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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조치원 원수산 비암사 뱀골 비룡산 산삼 독락정 석불 며느리 바위 |
1) 연기
서거정(徐居正) <연기에서>(燕岐題詩)
龜嶺行多險 구령을 넘을 땐 험하기만 하더니
燕岐路自平 연기 땅은 길이 절로 평탄하구나
山連鷄岫翠 산은 계룡산과 연하여 푸르고
水入錦江明 물은 금강으로 들어 맑게 흐르네
有客頻來往 오가는 손님들 저토록 빈번하거니
何時了送迎 보내고 맞는 일을 어느 때에 마치랴.
凄涼孤館夜 외로운 객관의 처량한 한밤중에
惱殺遠遊情 먼 길 나그네 심정 산란하구나.
=> 옛 사람이 연기에서 지은 이런 시가 있다. 옛적에도 오가는 손님이 많았다고 하니 기이하다.
2) 조치원
조치원(鳥致院)이라는 지명은 신라시대의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이곳에 시장을 개설하고 상업을 권장하여 ‘최치원시장’이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와전되어 ‘조치원’이 되었다고 한다.
=> 어원을 몰라 무리한 추리를 한 것 같다.
3) 원수산
(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연기현(燕歧縣)조에 있는 기사를 옮긴다. 원수산(元帥山) 현 남쪽 5리에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17년에 합단(哈丹)이 침범해 왔다. 왕이 구원병을 원 나라에 청하니, 세조(世祖)가 평장사(平章事) 설도간(薛闍干)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돕게 하고, 왕이 한희유(韓希愈), 김흔(金忻) 등으로 하여금 3군(軍)을 거느리고 원 나라 군사와 함께 합단의 군병과 더불어 본현 북쪽 청주 경계에 위치한 정좌상(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공주 웅진까지 추격하니, 땅에 깔린 시체가 30여 리까지 연하였으며, 벤 머리와 노획한 병기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래서 세속에서 지금까지도 그 군사가 주둔했던 곳을 원수산이라고 부른다.
(나) 옛날에 두 형제가 근동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살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주인이 사이가 좋지 않으니 하인들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작은 집 하인과 큰 집 하인이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었는데, 하인들까지 참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곡괭이, 몽둥이 등이 등장하더니 마을이 마치 전쟁터처럼 치열한 전투장으로 변하였다. 두 형제의 싸움에서 아우집이 이겼고, 형은 아우와 매일 이렇게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고 이곳을 떠났다. 그때 형과 아우는 마을 뒷산의 산봉우리가 되었는데, 둘 사이가 좋지 않아 이 산을 원수봉(왼수봉)이라 불렀다. 이런 내용이 해 내려오자, 그곳 마을 사람들은 원수산 아래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 누가 어디에서 사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 ‘원수산’이라는 지명을 (가)에서는 ‘元帥山’으로, (나)에서는 ‘怨讐山’으로 이해하면서 상이한 유래를 말한다. (가)가 지닌 원래의 의미가 망각되면서 (나)라고 하는 설명이 생겨났을 수 있다.
4) 비암사
비암사(碑巖寺)는 전의면 운주산에 있는 절이다. 창건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는데, 백제가 망한 다음 부흥운동을 하는 유민들이 지었다는 말이 전한다. “비암”이라는 절 이름은 우리말 “뱀”을 길게 발음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어느 청년이 절에 와서 밤에 탑돌이를 하고 그 절의 비구니에게 물 한 잔을 청했다. 비구니가 물을 주고 밤에 탑돌이 하는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사연을 말을 할 수 없다는 듯이 빙그레 웃고는 그냥 떠나갔다. 청년이 사는 곳이 궁금해 미행했다. 청년은 산속의 커다란 바위에 뚫린 굴로 들어가 갔다. 비구니가 따라 들어가니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비구니가 놀라서 서 있으니, 청년이 말했다. “나는 사람이 되는 깃이 소원인데, 100일 동안 탑돌이를 하면 사람이 된다고 했다. 내 정체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숨겨 왔는데, 이제 정체가 탄로 났으니 평생 구렁이로 살아가게 되었다.” 비구니는 자기 호기심 때문에 사람이 되지 못한 구렁이 곁에서 수발을 들며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절 동쪽 산 정상에 바위굴이 있다. 이런 연유가 있어 절 이름이 비암사이다.
=> 구렁이를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비구니가 구렁이 겉에서 수발을 들며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징그럽다고 여기고 무서워하는 구렁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니 놀랍다.
5) 뱀골
옛날에 아버지와 외딸이 살고 있었는데 밤마다 정체 모를 남자가 나타나 딸과 동침하고 사라지고는 하더니 급기야는 딸이 임신을 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딸에게 시켜 실이 달린 바늘을 남자의 옷에 꿰어놓도록 했다. 다음 날 그 실을 따라가 보니 소리산 꼭대기에 뱀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그래서 그 골짜기를 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흔한 이야기가 지명과 결부되어 정착되었다.
6) 비룡산 산삼
서면 고복리에 비룡산이란 산이 있는데, 산삼 많은 산이라고 전해 온다. 고려시대에 궁중에서 산삼이 급히 필요하여 전국의 심마니들에게 산삼을 캐오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다른 심마니들은 명산을 찾아가는데, 고씨 성을 가진 심마니는 산삼을 찾아 연기 땅으로 왔다. 연기에 들어서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주막으로 비를 피하고, 막걸리와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상을 들고 주모한테 근처에 산삼이 나올 만한 산이 있느냐고 물었다. 주모는 산삼 캤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비가 온 뒤에 바라보면 마치 산삼처럼 보이는 산이 있다고 하여 서쪽을 가리켰다.
이튿날 그 산에 가보니 물고기가 시냇물 물살을 타고 내려가지 않고 올라갔다. 고씨 심마니는 무릎을 탁 치면서 “그렇다, 산삼 냄새가 독해서 물고기가 물살을 따라 아래로 내려 오는구나”하고는 걸음을 재촉하여 안개가 자욱한 산을 올라가니 과연 산삼이 있었다. 수백 년 묵은 산삼을 망태기에 가득 차게 캤다.
산삼을 가져가니 임금님은 기뻐하면서 많은 상을 내렸다. 산삼을 더 캐오라고 해서 또 다시 연기 비룡산으로 향했다. 산삼은 없고, 큰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속을 들여다보자 갑자기 커다란 구렁이가 나와서 고씨 심마니의 몸을 칭칭 감고 잡아먹으려고 했다. 그 구렁이는 용이 되려는 이무기였다. 이무기는 고씨 심마니에게 “내가 용이 되려고 수 백 년 키워온 산삼을 네가 모두 캐가는 바람에 다시 몇 백 년을 기다려야 하게 되었으니 너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했다.
고씨 심마니는 정신을 차리고 이무기에게 말했다. “이무기님 산삼을 캔 것은 잘못이지만, 나를 잡아먹으면 피를 보아야 하는데 이무기가 사람의 피를 보면 용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무기는 이 말을 듣고 고씨 심마니를 풀어주고 바위 구멍으로 들어갔다. 고씨 심마니는 산삼 몇 뿌리만 구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리자고 결심하고 바위구멍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무기는 “산위 바위에 올라가서 백일동안 기도를 올리면 너에게 산삼을 캐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기도를 하고 있으니 어느 날 천둥 번개가 요란스럽게 치고 갑자기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와 바위굴을 비추었다. 그러자 이무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용은 하늘로 오르면서 심마니에게 백일동안 정성을 다 하라고 했다. 용이 하늘로 올라간 후 몇 번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맑고 환하게 변했다.
기도를 마치고 산삼을 캤던 곳을 바라보니 풀밭이었던 곳에 황토흙이 깔려 있었고 거기엔 산삼 새싹이 가득히 나 있었다. 산삼은 옆에 사람이 살면 자라지 않기 때문에, 산 아래에 움막을 짓고 매일 산삼이 있는 곳에 가서 정성을 다하여 물도 주면서 보살폈다. 제법 약 효과가 나는 산삼이 되려면 적어도 몇 십 년을 기다려야 했다. 나이 많은 고 씨 심마니는 산삼을 수확하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곳이 어딘지 누구한테 알리지도 않아 아는 사람이 없다.
1990년에 고복리에 사는 젊은이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산삼 열다섯 뿌리를 발견하고 조심스레 캐왔다. 비룡산의 산삼 전설을 아는 이들은 신비함에 감탄했다. 산삼을 캔 젊은이는 그것을 병든 사람에게 주어 병을 낫게 하고, 돈이 없으면 무료로 제공해 많은 이를 감동시켰다.
=> 산삼은 예사로운 식물이 아니다. 특별한 약효를 지닐 뿐만 아니라, 내력이 신비스럽다.
7) 독락정 석불
남면 나성리에는 독락정( 獨樂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세종 때에 임목(林穆)이 세웠다. 독락정 북쪽에 석불이 있다.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이다. 이 석불의 유래에 관한 전설이 있다. 임목 장군이 돌부처 두 개를 양손에 쥐고 금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신발이 떠내려가자 주우려고, 들고 있는 석불을 양쪽에 꽂아 놓았는데, 강 건너 석불은 보이지 않고 독락정 석불만이 전해온다고 한다.
이 석불에 소원을 빌면 영험하여 소원성취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한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여 재산은 어느 정도 모았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어 고민이었다. 어느 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찾아와서 먹을 것을 요구했다. 두 부부는 정성스레 밥상을 차려 배불리 대접하고 쌀 한 되를 싸서 주기까지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혹시 무슨 걱정거리가 있느냐고 물었다. 노부부는 자식이 없어서 걱정이라 하였다. 노인은 독락정 뒤에 있는 석불에게 백일동안 기도를 드리면 소원을 이룰 것이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노부부는 정성을 다해 음식을 석불 앞에 차려놓고 기도를 했다. 백일이 되던 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깨끗이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마련하고 기도를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노부부는 정신이 몽롱해지더니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꿈속에서 부처님이 나타나 “그대들의 정성이 지극해서 아들을 점지하니 잘 길러서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고 하고는, 인자한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날 찾아오너라.”고 하는 말을 남겼다. 노부부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 꿈을 꾸고 태기가 있어 열 달만에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무럭무럭 자라 장성했을 때는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되었다. 몇 번이나 큰 전쟁을 치렀으나 부상도 입지 않고 또 전투에서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 이 모든 것이 석불의 은덕으로 알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갔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생겼다. 정정하던 노부부가 갑자기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은 단숨에 집으로 달려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병명이 없으니 어떤 약을 구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용하다는 의사를 불러 진단을 해 보았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노부부가 백일기도 끝나는 날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당시 부처님께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아들은 정성을 다해 음식을 차려 놓고 기도를 하였다. 역시 부처님이 나타나서 내일 아침 일찍 건너편 송원리의 높은 산에 오르면 둥그런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밑에 큰 더덕 두 뿌리가 있을 것이니 그 더덕을 캐서 정성을 다해 달여서 부모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라 했다.
아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 부처님이 가르쳐준 장소에 가보니 실제로 커다란 더덕이 두 뿌리 있었다. 그것을 캐서 정성을 다해 달여서 부모께 드리니 언제 그랬냐는 듯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이러한 이야기가 소문으로 이웃 마을까지 전해졌다. 이웃 마을에는 욕심 많고 부모에게 불효막심하다는 이야기로 소문이 나있는 이가 있었다. 그는 노부부의 아들을 찾아와서 자세 한 이야기를 듣고 그도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마련하여 석불 앞에 차려놓고 기도를 올렸다. “부처님 돈이 없어 부모님이 병석에 누웠는데 약을 사지 못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돈을 좀 주십시오.” 이렇게 말했다.
눈물까지 펑펑 흘리면서 기도를 하니, 꿈속에서 부처님이 나타나서 말했다. “너의 소원이 정녕 돈이라면 내가 돈을 주겠노라. 그러나 그 돈은 좋은 데에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니 되느니라.” 고맙다고 큰 절을 올리며 꼭 좋은 데에 쓰겠노라고 다짐을 하였다. 꿈을 깨어보니 석불 앞에는 돈이 한 꾸러미 놓여 있었다. 돈을 얻은 불효자는 부처님 앞에서 맹세한 것을 금방이라도 잊은 듯이 그길로 우선 그동안 못 마신 술을 실컷 마시려고 술집으로 갔다. 기생도 부르고 돈을 펑펑 썼다.
어느 날 돈을 꺼내 과시하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뭉클 하는 것이 잡혔다. 꺼내 보니 뱀이었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역시 뱀이 들어 있었다. 급히 돈을 넣어두었던 함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돈 대신 뱀이 우글거렸다. 불효자는 미친 듯이 뛰어나가 금강으로 뛰어들었다. 석불의 영험이 흑과 백을 가려 상과 벌을 주기 때문에 이후 사람들은 함부로 소원을 빌지 않게 되었다.
=> 석불의 모습을 한 부처님이 소원을 빌면 다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선악을 가려 권선징악을 하니 헛된 기대를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런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8) 며느리 바위
남면 양화리에서 부안 임씨들이 오래전부터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산중턱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다. 며느리 바위라고 한다. 유래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주 먼 옛날 그 곳에 아주 인색한 부자가 있었다. 그런데 며느리는 마음씨가 착했다. 어느 날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하기를 권했다. 낮잠을 자던 주인은 잠에서 깨어나 하인의 쇠스랑을 빼앗아 두엄을 떠서 스님의 바지 가랭이에 넣어주었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며느리는 기겁을 하며 숨었다가 스님이 마을을 벗어나려 할 때 쌀 한 되박을 들고 쫓아가서 시아버지의 행동을 사과했다. 스님은 며느리의 기특한 행동에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이런 말을 했다.
“내일 모래 뒷산 전월산에 올라가 정상까지 가 보시오. 가는 도중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아니 됩니다. 어떠한 소리가 나더라도 앞만 보며 산 정상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이 말을 남기고 스님은 사라졌다. 며느리는 기이한 일이라면서 스님이 가르쳐 준 날에 전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높고 가팔랐다.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산을 오르려는데 갑자기 하늘이 검게 변하더니 천둥번개가 치는 것이었다.
며느리가 오르는 산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소리로 보아 산 아래 마을에는 많은 비가 내 리는 듯 했다. 며느리는 불안하였다. 산 아래 마을에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리고 있으며 집은 무사한가 당장 뒤돌아 확인하고 싶었지만 스님이 한 말이 생각나서 한 발 한발 산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며느리가 산 중턱에 올랐을 때 이번에는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며느리는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마을이 온통 물속에 잠기어 마치 넓은 바다의 작은 섬에 와있는 것처럼 많은 비가 내려서 마을과 집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 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뒤돌아 본 며느리의 모습이 바위로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스님의 말을 거역하여 바위로 변해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 훗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며느리 바위라고 부른다. 이루지 못한 일이 있으면 며느리 바위 밑에 와서 촛불을 켜놓고 정성을 다하여 치성을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 전국 여러 곳에 전하고 있는 장자못 이야기이다. 며느리 바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특징이다.
*<비암사> 전경
*<비암사> 극락보전
*<비암사> 석탑
*<비암사> 극락보전 불상
*<비암사> 대웅전
*<세종시립민속박물관> 전시물 : 빗, 밥바구니 등
*<세종호수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