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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1-55절
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류하는 자들과 네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출로 먹을 것을 삼을지니라 』
육년 동안은 밭에 포도를 심거나 파종하여 열매를 거둘 수 있으나 칠년째 되는 해는 안식년이므로 포도농사나 다른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열매를 거둘 수도 없다는 말씀이다. 안식년에도 자생적으로 난 열매는 먹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가축들과 종들의 먹거리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안식년을 주신 이유는 이 땅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뿐만 아니라 사람이 두 발 디디고 살아가는 땅에도 안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땅이 쉼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의 백성이 안식년을 지켜야 땅도 쉼을 얻기에 땅의 안식을 사람에게 명령하시는 것이다. 땅이 생명력을 회복하고, 땅이 식물을 자라게 하는 힘을 회복하는 것은 그 땅을 경작하는 사람이 안식년을 지킴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사람에게도 안식을 주고 그 사람이 살아가는 땅에도 안식을 준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그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 복되고, 그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 자연, 주변 사람들까지 복되게 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안식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존재들에게 인간들은 이 땅에서 안식할지 모르나 참 안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씀해주신다. 하나님이 율법에서 안식일을 지켜라 라고 하신 것은 애굽으로 부터 나와서 시내산에 있을 때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 가두신 이유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하신 것이였다.
『부르짖으라』고 하신 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님이 한 백성을 선택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조치였다. 그 민족을 끄집어 내어서 창세기 1-3절에서 약속하신 안식에 대한 약속을 율법을 통해서 이제 이스라엘과 새롭게 시작을 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라 라고 하시는 것을 신명기에서 볼 수 있다. 『너희는 기억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애굽에서는 고통이었는데, 하나님이 건져주셨으니 안식을 주신 것이다. 애굽에서 나온 것이 안식의 시작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의 완성인 것이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첫째 이유는 애굽에서 종되었지만, 지금은 종이 아니다 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안식을 믿지 않는 것이다.
구약에서 안식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참 안식을 위한 연습과정과 같다. 안식을 지키라고 하신 두번째 이유는 대대 후손과의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표징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애굽을 나와서 애굽을 벗어났다 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지키는 것은 영원한 언약의 표징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안식을 받을 것이다 라는 것을 믿고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는데, 지키지 않는 것은 애굽으로 부터 고통 가운데 해방되었고, 앞으로 영원한 참 안식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안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돌에 쳐 죽이라고 하신 것이다. 돌에 맞아 죽은 것을 보고 백성들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안식일을 범하면 죽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원한 안식을 백성들이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바라보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이유는 두가지인 것이다.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것과 장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8-12.『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8-22절의 내용은 희년에 관한 것이다.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지는데, 첫째, 희년의 정확한 때를 계산하는 방법과 그 날의 기본 성격을 정의한 부분(8 - 12절), 그 희년에 취할 기본 행동(13 - 17절) , 그리고 희년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유익(18 - 22) 들을 다루고 있다.
희년의 시기에 대한 정확한 날짜를 규정한다. 즉 칠년에 한번씩 오는 안식년이 일곱번이 지난 49년째 7월 10일인 속죄일에 큰 나팔을 부는 것으로 희년이 선포되었다. 희년이 속죄일에 선포되었다는 것은 속죄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화해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희년을 오십년이 되는 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시작되는 해와 마지막 해를 동시에 함께 세는 방식에 의해서 오십년이 된 것이다. 이 해는 거룩한 해이며 드로르(דְּרֹ֛ור :자유 또는 해방)가 선포되었다. 드로르(דְּרֹ֛ור)라는 단어는 아카디아어의 안두라루(An-duraru:부채로 부터 해방)에서 온 차용어인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때에 따라서 왕이 이러한 면제령을 내리곤 하였다. 첫째는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땅을 빼앗겼던 사람들에게 드로르가 선포되어 그 땅을 돌려 받았다. 둘째는 모든 히브리인 노예에게 드로르가 선포되어 희년에 자유의 몸이되었다. 셋째는 땅에 드로르가 선포됨으로 땅을 경작하지 않고 땅에 해방을 주었다.
이러한 자유의 규정은 그 땅에 사는 모든 주민, 즉 경작지를 소유한 정착민들에게 주어졌다. 이들은 희년이 되면 그 사이에 떨어져 있었을 자기들의 소유지와 지파로 돌아 가야 했다. 이들이 소유지와 지파로부터 떠나야 했던 이유가 흔히 부채때문이었으므로, 부채로부터의 해방은 '귀환'의 전제가 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원래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질서의 복귀를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희년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희년을 히브리어로 요벨(יֹובֵ֥ל)이라고 하는데, 요벨은 수양의 뿔이라는 뜻이다.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부는 날이라는 뜻이다. 수양은 희생 제물을 의미한다. 그리고 뿔은 권세를 나타낸다. 수양의 뿔로 나팔을 분다는 것은 희생 제물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는다는 소식이 희년의 나팔소리가 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 양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속을 받는다는 복음이 바로 희년의 나팔소리인 것이다. 이를 세례요한은 잘 증거해 주었다.
세례 요한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 할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라 고 선포해 주었던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보내신 희생제물이라는 뜻이다. 세례 요한이 온 세상에 희년의 나팔 소리를 분 것이다. 이 예수가 바로 너희들의 죄를 해결해 주실 분이다 라고 알려 준 것이다.
희년의 나팔이 울려 퍼지면 매였던 종들이 풀려나고, 잃어버렸던 토지도 돌려받게 된다. 희년은 종을 해방 시키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다시 되찾는 날이다. 희년이 되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희년의 나팔 소리는 가난하고 매인 종들에게 구원의 소리인 것이다. 토지를 잃어버리고 가난하게 살던 자들과 억울하게 종으로 팔려서 종노릇하던 자들은 희년을 학수고대하고 기다렸다. 이 날을 소망하면서 살았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것과도 같다.그래서, 성도는 모든 수고와 슬픔과 고통을 털어버리고 눈물 없고 고통 없고 아픔이나 사망이 없는 하나님 나라로 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희년은 신약의 예수님의 부활 과도 같은 것이다.
희년의 나팔은 7월 10일 속죄일에 불었다.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러 지성소에 들어갔다. 대제사장은 일 년 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보고를 했다. 보고를 마치면 하나님께서 영광의 구름으로 임재하셔서 환영해 주셨다. 그럼 제사장들은 일제히 양각 나팔을 불면서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일 년 동안의 모든 죄를 탕감 받았음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받아 주셨음을 알리는 소리인 것이다.
속죄일에 부는 나팔 소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한다는 소리이다. 희년의 나팔 소리는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지게 된다. 온 나라는 축제가 시작이 된다. 속죄일의 나팔 소리는 안식을 주는 기쁨의 소리인 것이다. 기쁜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분과 연합된 성도는 함께 부활하여,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진 지성소로 재림하여 들어오시는 것이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 된다.
누가복음 4장 16-21절에서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13-17.『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 네 이웃에게 팔든지 네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 각 사람은 그의 형제를 속이지 말라 그 희년 후의 연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서 살 것이요 그도 소출을 얻을 연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 연수가 많으면 너는 그것의 값을 많이 매기고 연수가 적으면 너는 그것의 값을 적게 매길지니 곧 그가 소출의 다소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이라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땅을 사고 파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것, 즉 다른 사람의 곤궁한 처지를 악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리고 희년이 되면 해방되는 것을 고려하여 매매 가격을 정하는 문제가 논의되어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그것을 위탁받은 자로 여겼기 때문에 땅을 사고 파는 것이 없었고, 구매자가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땅을 경작하는 권리였다. 그러므로 소출을 거둘 수 있을 햇수에 따라, 희년까지의 햇수가 많이 남았으면 비쌌고, 적게 남았으면 값이 싸게 되었다.
18-22.『 너희는 내 규례를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 땅은 그것의 열매를 내리니 너희가 배불리 먹고 거기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너희가 여덟째 해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소출을 먹을 것이며 아홉째 해에 그 땅에 소출이 들어오기까지 너희는 묵은 것을 먹으리라』
여기서는 희년을 지키는 것이 저들에게 손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큰 이익을 얻는 것임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약속의 내용은 첫째, 그들이 땅에서 안전히 거할 수 있고, 둘째, 그들이 그 땅의 충분한 소출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25장 18-22절에는 율법을 내리시는 여호와께서 율법을 받아 준수하는 자들과 토론을 하는 것 같은 문구가 나온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안식년에 먹을 것이 없을 거라는 항의에 대해, 육년째 해에는 두곱의 소출을 베푸는 복을 내릴 것을 약속한다. 여섯째 해에 곡식과 열매를 거두고 나면, 그 곡식과 열매로 여섯째 해를 나고, 그 다음해인 안식년까지 먹어야 하며, 안식년 다음해인 여덟째 해에 파종하여 곡식을 거두기까지도 여섯째 해의 곡식으로 버텨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안식년을 갖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안식년을 지나고 농사를 지어서 소출을 얻기까지 3년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소출의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하나님은 안식년이 일곱번 지나고 난 그 다음해 즉 오십년째 해를 희년으로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희년에는 종에게 자유가 선포되고 가난과 여러가지 이유로 빼앗겼던 땅과 소유지가 회복되는 해이기 때문에 복된 해, 축제의 해다. 이에 대한 자세한 규례가 설명되고 있다. 13-17절은 토지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특히 23-28절은 기업으로 물려받은 땅에 대해서, 29-34절은 성안과 성밖에 있는 가옥에 대해서, 35-38절은 가난한 채무자에 대해서, 39-46절은 종으로 팔린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사람에 대해서, 47-55절은 실제 사례를 들어 희년의 규례를 설명하고 있다.
안식년과 마찬가지로 희년에도 농사나 파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곱번째 안식년이 지난 희년을 지낼 때는 4년을 육년째 해의 소출로 먹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50년째 해를 희년, 복된 해, 해방과 자유의 해, 축제의 해로 선포하신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이 가능한 이유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때문이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은 광야로 나와 먹을 것이 전혀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으로 먹을 것을 공급하셨다. 전혀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신 것이다. 광야를 행군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댈 곳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다. 그들이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여섯째 날 일곱째 날까지 공급해주시는 하나님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일곱째 되는 날 쉬기를 원하셨다. 이를 위해 여섯째 날에는 만나를 이틀치 먹을 만큼 베풀어 주셨다.
그런데도 일곱째 날에 만나를 거두려고 들판에 나갔던 사람들은 모두 허탕을 치고 돌아와야만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그 공급하심을 신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는 안식일이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헛수고를 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공급하심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안식할 수 없다. 일곱째 날은 안식일로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는 자임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인 맛나를 얻으려 하는 자는 여전히 약속의 씨를 갖고 있지 못한 자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안식에 대한 규례를 통해서 인간들이 참 안식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안식하고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미래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들도 안식하는 것이다. 언젠가 돌아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누가복음 4장 18-21절에서『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희년)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그리고는 회당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주목하고 있을 때 이렇게 덧붙이셨다.『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예수님이 백성들에게 희년을 선포하셨다. 즉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전의 건물 성전이 폐하여지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성전이 될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23-28.『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23-55절은 희년제도의 내용에 대해 크게 네부분으로 설명해 준다. 첫째는 23-28절에서 토지무르기에 대해서, 둘째는 29-34절에서 가옥환원에 대해서, 셋째는 35-38절에서 이자없는 대부에 대해서, 넷째는 39-55절에서 노예해방에 대해서 설명한다.
먼저 토지 무르기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토지를 영원히 팔지 못하는 것은 토지는 다 내것이고 너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니 하나님과 동행하고 땅을 영원히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자라도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다른 사람의 땅을 영원히 차지하지 못하게 하셨다. 네 친척 가운데 누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와서 무를 것이요 만일 무를 자가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여 무를 힘이 있으면 땅을 산 사람이 사용한 년수 만큼의 돈을 빼고 나머지를 주고 땅을 자기 소유지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그 땅을 다시 살 힘이 없으면 그 땅은 희년까지 산 사람의 손에 있다가 희년이 되면 그 판자의 기업으로 돌아 오게 된다. 땅을 산 사람도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또 파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기업의 사람이 와서 도로 사기까지 자기가 땅을 사용하다가 희년이 되면 반드시 그 기업의 사람에게 돌려 주어야 했다.
29-34.『성벽 있는 성 내의 가옥을 팔았으면 판 지 만 일 년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그 기한 안에 무르려니와 일 년 안에 무르지 못하면 그 성 안의 가옥은 산 자의 소유로 확정되어 대대로 영구히 그에게 속하고 희년에라도 돌려보내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성벽이 둘리지 아니한 촌락의 가옥은 나라의 전토와 같이 물러 주기도 할 것이요 희년에 돌려보내기도 할 것이니라 레위 족속의 성읍 곧 그들의 소유의 성읍의 가옥은 레위 사람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으나 만일 레위 사람이 무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유 성읍의 판 가옥은 희년에 돌려 보낼지니 이는 레위 사람의 성읍의 가옥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받은 그들의 기업이 됨이니라 그러나 그들의 성읍 주위에 있는 들판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지이니 팔지 못할지니라』
둘째 가옥환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성 안에 집은 부자들의 집이다. 그들이 집을 팔았을 때는 그가 일년안에 언제든지 다시 살수 있지만 한해 안에 도로 사지 않으면 그 집은 산 사람의 소유가 되고 희년이 되어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성곽이 없는 마을에 지은 집은 가난한 사람의 집이다. 그 집은 판 사람이 언제든지 무를 수 있고 되돌려 살 힘이 없으면 희년이 되면 판 사람에게 돌아 가게 된다. 판 것을 다시 되돌려 살 수는 있지만 그럴 힘이 없는 사람들도 도로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이셨다.
그러나 레위 사람의 집은 성안에 있어도 다시 무를 수가 있고 다시 무르지 못하면 희년에는 자기의 소유로 돌아 온다. 또 레위 사람의 성읍에 딸린 들판은 그들의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팔지도 사지도 못하게 하셨다. 또 네 형제가 가난하여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나그네나 동거인처럼 같이 생활하라고 하시며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함께 살라는 것이다. 가난한 형제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주지 말고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고 하셨다. 그냥 주라고 하시는 것이다.
35-38.『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셋째는 이자없는 대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지낼 때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받고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자기의 가난한 형제들의 땅을 물러주고 가난한 형제들이 살아 갈수 있도록 돌보며 사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레위기 27장 30절에 하나님이 땅의 십분의 일을 내라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짓고 과실을 생산했는데,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한다. 해를 주고 비를 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자연의 혜택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갖는 혜택이다.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레위기 25장 23절에서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들은 나그네』라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도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 소작료를 내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작료를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십분의 일이 하나님의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하나님이 그 과일과 양식을 먹기 위해서 소작료를 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신 이유는 백성들이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나그네』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함이다. 즉 이 땅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이다. 어디로 부터 온 나그네인가? 땅에 사는 것이 나그네이면 하나님 나라에서 온 것을 말한다. 만일 하나님 나라가 아닌 땅과 관련해서만 말한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라고 할 경우 본향은 애굽이고 광야라는 말이 되는데, 말이 안되는 것이다.
땅에 대한 나그네라는 표현은 물질세계에 대한 나그네를 말한다. 하나님이 십일조를 내라고 말하는 것은 너희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니고 나그네이므로, 너희는 여기에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십일조를 통해서 이 나그네라는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고 그냥 십일조 만 내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의인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정작 십일조를 통해서 의와 인과 신을 깨닫기를 바랐는데, 십일조 만 내고 의와 인과 신은 생각하지 못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그네라는 것을 깨달으면『스스로 어딘가로 부터 왔다』라고 예수님이 생각해 보라는 말씀이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본향은 바로 하나님 나라 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좋은가 아니면 이 세상이 좋은가』를 초등학생에게 물어본다면 대부분 하나님 나라 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땅에 왜 왔는가 라고 묻는다면 쫒겨난 것도 다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신데, 아무 죄도 없는 자들을 이 세상에 쫒아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무슨 이유가 반드시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일들을 좀 깨달아라 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십일조를 내면서 그런 것을 깨달아라 라고 하는 것이다.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와 함께 있었는데, 나를 떠나서 스스로 선을 이룰 수 있다고 하니까 세상에 내 보냈는데, 그래서 이 땅에 온 것이다. 그런데 땅에 온 것을 너희들은 모르니까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나에게 십일조를 내라, 그 십일조 속에는 너희가 나그네 라는 것을 내가 알려주는 것이다. 땅은 내 것이므로 절대 팔지 말고 반드시 십일조를 내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시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그네라는 것을 깨달으면 본향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도 감옥 속에 갇혀있으면 밖의 세상인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늘 집에서 있었던 기억들을 떠 올리면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감옥이 너무 좋아서 나는 밖의 집이 기억나지 않는다 라든가 가기 싫다고 말한다면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가고 싶으면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왜 왔으며, 과연 하나님 나라를 갈 수 있는가 라고 말이다.
교회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나는『예수 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만일 하나님이『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내는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십일조에 담긴 의미도 모르면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 말씀하시는 속에 의와 인과 신을 버리지 말았어야 한다는 의미를 깨달았으면서도, 십일조를 여전히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여전히 나그네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을 믿지 않고,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 자들인 셈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아닌 것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육신적으로는 이 땅에 있는 자이지만 나그네가 아니요, 하나님 나라에 인치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말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39-46.『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 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들이니 종으로 팔지 말 것이라 너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네 종은 남녀를 막론하고 네 사방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 남녀 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사올 것이며 또 너희 중에 거류하는 동거인들의 자녀 중에서도 너희가 사올 수 있고 또 그들이 너희와 함께 있어서 너희 땅에서 가정을 이룬 자들 중에서도 그리 할 수 있은즉 그들이 너희의 소유가 될지니라 너희는 그들을 너희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소유가 되게 할 것이라 이방인 중에서는 너희가 영원한 종을 삼으려니와 너희 동족 이스라엘 자손은 너희가 피차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
넷째는 노예해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가난하게 되어 팔려온 동족에게 은혜로 대하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의미는 부모의 부재로 나타나는 가난, 그래서 곤고한 상태가 되거나, 부부 중에서 여인이 버림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난의 개념은 정상적인 관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고엘제도다. 또한 가난한 자들은 누군가가 고엘이 되어주길 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 형제를 위해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고엘 제도는 고대 근동 히브리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제도로 친족 및 혈연 공동체를 중심으로 사회생활이 이루어지던 때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의 생명과 재산 및 가문을 보호해 주기 위한 일종의 상호보호제도였다. 은혜를 나누는 것이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이다.
47-55.『만일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은 부유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있는 네 형제는 가난하게 되므로 그가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 또는 거류민의 가족의 후손에게 팔리면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또는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 중에서 그를 속량할 것이요 그가 부유하게 되면 스스로 속량하되 자기 몸이 팔린 해로부터 희년까지를 그 산 자와 계산하여 그 연수를 따라서 그 몸의 값을 정할 때에 그 사람을 섬긴 날을 그 사람에게 고용된 날로 여길 것이라 만일 남은 해가 많으면 그 연수대로 팔린 값에서 속량하는 값을 그 사람에게 도로 주고 만일 희년까지 남은 해가 적으면 그 사람과 계산하여 그 연수대로 속량하는 그 값을 그에게 도로 줄지며 주인은 그를 매년의 삯꾼과 같이 여기고 네 목전에서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 그가 이같이 속량되지 못하면 희년에 이르러는 그와 그의 자녀가 자유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7절에서 55절까지의 내용은 가난하여 이방인에게 팔린 동족에 대한 규례를 말하고 있다. 앞서 44절에서 46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끼리는 서로 종으로 부리지 못하게 하시면서도 이방인은 종으로 살 수 있고, 또한 후손에게 기업으로 상속할 수도 있도록 하셨다. 더구나 종이 된 이방인은 희년이 되어도 희년이 주는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없도록 하셨다. 이로 인해 이방인은 한번 종이 되면 영원히 종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이방인이란 복음과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는 자를 상징하며, 종이란 죄의 종 노릇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한번 종이 된 이방인, 복음과 전현 관계없는 이방인은 희년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47절 이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의 집에 종으로 팔려 갈 수 있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번 종으로 팔려 가면 영원토록 종에서 해방 될 수 없었던 이방인과는 달리 언제든지 값을 무르면 해방될 수 있었고, 희년에는 조건없이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으로 팔려가는 것은 일정 기간 동안이었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도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집에 종으로 팔려 갈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간 사람들도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육의 몸이 사탄의 영향력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날마다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육의 몸은 죽고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육의 몸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육의 몸이 죽고, 성령의 능력으로 영의 몸으로 부활하여 사탄으로부터 자유함을 입는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성도가 고난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잠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 그분이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속량이라는 단어가 8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어로 가알이라는 단어다. 속량은 값을 주고 되사는 의미를 갖는다. 사탄의 종을 예수의 피값으로 다시 사탄으로부터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값을 지불하고 죄의 종을 되 사오셨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회개하는 죄인들을 구원하셨다. 이것이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