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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함성으로 뜨거웠던 마산 민주당사 앞 1960년 3월과 2010년 3월
오늘은 국가기념일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효시인 마산 3·15의거가 발발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 역사적 사건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또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3·15세대가 점점 사라지면서 3·15의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갔고, 빠르게 변해 가는 도심은 역사의 흔적들을 집어삼켰다. 이에 본지는 50년 전, 역사의 현장을 다시금 찾아 봤다. 사진 한 장에 의존해 당시 생존자들에게 묻고 물어 찾은 현장은 생경한 모습이었다. 작은 동판 또는 표지석, 기념비만이 묵묵한 표정으로 현장을 증언하고 있었다. ◆민주당사 마산시당부 앞= 1960년 3월 15일, 당대 경남에서 최고 번화가였던 불종거리가 항쟁의 거리로 분했다. 오전 10시30분께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정선거에 반발한 민주당원 30여 명이 당사 앞으로 뛰쳐나오며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가두 방송을 통해 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왼쪽 사진은 당시 표권을 도둑맞은 마산시민들이 분노하며 민주당사 앞으로 모여드는 장면이다. 50년이 흐른 지금, 다방과 당사 사무실이 있던 작은 3층 건물 자리에는 음식점, 카페가 있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의 뜨거움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건물 옆, 도로 바닥에 심어진 작은 동판이 전부다. 3·15의거 발원지임을 표시한 동판이다. 13일 오후 3·15의거 시위 행렬 재연행사에 참가한 학생들이 3·15의거 동판 위를 지나가며 50년 전 마산시민의 용기와 열정을 느끼고 있다. 지난 2006년 3·15의거 기념사업회에서 만든 이 동판은 “3·15가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거리에서 가장 낮은 바닥에 깔게 된 것”이라고 사업회 측 관계자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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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국화꽃마다 시민들의 뜨거운 마음 담다
◆김주열 시신 인양 지점의 그날과 오늘= 1960년 4월 11일 아침녘 ‘큰 고기’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큰 고기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은 3월 15일 투쟁하다 행방불명된 소년 김주열이었다.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된 김주열의 처참한 시신은 시민을 분노케 했고, 그 분노는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사진>은 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의 시신이 한 노인의 조개잡이 배에 실려 육지에 닿았을 때 찍힌 것이다. 그의 시신은 고향 남원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작은 표지석이 세워졌다.
14일 찾은 인양 지점에는 지난 2002년 4월 19일에 새로 세운 표지판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고, 그의 시신을 옮겨 왔던 마산 앞바다는 조용히 출렁이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데다 표지석 뒤편으로 철조망이 쳐진 풍광이 다소 을씨년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누군가 갖다 놓은 하얀 국화꽃은 그의 죽음이 몰고온 시민들의 뜨거운 눈물과 열기를 떠올리게 했다. 지난 11일 오전 마산 중앙부두에서 열린 김주열 열사 추모기념식에서 김 열사의 모교 후배인 금지중학교 학생들이 헌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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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정신 후대에 면면히 흘러라
마산정신에서 국민정신으로 승화
◆시위 인파 가득 찬 마산시내 거리= 1960년 4월 11일 오후, 행방불명됐던 김주열 군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소문이 마산시내 전역에 일파만파 퍼졌고, 시내 중심가에는 격분한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김주열의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을 찾았고, 김주열을 죽인 경찰관을 잡겠다며 남성동 파출소와 마산경찰서 앞을 오가며 시위했다. 주동하는 이가 없어도 너도나도 집 문을 걸어 잠근 채 거리로 나섰고, 그 숫자가 무려 1만 명에 달했다. 사진은 당시 시위 인파로 가득 차 있는 마산 남성동파출소 인근 거리의 모습이다.
50년만에 남성동 파출소 인근에서 재연된 3·15의거.
3·15의거 50주년을 맞아 이승만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항거했던 3월 15일 당시의 상황이 13일 오후 재연됐다. 마산시 오동동 옛 민주당사 앞과 성호초등학교 앞에서 출발하여 3·15의거탑까지 시위행렬에 참가한 시민들의 가슴 속에 50년 전 최초로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마산시민들의 용기와 열정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50년만에 3·15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것도 축하했다.
글=조고운기자·사진=성민건기자
15일 오전 마산 3·15 아트센터에서 열린 3·15의거 50주년 기념식에서 김양 국가보훈처장, 김태호 도지사, 백한기 3·15의거 기념사업회장 등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성민건기자/
13일 오후 마산 3·15기념탑 앞에서 3·15 상황 재연극 참가자들이 당시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성민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