분별해야 할 것이다.
삼악도(三惡道)에 태어나는 일이 없음은 위계(位階)의 불퇴전(不退轉)이다. 변지(邊地)에 나지 않으며, 제근(諸根)을 완전히 갖추며, 여인(女人)의 몸을 받지 않음은 곧 수행의 불퇴전이다. 항상 전생의 일을 알고 있음은 곧 생각의 불퇴전이다. 이런 것을 구비하는 것을 아비발치지(阿비跋致地)라 하는 것이니, 삼장교(三藏敎)의 도리다.
應四種分別.不生三惡道.位不退.不生邊地 諸根完具 不受女身.卽行不退.常識宿命.卽念不退.具此名阿비跋致地.三藏義也.
육심(六心) 이전의 경모(輕毛)의 보살은 신근(信根)이 확립되지 않았으므로 그 위계(位階)가 아직 퇴전(退轉)될 수 있다. 칠심(七心) 이상은 초지(初地)에서 육지(六地)에 이르도록 퇴전하여 범부의 이승(二乘)이 되는 일이 없으니 이를 위계(位階)의 불퇴전이라 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비록 정사(正使)는 다 없어졌다 해도, 능히 만행(萬行)은 널리 닦지 못하므로 그 구행에는 오히려 퇴전함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칠지(七地)에 이르러야 수행의 불퇴전이라 하게 되나,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오히려 이승(二乘)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므로 생각의 퇴전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팔지(八地)에 이르러 도관쌍류(道觀雙流)하여 법류(法流)의 물에 들어감을 생각의 불퇴전이라 한다. 이는 삼승공십지(三乘共十地)의 도리일 따름이다.
若六心已前 輕毛菩薩 信根未立 其位猶退.七心已上 從初地至六地.不退爲凡夫二乘.名位不退.雖正使已盡.而未能 修萬行 其行猶退.至七地名行不退.而猶起二乘念 故有念退.至八地道觀雙流 入法流水.名念不退.此名阿비跋致地.此乃三乘共十地義耳.
지론사(地論師)들은 이르되, 「십주(十住)는 증불퇴(證不退)요, 십행(十行)은 위불퇴(位不退)요, 십회향(十廻向)은 행불퇴(行不退)요, 십지(十地)는 염불퇴(念不退)다.」라 했다. 그러나 이는 별교(別敎)의 도리여서 이 경(법화경)에는 맞지 않으므로 지금은 쓰지 않는다. 영락경(瓔珞經)에 이르되,「초지(初地)에서 삼관(三觀)이 나타나 심심적멸(心心寂滅)하여 자연(自然)히 흘러 나가고 들어오고 한다.」라 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별교의 불퇴이므로 지금은 쓰지 않는다.
地師云.十住是證不退.十行是位不退.十廻向是行不退.十地是念不退.此是別敎義.不會此經.今所不用.瓔珞云.初地三觀現前.心心寂滅 自然流入.此亦別敎不退.今亦不用.
화엄경이 초주(初住)에서 여래의 일신무량신(一身無量身)을 얻어 삼불퇴(三不退)를 갖춘다고 밝힌 것 같음은, 원교(圓敎)의 불퇴(不退)니, 이것이 일실(一實)의 모습이다. 지금은 이것을 써서 위계(位階)를 판정한다.
若華嚴明初住得如來一身無量身 具三不退.此圓敎不退.此是一實事.今用此判位也.
본적(本迹)에서 해석컨대, 이 보살들의 본지(本地)는 적멸(寂滅)의 단계여서 십지(十地)도 아니거니 하물며 초주(初住)이겠는가. 초주의 불퇴(不退)도 아니거니 하물며 또 별교(別敎) 통교(通敎)의 불퇴이겠는가. 별교 통교의 위계(位階)로는 모름지기 다른 경(經)의 열중(列衆)을 해석하는 것은 가(可)하려니와 원교(圓敎)의 위계는 바로 법화경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러 경론(經論)에 입각하는 사람들은 이미 수적(垂迹)하는 모습을 몰랐거니 어찌 본지(本地)를 이해했겠는가. 이 같이 보살의 덕을 찬탄함에 있어서 그들은 이미 잘못에 빠지니 비방함이 그 속에 있는 결과가 되었다. 이리하여 도리어 증감(增減)의 두 비방을 이루니 어찌 보살의 덕을 찬탄했다고 이르랴.
本迹者.本地寂滅 尙非十地 況是初住.尙非初住不退.況復別通.別通之位 宜釋餘經列衆.圓敎之位 正在今經.諸經論師.旣不識迹 安能知本.所歎旣謬 毁在其中.還成增減兩謗 何謂歎德.
관심(觀心)에서 해석컨대, 삼관(三觀)이 곧 삼불퇴(三不退)다. 또 일심삼관(一心三觀)이 곧 일심삼불퇴(一心三不退)다…….
觀心者. 三觀卽三不退.又一心三觀.卽一心三不退(云云).
그 모두 다라니(陀羅尼)와 요설변재(樂說辯才) 얻자와서 불퇴전(不退轉)의 법륜(法輪)을 굴리며, 무량 백천(白千) 부처님네 공양하여 그 모든 부처님 계신 곳에 온갖 선근(善根) 심으시와 늘 부처님네 일컫는 바 되오시며, 자비로 몸을 닦고, 잘 불혜(佛慧) 드시고, 대지(大智) 통달하시고 피안(彼岸) 곧 이르시며, 이름 두루 무량세계 들리시와 능히 무수백천의 중생을 건지시니,
[皆得陀羅尼 樂說辯才 轉不退轉法輪 供養無量百千諸佛. 於諸佛所 植衆德本 常爲諸佛之所稱歎. 以慈修身 善入佛慧 通達大智 到於彼岸 名稱普聞無量世界 能度無數百千衆生]
옛 사람이 이르기를 「개득다라니(皆得陀羅尼)」 이하는 보살들의 덕을 찬탄한 것이라 했으나, 이제 「불퇴전(不退轉)」이라는 말을 취(取)하면 두 뜻을 갖추고 있다고 해야 하리니, 위의 글을 완성시킨 점에서는 위계(位階)를 밝히는데 속하고, 뒤의 글을 일으킨 점에서는 덕을 찬탄하는 것에 속한다.
또 옛사람이 이르기를,
「덕을 찬탄한 것에 십이구(十二句)가 있는데 이를 분류하면 네 가지 취지가 된다. 처음의 삼구(三句)는 현덕(現德)을 찬탄하고, 다음의 삼구(三句)는 왕행(往行)을 찬탄하고, 다음의 사구(四句)는 내체(內體)를 찬탄하고, 마지막의 이구(二句)는 외명(外名)을 찬탄하니, 네 가지 취지가 같지 않으나 덕에 관한 것이 처음에 나오므로 전체를 덕의 찬탄이라 하는 것이다.
현덕(現德)을 찬탄한 것에 또 두 부분이 있으니, 처음의 일구(一句)는 자행(自行)을 찬탄함이요, 다음의 이구(二句)는 화타(化他)를 찬탄한 것이다.
왕행(往行)을 찬탄한 것에 세 부분이 있다. 처음의 구(句)는 행(行)의 근본을 찬탄하니 본래 여러 부처님을 따라 반야(般若)를 얻었다는 것이다. 다음의 구(句)는 본래의 행(行)을 찬탄하니 행(行)은 곧 복덕(福德)이어서, 이미 복덕이 있으므로 능히 지혜를 돕는 것이 된다. 다음의 구(句)는 부처님의 찬탄하심이 되었다 함이다.
내체(內體)를 찬탄한 것에 또 세 부분이 있다. 처음의 「자비」는 응신(應身)을 찬탄함이요, 중간의 두 구(句)는 심혜보신(心慧報身)을 찬탄함이요, 뒤의 일구(一句)는 법신(法身)을 찬탄한 것이다.
외명(外名)을 찬탄한 것에 두 부분이 있으니, 처음의 구는 이름이 널리 들림을 찬탄함이요, 다음의 구는 능히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찬탄함이다.」
라고 했다.
이 내용을 분류한 글은 매우 안목(眼目)이 있는 듯도 하나 종(宗)과 체(體)를 엄밀히 따져 논할 때는 별반 내용이 없다고 해야 한다. 만약 이런 취지에서 통교(通敎)의 보살을 찬탄했다면 통교에는 본래 삼신(三身)이 없는 터요, 또 통교의 보살은 불혜(佛慧)에 든 것도 아니므로 「이름이 널리 들릴」리 없어서 여러 도리가 성립하지 못하게 된다.
만약 별교(別敎)를 찬탄했다면 별교의 초지(初地)는 이미 이승(二乘)을 넘어서고 있거늘 어찌해 칠지(七地)에서 다시 성문 벽지불의 생각을 일으키겠는가. 만약 원교(圓敎)의 보살을 찬탄했다면 응당 칠지(七地) 이하는 불퇴(不退)의 덕이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 같이 진퇴(進退)가 다 들어맞는 것이 없으니 끝내 누구를 찬탄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되랴. 이것이 채택하지 않는 까닭이다.
舊云. 皆得陀羅尼去.始是歎德.今取不退轉 卽具兩意.成上屬明位.起後屬歎德.舊云 歎德作十二句.分爲四意.初三句歎現德.次三句歎往行.次四句歎內體.後兩句歎外名.四意不同 而德居於初.故稱歎德.歎現又兩.初一句歎自行.後二句歎化他.歎行爲三.初句歎行本.本從諸佛得般若.次句歎本行.行福德也.旣有福德 能資於慧.次句爲佛所歎.體又三.初慈悲歎應身.中間兩句 歎心慧報身.後一句歎法身.歎名爲二.初句歎名普聞.次句歎能度衆生.此之分文 極有眉眼. 論宗體 殊無趣向.若歎通敎.通敎無三身.又非入佛慧.名不普聞 種種義不成.若歎別敎.別敎初地 已過二乘.云何七地更起聲聞支佛之念.若歎圓敎.不應言七地已下 無不退之德.進退無當 竟知歎誰.是所不用.
지금은 십삼구(十三句)를 불차제(不次第)와 차제(次第)로 보아 글을 해석하겠다. 첫째로는 차제(次第)를 따라 십지(十地)에 입각해 해석하면 도리에 있어서 편리하고, 둘째로는 불차제(不次第)로 초주(初住)에 입각해 해석하는 것도 도리에 있어서 편리한 까닭이다.
「불퇴전(不退轉)」이란 말은 이를 앞의 글을 완성시킨다고 보면 곧 위계(位階)를 밝힘이 되고, 뒤의 글을 일으킨다고 보면 곧 덕을 찬탄하는 것이 된다. 덕을 찬탄하는 면을 십지(十地)에 적용하면 초지(初地)가 된다. 초지를 환희지(歡喜地)라 부르는데, 그 이변(二邊)에 퇴전함이 없이 중도(中道)에 들어 삼불퇴(三不退)를 얻게 된 것을 기뻐함이다. 그러므로 첫째 경지인 환희지를 찬탄함임을 알 수 있다.
「다 다라니를 얻고〔皆得陀羅尼〕」라는 말은 이지(二地)를 찬탄함이다. 이지(二地)를 이구지(離垢地)라 부르고, 또 이달지(離達地)라고도 하니, 모든 악을 떠나서 멈추고 여러 선을 깊이 이해하여 지녀간다는 것이어서 곧 다라니의 뜻이다. 그러므로 이구지를 찬탄함임을 알 수 있다.
「요설변재(樂說辯才)」라는 말은 삼지(三地)를 찬탄함이니, 삼지를 명지(明地)라고 한다. 안으로 지혜가 밝으면 밖으로 설법하는 언변이 있게 마련이니, 그 사람의 지혜를 알고자 하면 말을 살피면 된다. 말에도 여러 가지가 있기는 하나 요설(樂說)이 가장 뛰어난 까닭이다. 그러므로 제삼(第三)의 명지(明地)를 찬탄함임을 알 수 있다.
「불퇴전의 법륜을 굴리고〔轉不退轉法輪〕」란 말은 사지(四地)를 찬탄함이니, 사지를 염지(·地)라 한다. 불꽃(·)은 어둠을 깨고 또 능히 심지를 태우는 것이니, 법륜(法輪)을 굴려 스스로 자기의 번뇌를 해침이 불꽃의 심지를 태우는 것 같고, 남의 미혹(迷惑)을 깸이 불꽃의 어둠을 제거함과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제사(第四)의 염지를 찬탄함임을 알 수 있다.
「백천 제불 공양한다〔供養百千諸佛〕」고 하는 말은 오지(五地)를 찬탄함이니, 오지를 난승지(難勝地)라 한다. 이 오지(五地)는 깊은 선정(禪定)을 얻어 신통력을 씀이 이기기 어렵고 미치기 어려우니, 일념(一念) 사이에 두루 시방세계(十方世界)에 이르러 여러 부처님께 공양을 드릴 수 있다. 그러므로 제오지(第五地)를 찬탄함인 줄 알게 된다.
「여러 부처님 계신 곳에서 많은 덕본(德本)을 심는다〔於諸佛所 植衆德本〕」하는 말은 육지(六地)를 찬탄함이니, 육지를 현전지(現前地)라 한다. 선정(禪定)을 얻어 능히 여러 부처님네를 공양하는 까닭에 복덕(福德)이 종지(種地)를 돕는 것에 의해 종지가 나타남이니, 지혜는 복덕의 근본이요 그것을 심음이 씨를 땅에 심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제육지(第六地)를 찬탄함인 줄 알게 된다.
「항상 여러 부처님의 일컫는 바 되었다〔常爲諸佛之所稱歎〕」한 말은 제칠(第七)의 원행지(遠行地)를 찬탄함이니, 이 경지에 오면 이지(二智)의 방편이 모든 사람을 뛰어넘어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닦음으로써 부처님의 마음에 들게 된다. 그러므로 제칠지(第七地)를 찬탄함인 줄 알 수 있다.
「자비로 몸을 닦고〔以慈修身〕」란 말은 제팔(第八)의 부동지(不動地)를 이른다. 바른 지혜가 동요되지 않아 삼계(三戒)에 나가는 작용을 떠난 경지이나, 다만 자비심 때문에 몸에 영향을 남겨 오도(五道)에 들어가 입에 영향을 남겨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며 마음에 영향을 남겨 중생을 위해 방편을 만들게 된다. 정법화(正法華)에서는 자세히 삼업(三業)에 영향을 남긴다고 했다. 그러므로 제팔지(第八地)를 찬탄함임을 알 수 있다.
「잘 불혜에 들고〔善入佛慧〕」란 말은 제구지(第九地)를 찬탄함이니, 구지(九地)를 선혜지(善慧地)라 한다. 깊이 실제(實際)에 들어 미묘히 본원(本源)에 투철한 경지인 바, 이 명칭과 내용은 가장 잘 어울린다. 그러므로 제구지(祭具地)를 찬탄함임을 알 수 있다.
「대지에 통달하고〔通達大智〕」라는 말은 제십지(第十地)를 찬탄함이니, 십지(十地)를 법운지(法雲地)라 한다. 법신(法身)은 허공같고, 선정(禪定)은 큰 구름같고, 지혜는 큰 비와 같기에 이르는 말이다. 불법(佛法)에 잘 들어감을 혜(慧)라 하고 교묘히 불법을 쓰는 것을 지(智)라고 이르니, 기실 같은 것이지만 서로 열거한 것뿐이다.
「피안에 이르시며〔到彼岸〕」라는 말은 십지(十地)의 내덕(內德)을 찬탄함이니, 삼제(三諦)의 피안에 이르러 인위(因位) 속에서 과(果)를 설한 것이요, 또 거기에 이름이 오래 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름 널리 들리고〔名稱普聞〕」라는 말은 십지(十地)의 외덕(外德)을 찬탄함이니, 내덕(內德)이 깊고 넓기에 이름을 널리 들리게 할 수 있었던 것이어서 내덕과 외덕이 서로 합치(合致)한 것이 된다. 만약 등각(等覺)의 위계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이 이구(二句)가 그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능히 백천의 중생을 건지신다〔能度百千衆生〕」라는 말에 대해 생각하면 다른 지(地)에 있어서 사람을 제도함은 혹 일계(一界)에서 구계(九界)에 이르는 것이 고작이므로 「능히 건진다」고 못하려니와, 십지는 앞의 것들보다 뛰어나므로 「능히 건진다」고 말한 것이다.
십지(十地) 모두가 다 여러 공덕을 구비하고 있는 터이나 이제 어느 것은 드러내고 어느 것은 묻어두고 하면서 해석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따로 따로 구별하기를 좋아하는 까닭이다. 십지의 이름의 편의에 의지하기에, 또 차제(次第)의 도리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하려 하기에, 이 한 방법을 강구해 글을 해석한 것뿐이다.
今以十三句 作橫揷消文.一揷約十地義便.二橫約初住義便.不退轉者 成前卽是明位.起後卽是歎德.以對初地.初地名歡喜.喜其不退墮二邊 入中道獲三不退.故知歎初歡喜地也.皆得陀羅尼 歎二地.二地名離垢.亦名離達.離遮諸惡 達持衆善.卽陀羅尼義.故知歎離垢地也.
樂說辯才 歎三地.三地名明地.內智明 外說辯.欲知智在說.說有種種 樂說最勝 故故知歎第三明地也.
轉不退轉法輪 歎四地.四地名焰.焰能破闇.又能焦炷.轉法輪自害己惑如焦炷.破他迷 如除闇.故知歎第四焰地也.
供養百千諸佛 歎五地.五地名難勝地.此地得深禪定.用神通力 難勝難及.於一念頃 至十方.供養諸佛.故知歎第五地也.
於諸佛所 植衆德本 歎六地.六地名現前.由得禪能供養諸佛.福資種智 種智現前.智是德本如植種於地.故知歎第六地也.
常爲諸佛之所稱歎.歎第七遠行地.此地二智方便 出過一切.廣修利益 稱會佛心.故知歎第七地.
以慈修身 歎第八不動地.正智不動 不出三界.但以慈董身 應入五道.董口爲說法.董心爲設方便.正法華具董三業.故知歎第八地也.
善入佛慧 歎第九地.九地名善慧.深入實際 妙徹本源.此名義最合.故知歎第九地.
通達大智 歎第十地.十地名法雲.法身如虛空.禪定如大雲.智慧如大雨.善入佛法名慧.巧用佛法名智.互擧耳.
到於彼岸 歎十地內德 到三諦之彼岸 因中說果.又到在不久也.
名稱普聞.歎十地外德.由內德深廣.致令聲名普聞.內外相稱.若開等覺位者.此二句擬之.
能度百千衆生者.餘地度人.或一界至九界 不名能度.十地勝前 故稱能度.
諸地悉具衆功德.而今出沒釋者.爲人情好異故.依十地名便故.又揷義易解故.作此一途消文耳.
다음에 불차제(不次第)로 찬탄컨대, 바로 초주(初住)에 입각해 이를 설할 수 있으니, 다른 하나 하나의 위계(位階)들은 미루어 이해할 일이다.
초발심주(初發心住)는 한 가지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일어나는 것이 되어, 이변(二邊)을 초월하여 범부를 고치고 성자를 초월해 중도(中道)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 마음은 고요하여 순간 순간에 살바야(薩婆若)의 바다로 흘러드니, 그러므로 「불퇴전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초주에서 취상(取相) 무지(無知) 무명(無明) 따위의 장애를 가로막고 떠나서, 반야. 해탈. 법신 따위의 덕을 지녀 통달하니, 그러므로 「다라니를 얻었다」라 한 것이다.
십신(十信)의 엇비슷한 이해로도 미묘한 음성을 삼천계(三千界)에 두루 차게 할 수 있거니, 하물며 초주의 진실한 이해에서 나오는 구밀(口密)의 공덕이겠는가. 그러므로 「요설변재」라 말한 것이다.
초주에서 능히 몸을 백세계(百世界)에 나누어 부처가 되니, 그 실제로 구제사업을 벌이는 곳을 논한다면 무량 무변하다고 해야 한다. 능히 부처가 되어 설법 교화하는 까닭에 「능히 불퇴전의 법륜을 굴린다」고 말한 것이다.
초주에서 불가사의한 신력(神力)을 얻어 두루 법계(法界)의 여러 부처님을 섬기니, 그러므로 「백천의 여러 부처님을 공양한다」고 말한 것이다.
초주에서 실상(實相)의 연(緣)이 되는 것을 얻음이 능히 「여러 덕을 심는」 일이다.
초주에서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 자기의 법과 여러 부처님과 동일하다고 지견(知見)하니, 그러므로 「부처님의 일컫는 바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초주에서 무연자(無緣慈)로 널리 몸을 나타내 두루 법계에 응하니, 그러므로 「자비로 몸을 닦는다」고 말한 것이다.
초주에서 비밀장(비密藏)에 드니, 그러므로 「잘 불혜(佛慧)에 든다」고 말한 것이다.
초주에서 일심삼지(一心三智)를 지녀 능히 장애됨이 없으니, 그러므로 「대지(大智)에 통달한다」고 말한 것이다.
초주에서 사리(事理)가 일부분 구경(究竟)에 도달하니, 그러므로 「피안에 이른다」고 말한 것이다.
초주에서 원만한 덕이 진실하여 이름에 어울리니, 그러므로 「이름이 널리 여러 부처님의 세계에 들린다」고 말한 것이다.
초주에서 능히 의지(依止)가 되어 안립구호(安立救護)하니, 그러므로 「능히 백천 중생을 건진다」고 말한 것이다.
초주에 다시 무량무변 불가사의한 갖가지 공덕이 있거니와, 지금은 생략해 십삼구(十三句)를 말한 것뿐이요, 이주(二住) 이하 내지는 등각(等覺)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대품(大品)에 이르되,
「처음의 아자문(阿字門)에 사십일자(四十一字)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고, 뒤의 다자(茶字)도 모든 자(字)의 공덕을 갖추고 있고, 중간의 글자들도 또한 그러하니, 글자도 평등하며, 말도 평등하며, 공덕 또한 평등하다.」고 하였다.
次橫歎者.直約初住說之.餘位位 例可解.初發心住 一發一切發.出過二邊 革凡超聖 入中道.其心寂滅 念念流入薩婆若海 故言得不退轉.
初住遮離取相無知無明等障.持達般若解脫法身等德.故言得陀羅尼.
十信似解 尙能以妙音 滿三千界.何況初住眞解口密功德.故言樂說辯才.
初住能分身百世界作佛.論其實處 無量無邊.以能作佛說法敎化.故言能轉不退法輪.
初住得不思議神力. 能承事法界諸佛.故言供養百千諸佛.
初住得實相本.能植衆德也.
初住開佛知見.知見已法與諸佛同.故爲佛之所稱歎.
初住無緣慈 普現色身. 應法界.故言以慈修身.
初住入 密藏.故言善入佛慧.
初住一心三智 無能障 .故云通達大智.
初住事理分究竟.故言到於彼岸.
初住圓德眞實 與名相稱.故言名稱普聞諸佛世界.
初住能爲十法界 而作依止.安立救護.故言能度百千衆生.
初住更有無量無邊不可思議種種功德.略言十三句耳.二住去 乃至等覺 亦復如是.故大品云.初阿字門.具四十一字功德.後茶亦具諸字功德.中間亦爾.字等語等 功德亦等.
질문. 「이 부분 가운데서는 혹(惑)을 끊는 덕을 찬탄함이 그 취지니, 삼장교(三藏敎)의 보살은 혹을 끊지 못했으므로 찬탄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성문(聲聞)도 찬탄받은 바 있는 터에, 수적(垂迹)해 통교(通敎) 별교(別敎)의 보살이 된 사람들의 경우, 어찌해 그 덕을 찬탄하지 않으신 것인가.」
대답. 「일반적으로 수적하는 모습을 찬탄한다면 이 도리가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법화경은 바로 원교(圓敎)에 속하는 사람을 밝히는데 목표를 두고 있으므로, 방편에 속한 것은 찬탄하지 않으신 것뿐이다.」
問. 此中歎斷惑德.三藏不斷惑.可不被歎.聲聞尙被歎 迹爲通別 何不歎德.答 通歎於迹乃有此義.今經正明圓人.不歎方便耳.
질문. 「어찌해 여러 구(句)의 공덕을 다 초주(初住)의 보살을 찬탄한 것으로 보는 것인가.」
대답. 「다른 위계(位階)도 이와 마찬가지니 어찌 홀로 초주의 보살만이겠는가. 옛 사람은 팔지(八地)가 되어야 여러 공덕을 갖출 수 있다 말하고 의심치 않았거니와, 이제 원교(圓敎)에서는 초주(初住)를 찬탄하니, 어떤 덕이 거기에 포함되지 않으랴. 초지가 이렇거니 하물며 그 뒤의 위계(位階)이겠는가.」
법화론(法華論)에 이르되,
「상지하지문(上支下支門)은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이다. 마땅히 알지니, 처음의 〈불퇴전(不退轉)을 얻는다〉는 일구(一句)는 총상(總相)이요, 이 불퇴전에 열 가지 시현(示現)이 있으니 그것이 별상(別相)이다. 무엇이 열 가지 시현이냐 하면 문법불퇴전(聞法不退轉)은 곧 〈다라니〉요, 요설불퇴전(樂說不退轉)은 곧 〈요설변재〉요, 설불퇴전(說不退轉)은 곧 〈불퇴전의 법륜을 굴림〉이요, 의선지식불퇴전(依善知識不退轉)은 곧 〈백천의 제불(諸佛)을 공양하고 여러 덕본(德本)을 심음〉이요, 단의불퇴전(斷疑不退轉)은 곧 〈여러 부처님의 얼컫는 바가 됨〉이요, 입사불퇴전(入事不退轉)은 곧 〈자비로 몸을 닦음〉이요, 입일체지여실경불퇴전(入一切智如實境不退轉)은 곧 〈잘 불혜(佛慧)에 들어감〉이요, 의아공법공불퇴전(依我空法空不退轉)은 곧 〈대지(大智)에 통달함〉이요, 입여실경불퇴전(入如實境不退轉)은 곧 〈피안(彼岸)에 도달함〉이요, 응작소작불퇴전(應作所作不退轉)은 곧 〈백천(百千)의 중생을 건짐〉이다. 그러므로 처음의 총상(總相)을 나타낸 구(句)는 상지(上止), 다음의 여러 별상(別相)을 나타낸 구(句)는 하지(下支)다.」
라고 했다. 내가 기술(記述)하는 중에 불차제(不次第)로 초주(初住)의 덕을 찬탄한 것도, 곧 이 뜻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섭취사문(攝取事門)이란, 모든 보살은 어떤 청정한 경지 속에 주(住)하며, 어떤 방편에 말미암아 어떤 경계(境界)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가를 시현(示現)하는 까닭이다.」
라고 했다. 만약 이 도리를 따른다면 차제(次第)에 입각해 보살의 덕을 찬탄한다고 본다 해도 또한 지장이 없을 것이다.
問. 云何諸句功德 皆歎初住耶.答曰.餘位亦如是.何獨初住.舊云 八地有諸功德 不以爲疑.今圓歎初住 何德不攝.初住尙爾.何況後位耶.法華論云.上支下支門.總相別相.應知初得不退轉一句是總.此不退有十種示現.聞法不退轉.卽是陀羅尼.樂說不退轉.卽是樂說辯才.說不退轉.卽是轉不退法輪.依善知識不退轉.卽是供養百千諸佛 植衆德本.斷疑不退轉.卽是爲諸佛稱歎.入事不退轉.卽是以慈修身.入一切智如實境不退轉.卽是善入佛慧.依我空法空不退轉.卽是通達大智.入如實境不退轉.卽是到於彼岸.應作所作不退轉.卽是度百千衆生.故初總句 卽是上支.次諸別句 卽是下支.記中橫歎初住德.卽與此意同也.論云 二者攝取事門者.示現諸菩薩住何等淸淨地中 因何等方便 何等境界 何等應作所作故.若從此義.作揷歎菩薩德 亦無妨.
관심(觀心)을 통해 탄덕(歎德)을 해석컨대, 「불퇴전」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다라니」라 한 것에 대해 살펴보면 공관(空觀)은 선다라니(旋陀羅尼), 가관(假觀)은 백천선다라니(百千旋陀羅尼), 중관(中觀)은 법음방편다라니(法音方便陀羅尼)다. 또 공관으로 마음을 관(觀)하매 오직 명자(名字)만이 있는 것은 곧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요, 가관으로 마음을 관하매 무량한 마음의 마음과 그 작용이 다 법문(法門)인 것은 행지다라니(行持陀羅尼)요, 중관으로 마음을 관하건대 마음이 바로 실상(實相)인 것은 곧 의지다라니(義持陀羅尼)다.
「요설변재」에 대해 살펴보건대 가관으로 마음을 관하매 십법계(十法界)의 법을 갖추고 있음은 곧 법무애변(法無애辯)이요, 중관으로 마음을 관하매 십법계가 다 실상(實相)에 들어감은 곧 의무애변(義無애辯)이요, 공관으로 마음을 관하매 십법계가 다만 이름과 말만이 있음은 곧 사무애변(辭無애辯)이요, 일심(一心)을 관하건대 곧 삼심(三心)이고 삼심이 곧 일심이며, 일계(一界)가 곧 일체계(一切界)여서 선전무애(旋轉無애)함은 곧 요설무애변(樂說無애辯)이다.
「불퇴전의 법륜을 굴린다」고 한 말에 대해 살펴보건대, 공관은 위불퇴(位不退)의 법륜을 굴림이요, 가관은 행불퇴(行不退)의 법륜을 굴림이요, 중관은 염불퇴(念不退)의 법륜을 굴림이다.」
「백천의 제불(諸佛)을 공양한다」고 한 말에 대해 살피건대, 부처님께 공양한다 함은 오직 부처님의 말씀을 따른다 함이니,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세 가지 관심(觀心)을 닦음은 곧 불(佛)을 공양함이요, 이는 오주(五住)의 혹(惑)을 깨어 해탈을 얻기 위한 것이 되므로 곧 법(法)을 공양함이요, 삼제(三諦)의 도리가 화합함은 곧 승(僧)을 공양함이다. 또 여러 가지 수행하는 마음이 관지(觀智)의 마음을 돕는 것은 곧 불(佛)을 공양함이요, 관지의 마음이 경계(境界)를 개발(開發)하는 것은 법을 공양함이요, 경지(境智)의 마음이 화합함은 곧 승을 공양함이다.
「여러 덕본(德本)을 심는다」고 한 말에 대해 살피건대 실상(實相)의 마음은 관지(觀智)의 마음의 근본이요, 관지의 마은은 여러 수행의 마음의 근본이니, 근본을 얻으면 심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므로 「여러 덕본을 심는다」고 말함이다.
「부처님들의 일컫는 바 된다」고 말한 것을 살펴보건대, 관지(觀智)의 마음은 깨달음의 경지와 일치하고, 깨달음의 경지는 관지에 나타나는 것이어서, 지(智)는 비추는 바 있어서 항상 그 대상과 결합되게 마련이니, 곧 부처님의 찬탄하심이 되는 것이다.
「자(慈)로써 몸을 닦고」란 말에 대해 살펴보건대, 공관은 법연(法緣)의 자비의 훈수(熏修)하는 바가 되고, 가관은 중생연(衆生緣)의 자비의 훈수하는 바가 되고, 중관은 무연(無緣)의 자비의 훈수하는 바가 되게 마련이다.
「잘 불혜(佛慧)에 든다」는 말에 대해 살펴보건대, 공관은 통교(通敎)의 불혜에 들고, 가관은 별교(別敎)의 불혜에 들고, 중관은 원교(圓敎)의 불혜에 들어가게 됨이다.
「피안에 도달한다」는 말에 대해 살펴보건대, 공관은 일체지(一切智)의 피안에 이르고, 가관은 도종지(道種智)의 피안에 이르고, 중관은 일체종지(一切種智)의 피안에 이름이다.
「널리 듣는다」는 말에 대해 살펴보건대, 공관은 진제(眞諦)를 듣고, 가관은 속제(俗諦)를 듣고, 중관은 널리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를 들으며, 또 널리 삼제(三諦)를 듣는 다 할 수 있다.
「무수 백천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에 대해 살펴보건대, 공관은 사주(四住)속에 있는 백천의 중생을 제도하고, 가관은 진사(塵沙) 속에 있는 백천의 중생을 제도하고, 중관은 무명(無明) 속에 있는 백천의 중생을 제도함이다.
일심삼관(一心三觀)에는 무량한 덕이 있으므로 찬탄한대도 다할 수 없는 일이니, 여기서는 다만 간략히 설한 것뿐이다. 이원섭보살 번역
觀心解歎德者.不退轉 如前說.陀羅尼者.空觀是旋陀羅尼.假觀是百千旋陀羅尼.中觀是法音方便陀羅尼.又空觀觀心 但有名字.卽聞持陀羅尼.假觀觀心 無量心 心心數法 皆是法門.卽行持陀羅尼.中觀觀心 心卽實相.卽是義持陀羅尼.假觀觀心 具十法界法.卽法無 辯.中觀觀心 十法界皆入實相.卽義無 辯.空觀觀心 十法界但有名字語言.卽辭無 辯.觀一心卽三心.三心卽一心.一界一切界.旋轉無 .卽樂說無 辯.空觀是轉位不退法輪.假觀是轉行不退法輪.中觀是轉念不退法輪.供養佛者.·是隨順佛語.今順佛敎 修三觀心.卽是供養佛.爲破五住得解脫故.卽供養法.三諦理和 卽供養僧.又衆行心 資觀智心.卽供養佛.觀智心 開發境界.卽供養法.境智心和 卽供養僧.實相心是觀智心本.觀智心是衆行心本.得本種植則立.故言植衆德本.觀智心冥於境界.境界印於觀智.智有所照 常與境合.卽是爲佛所歎.空觀爲法緣慈所薰.假觀爲衆生緣慈所薰.中觀爲無緣慈所薰.空觀入通佛慧.假觀入別佛慧.中觀入圓佛慧.空觀到一切智彼岸.假觀到道種智彼岸.中觀到一切種智彼岸.空觀聞於眞諦.假觀聞於俗諦.中觀普聞中道第一義諦.亦普聞三諦.空觀度四住百千衆生.假觀度塵沙百千衆生.中觀度無明百千衆生.一心三觀 有無量德.歎不能盡.止略說耳.
3-서품에서 팔보살의 공덕을 말씀하실 때에, 皆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退轉에서 皆得陀羅尼 樂說辯才 轉不退轉法輪 供養無量百千諸佛 於諸佛所 植衆德本 常爲諸佛之所稱歎 以慈修身 善入佛慧 通達大智 到於彼岸 名稱普聞無量世界 能度無數百千衆生까지 계위를 나누었다.
4-皆得陀羅尼에서 能度無數百千衆生까지가 수행의 계위를 나눈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경우는 득타라니(得陀羅尼)에서 皆得陀羅尼 樂說辯才 轉不退轉法輪 供養無量百千諸佛 於諸佛所 植衆德本 常爲諸佛之所稱歎 以慈修身 善入佛慧 通達大智 到於彼岸 名稱普聞無量世界 能度無數百千衆生까지의 과정이 모두 있으나, 증불퇴지(證不退智)가 皆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退轉의 글과 차이가 있다.
5-皆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退轉은 원교에 들어온 것을 말하고, 증불퇴지(證不退智)는 皆於阿耨多羅三藐三菩를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품에서 팔만보살의 계위를 우리들에 입각하여 나열을 하면, 皆得陀羅尼 득다라니(得陀羅尼에서) 樂說辯才 轉不退轉法輪 供養無量百千諸佛 於諸佛所 植衆德本 常爲諸佛之所稱歎 以慈修身 善入佛慧 通達大智 到於彼岸 名稱普聞無量世界 能度無數百千衆生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증불퇴지(證不退智까지)의 글이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6-일교(一敎)에 입각하여, 예전에 서품에서 연설한 팔만보살의 공덕을 다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皆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不退轉
무상(無上)을 일승(一乘)이라 하고 정등(正等)을 묘법(妙法)이라 하며 정각(正覺)을 연화(蓮華)라 하고, 법화경(法華經) 읽는 사람을 경(經)이라 부른다. 무상(無上)의 일승(一乘)과 정등(正等)의 묘법(妙法)과 정각(正覺)의 연화(蓮華)는 중생(衆生)이 있든 없든 존재(存在)하는 것이지만, 경전(經典)은 반드시 중생(衆生)이 있어야 존재(存在)하는 것이다.
皆得陀羅尼 樂說辯才 轉不退轉法輪
시방을 다라니라 한다면 시방의 모든 중생이 다라니가 된다. 따라서 다라니는 일승(一乘)이고, 요설변재 즉 뛰어난 설법의 재주로 인해 중생을 구제하고 자신도 수행을 하니 묘법(妙法)이며, 불퇴전 즉 물러서지 않는 법의 수레바퀴는 연꽃이 더러운 곳에 있어도 꽃과 열매가 함께 자라니 마치 중생이 법화경을 읽으면 성불을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연화(蓮華)가 되며, 이 글을 읽는 모든 중생은 경(經)이 된다. 경(經)이란 책을 가리키는데 만약 중생이 경(經)을 읽지 않으면 무슨 이유로 경(經)이 될 수 있으랴!
供養無量 百千諸佛
일체중생에게 법화경을 유통하니 이를 공양이라 하고 일승(一乘)이라 한다. 묘법의 이치가 헤아릴 수 없으니 이를 묘법(妙法)이라 하고, 백천의 인연(因緣)이 피어오르니 이를 연화(蓮華)라 하고, 모든 가르침이 부처님으로부터 나오니 이를 경(經)이라 한다.
常爲諸佛 之所稱歎
상(常)은 항상하는 것이니 일승(一乘)이고, 제불(諸佛)은 원래 불가사의하신 분이시니 묘법(妙法)이고, 칭탄(稱歎)은 보살과 중생이 함께 가려고 하는 것이니 연화(蓮華)이고, 법화경의 모든 불자(佛子)는 경(經)에 속한다.
以慈修身
시방의 모든 중생을 대(大)라 하니 이를 일승(一乘)이라 하고, 묘법심(妙法心)이 바로 자비심(慈悲心)이다. 수신성불(修身成佛-몸을 닦아 부처님이 됨)이라 한다면 수신(修身)은 연화(蓮華)가 된다. 이 법화경을 읽는 모든 사람은 경(經)이라 할 수 있다. 경(經)을 어디서 찾으랴!
善入佛慧
일승(一乘)은 부처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 지혜(智慧)는 묘법(妙法)이며, 연화(蓮華)를 꽃 중에서 뛰어나고 하니 선(善)이라 하고, 입(入)은 일체중생을 가리키는 말이니 경(經)이 된다.
通達大智
대(大)가 시방(十方)의 일체중생과 함께 한다면 일승(一乘)이 될 것이고, 그 지혜가 부처님으로부터 나왔다면 묘법(妙法)이 될 것이며, 세속에 있으면서 번뇌에 물들지 않았으니 연화(蓮華)가 되며, 법화경을 읽는 일체중생은 경(經)이 될 것이다.
到於彼岸
피(彼)가 이미 시방세계라면 시방세계는 일승(一乘)만 있을 뿐. 이승(二乘)도 삼승(三乘)도 없다. 안(岸)이 불계(佛界)라면 처음부터 무명(無明)도 중생도 번뇌도 없는 것이니 묘법(妙法)일 수밖에 없다. 도(到)를 하는 주체가 중생이라면 연화(蓮華)가 처음부터 꽃과 열매를 함께 피우는 것과 같다. 법화경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피안(彼岸)에 도달하게 된다면 어찌 경(經)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名稱普聞無量世界
무량(無量)은 일승(一乘)이요! 세계(世界)는 묘법(妙法)이다. 명칭(名稱)이 연화(蓮華)라면, 보문(普聞)에 의해 중생이 성불(成佛)을 하니 어찌 경(經)이 되지 않으랴!
能度無數百千衆生
제도(濟度)를 하는 자와 제도를 받을 자가 모두 일승(一乘) 안에 있기 때문에 능도(能度)라 하니, 능(能)은 보살이고 도(度)는 중생이다. 무수(無數)한 백천(百千)의 법문과 방편과 비유를 가지고 제도를 할 바에야 어찌 묘법(妙法)이라 하지 않으랴! 따라서 무수를 묘(妙)라 하고 백천을 법(法)이라 한다. 보살과 중생이 함께 있기에 연화(蓮華)라 하니 연(蓮)을 보살이라 하고 화(華)를 중생일 한다. 이 모두 법화경 안에서는 삼승(三乘)의 근기가 모두 하나가 되기에 경(經)이라 부른다.
見諸如來-1위.(如來位)
坐師子座-2위.(師子位)
諸比丘衆-3위.(比丘位)
(圍繞說法-첫 번째 설법을 들음)-4위..........................一夢夢中(說法位)
又見龍神 阿修羅等 數如恒沙 恭敬合掌-5위.(八部位)
自見其身6-1.(而爲說法-자신이 직접 설법을 함)-6,2위.....二夢說法(自見位)
又見諸佛-7위. 如是相(諸佛位)
身相金色-8위. 如是性(金色位)
放無量光-9위. 如是體(光明位)
照於一切-10위. 如是力(一切位)
以梵音聲-11위. 如是作(音聲位)
(演說諸法-두 번째 설법을 들음)-12위. 如是因(諸法位)
佛爲四衆-13위. 如是緣(四衆位)
(說無上法-세 번째 설법을 들음)-14위. 如是果(無上位)
見身處中-15위. 如是報(見身位)
合掌讚佛-16位. 如是本末究竟等...............................三夢讚佛(讚佛位)
聞法歡喜-17位(歡喜位)----------------------수희품(隨喜品)
而爲供養-18位(供養位)----------------------공양품(供養品)
得陀羅尼-19位(羅尼位)
證不退智-20位(不退位)----------------------독송품(讀誦品)
佛知其心 深入佛道-21位(佛道位)
卽爲授記 成最正覺-22位(授記位)
汝善男子 當於來世-23位(來世位)
得無量智 佛之大道-24位(大道位)
國土嚴淨 廣大無比-25位(國土位)----------------유통품(流通品)
亦有四衆 合掌聽法-26位(聽法位)-----설법품(說法品).........四夢授記
-偈頌-
시방을 다라니라 한다면
시방의 모든 중생이
다라니가 된다.-1
따라서 다라니는
일승(一乘)이고,-2
요설변재(樂說辯才) 즉
뛰어난 설법의 재주로 인해
중생을 구제하고
자신도 수행을 하니 묘법(妙法)이며,-3
불퇴전(不退轉) 즉 물러서지 않는
법의 수레바퀴는
연꽃이 더러운 곳에 있어도
꽃과 열매가 함께 자라니
마치 중생이 법화경을 읽으면
성불을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연화(蓮華)가 되며,-4
이 글을 읽는 모든 중생은 경(經)이 된다.
경(經)이란 책을 가리키는데
만약 중생이 경(經)을 읽지 않으면
무슨 이유로 경(經)이 될 수 있으랴!-5
-寶雲地湧 羅尼合掌-
一乘妙法蓮華經 一切諸佛神通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