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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19회 홋카이도(北海道) ②
한계에 도전하여
힘차게 나아가는 가운데 승리는 있다.
눈의 문화제
제15권 ‘소생’에서는 ‘1971년도 홋카이도 눈의 문화제’에 빛을 비추었다. 신이치는 1971년 2월 25일, 삿포로시 나카지마공원에 도착했다. 이 행사장에서는 눈으로 만든 조각상 등을 전시했다.
신이치는 ‘개척’이라는 제목을 붙인 거대한 눈 작품 앞에서 동행한 청년부 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척은 사투다. 그렇지 않고서는 역사를 개척할 순 없지. 홋카이도 광선유포의 행보도 잇따른 개척이며 사투에 사투를 거듭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만큼 성장했다. 만일 청년이 개척 정신을 잊어버리면 이미 미래의 발전은 없다.”
“개척 혼은 도전이다. 이제까지 한 것과 똑같은 노력, 똑같은 발상으로 하면 된다는 자세로는 새로운 승리를 바랄 수 없다.
날마다 용기를 분기해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한 걸음 더, 다시 한 걸음 더, 그렇게 나아가는 가운데 비로소 승리는 있다.”
신이치는 행사장에 있는 작품을 하나하나 찬찬히 돌아보았다. 멤버들과 스태프의 모습을 보자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말을 건넸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두 열심히 했다. 감투의 역사를 만들었다. 참으로 수고 많았다!
자신의 한계에 도전한 만큼 생명은 단련된다. 또 광선유포로 이어지는 활동은 모두 자기에게 큰 복운이 된다.”
광선유포는 홋카이도에서
제15권 ‘개화’에서는 1971년 6월, 신이치가 오누마연수원(지금의 하코다테연수원) 개원식에 참석한다. 개화에는 신이치가 사진촬영으로 벗을 격려하게 된 ‘원점’과 진심이 밝혀져 있다.
‘광선유포는 홋카이도에서’라는 지침을 보낸 역사적인 ‘야외 회의’의 모습은 제17권 푸른 들판에 상세히 나와 있다.
1973년 6월 25일, 신이치는 하코다테문화회관 개관식에 참석해 지도했다. 이튿날, 오누마연수원에서 개최한 ‘오누마호숫가 친목의 밤’에 참석해 공로자의 이름을 새겨서 현창하는 ‘홋카이도 광선유포의 비(碑)’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27일, 고마가타케산 기슭에서 홋카이도 대표 간부와 간담회를 열었다.
신이치는 각 부서의 활동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개척 정신이 넘치는 홋카이도는 ‘광포 제2장’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선유포는 홋카이도에서’라는 말을 전진의 표어로 드리고 싶습니다!”
모두 결의와 기쁨을 담아 대답했다.
또 홋카이도에서도 환경파괴가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자연보호에 힘을 쏟자고 말하고 홋카이도를 ‘녹음이 짙은 적광토’로 만들자고 말했다.
제2의 고향
1973년 9월 8일, 신이치는 13년 만에 아쓰타무라를 방문했다.(제18권 사은) 이날 열린 ‘촌민회’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날은 1957년에 도다 선생님이 ‘원수폭금지선언’을 발표한 날이었다.
행사장인 체육관에는 주민 수백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신이치는 자작시 ‘아쓰타무라’를 낭독했다. 이 시는 처음 아쓰타무라를 방문한 1954년 여름, 신이치가 도다 선생님의 소년 시절을 기리며 읊은 작품이었다.
관계자들이 ‘촌민회’에서 낭독해주기를 강력히 요청해, 신이치는 진심 어린 환대에 진심으로 부응하자고 생각했다. 시 낭독이 끝나자 큰 박수가 울려 퍼졌다. 신이치의 시는 아쓰타 사람들에게 긍지와 희망이 솟아나게 했다.
문화행사와 촌장 인사 등에 이어 신이치가 인사에 나섰다.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이 인간공화(人間共和)의 마을 아쓰타를 나는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찬동의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은’에는 신이치의 속마음이 씌어 있다.
“도다 선생님이 살아 계신다면 얼마나 아쓰타마을에 공헌하셨을까. 그 선생님을 여읜 지금, 제자인 내가 스승을 대신해 아쓰타마을을 지키고 번영의 길을 개척하자. 스승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끝까지 사는 것이 바로 사제불이 모습이며 신이치의 맹세였다.”
청년부총회
아쓰타무라를 방문한 이튿날인 9일, 신이치는 제1회 홋카이도 청년부총회에 참석했다. 이 총회는 9.9 ‘홋카이도의 날’의 연원으로 동지들의 마음에 깊게 새겨진 기념일이다.
강연에서 신이치는 학자들 사이에서 한랭지인 홋카이도에서 벼농사는 무리라고 했지만, 도청 직원의 지도로 성공한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고 이론가와 실천가의 차이를 언급했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우리의 광선유포 싸움도, 홋카이도 지역 건설도, 현실과의 힘든 싸움에 의해 비로소 이뤄지는 장거입니다. 누구나 다 불가능하다며 포기해버리는 경우라도, 하는 방법 여하에 따라서는 가능해진다는 확신과,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한 현명함을 몸에 익혀두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홋카이도 멤버 여러분은 결코 얄팍한 허영의 이론가가 되지 말고 불굴의 실천적 지도자가 되시기를 염원합니다.”
그리고 삿포로농업학교에서 클라크 박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많은 인재가 비상한 사실을 언급하고 이렇게 말했다.
“클라크 박사가 교편을 잡은 기간은 불과 8개월입니다. 단기간일지라도 전심전력(全心全力)을 쏟아 부은 일이 얼마나 커다란 성과를 올리는가, 이는 바로 그 본보기입니다. 이리하여 이 홋카이도의 역사가 개척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일념을 응축한 열렬한 투쟁은 미래 영원한 광원(光源)이 됩니다. 나도 늘 심혈을 쏟아 목숨 건 진지한 자세로 광선유포의 길을 개척해왔습니다.”
이토 고이치 씨(홋카이도 주사)는 이케다 선생님이 ‘일념을 응축한 열렬한 투쟁’으로 홋카이도의 청년을 육성한 역사를 긍지로 여기고 있다.
“1970년의 언론문제 이후, 각지에서 청년 세대의 리더가 탄생했습니다. 선생님은 홋카이도에서도 손수 청년부 간부를 육성하셨습니다.”
1971년 ‘눈의 문화제’에서는 청년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결의를 담아 ‘창가학회판 눈축제를 개최하자!’고 도전의 불꽃을 태웠다. 선생님은 작품과 식순하나하나에 아낌없이 칭찬을 보냈다.
1973년 6월, 선생님은 ‘야외 회의’에서 새로운 지침을 보냈다. 그리고 그 뒤, 청년부 간부와 간담할 때, ‘9월에 청년부총회를 열자.’고 한 제안에 모두 찬동하여 총회가 결정됐다.
이날 열린 청년부총회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홋카이도의 다음 100년의 지도 이념은 바로 ‘묘법’이라는 생명의 철리다.” 하고 말했다.
온 힘을 다해 끝까지 달렸을 때
기심의 스승은 웃음 짓는다
학회의 첫 묘원
제23권 ‘미래’에는 1976년에 개원한 삿포로소카유치원의 역사와 교육에 건창립자의 마음 그리고 원아와 훈훈하게 마음을 교류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제26권 ‘아쓰타’는 1977년에 개원한 도다기념묘지공원을 주요 무대로 전개된다.
창가학회의 첫 묘원인 이 묘지공원은 도다 선생님의 고향 아쓰타무라에 건설되었다. 신이치에게는 “이 땅에 선생님의 정신을 남기는 기념성(記念城)을 세워야 한다.”는 강한 마음이 있었다.
또 학회원이 다른 종파에게 묘지 사용을 거부당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학회의 독자적인 묘지를 원하는 멤버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리하여 묘원 건설을 구상한 것이다.
9월 30일, 신이치는묘지공원을 처음 방문하고 부지 안에 있는 도다강당에서 근행했다. 신이치는 마음속으로 은사에게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의 고향에 삼세(三世)에 걸친 사제의 여로를 상징하는 묘지공원이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을 붙인 묘지공원입니다. 선생님의 마음을 괴롭히고 많은 동지를 힘들게 한 묘지문제도, 이제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신이치는 언제나 선생님의 마음을 저 자신의 마음으로 하여, 고뇌하는 동지를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불행과 비참을 없애기 위해, 생애 사제불이(師弟不二)의 대도(大道)를 끝까지 나아가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아쓰타의 천지에서 저희 제자들의 투쟁을 지켜봐 주십시오.’
신이치의 눈에는,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도다의 얼굴이 보였다. 동지를 위해, 광선유포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끝까지 달렸을 때, 기심(己心)의 스승에게는 언제나 얼굴 가득 웃음이 떠오르는 법이다.”
‘각오’를 정하고 출발!
이튿날 10월 1일, 도다강당의 개관기념근행회가 엄숙하게 거행됐다. 신이치는 어서를 배독하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대성인의 말씀대로 광선유포를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괄시받던 서민이 가장 존귀한 성업을 짊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갖가지 난(難)이, 북풍(北風)이, 노도가, 폭풍이 몰아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은 투옥되셨고, 마키구치 선생님은 목숨마저 잃으셨습니다. 내 인생도 계속되는 박해의 연속이었습니다.
어서에 비추어 보면, 당연히 앞으로도 우리 학회에는 북풍이 격렬하게 돌풍을 일으키며 불어올 터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지면 안 됩니다. 절대로 굴하면 안 됩니다.
홋카이도 동지 여러분은 각오를 정하고, 학회의 새로운 원점의 이 땅에서 늠름하게 출발해야 합니다. 홋카이도의 광포와 자신의 일생성불(一生成佛)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이곳으로 돌아와, 삼세(三世) 영원히 용맹 과감한 광포의 여행을 계속하지 않겠습니까!”
기념근행회가 끝난 뒤, 신이치는 공로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이어서 축하모임에 참석했다. 묘지공원의 초대 소장인 이토 준지를 격려하고 청년들과 대화했다.
신이치는 후계의 제자에게 기대를 담아 이렇게 말했다.
“청년이 언제나 광선유포라는 대원(大願)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대지 위에 서서, 지역과 사회에 불법이 가르치는 생명존엄의 법리와 인간주의의 철리를 넓혀야 합니다.
청년들의 그 불굴의 연대를,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을 세상에 배출한 홋카이도의 이 천지에서 반드시 구축해주었으면 합니다.”
신이치는 축하 모임에 이어 현장회(縣長會)에 참석한 뒤, 지역의 학회원이 경영하는 식료잡화점을 방문했다. 이 방문도 17년 전 회장에 취임한 해에 만났을 때 “언제 한번 댁에 가겠습니다.”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격려행이었다.
역경은 경애혁명의 어머니
이튿날 2일 오전 11시, 묘지공원 안에 있는 도다기념광장에서 묘원의 개원식을 거행했다.
신이치는 “법화경을 믿는 사람은 겨울과 같다.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되느니라. 아직도 옛날부터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노라. 겨울이 가을로 되돌아간 것을”(어서 1253쪽)이라는 어서를 배독하고 의연한 목소리로 스피치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대로 아쓰타무라의 정취에 통합니다.
아쓰타는 ‘북해 얼어붙은’이라고 시(詩)에서도 노래했듯이, 확실히 북풍이 부는 고장이고 혹독한 추위의 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법화경은 ‘겨울과 같은 신심’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은사의 고향 아쓰타의 천지를 사랑합니다.
인간의 ‘진실한 가치’는 그 사람의 생명적 경애에 있습니다. 온난하고 바람도 불지 않는 환경에서 아무런 불편 없이 살면서, 오로지 안일만을 탐하기만 한다면 인간적인 성장은 없습니다. 그러면 경애혁명은커녕 오히려 타락하고 맙니다. 그에 비해 ‘역경은 경애혁명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혹독하게 추운 환경에 있더라도, 절대로 좌절하지 말고 희망의 불꽃을 불태우며 자신의 생명을 생생하게 발동시킨다.’ - 그 속에 그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서부 연안의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 엄한(嚴寒)의 이 아쓰타를 인생의 원점이 되는 땅으로 삼아, 언제나 신심의 자세를 확인하자고 결의하고 있습니다.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의 불법입니다. 고뇌의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눈부신 대환희의 빛이 내리쬐는 법입니다. 혹독한 추위의 이 땅에 찾아오는 봄에는,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커다란 희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법화경은 겨울과 같은 신심이다.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된다.’고 강하게 확신하고, 끈기 있게 계속해서 고난에 도전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속에 인생을 가장 풍요롭고 충실하게 만드는 근본궤도가 있습니다.
우리 함께 도다 선생님의 고향인 아쓰타를 ‘인생의 원점이 되는 땅’ ‘마음의 고향으로 정하고, 생사불이의 영원한 도읍으로 하고자 합니다만, 여러분 어떻습니까!”
신이치의 외침에 모여 있던 동지들은 찬동의 박수로 화답했다.
끝으로 신이치는 자신의 각오를 피력했다.
“여러분! 어쨌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거나 겁내면 안 됩니다. 그 어떤 거센 열풍(烈風)이 휘몰아치더라도, 내가 지붕이 되고 방파제가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안심하고 창가(創價)의 마음의 고향인 아쓰타에서 즐겁고 평온한 인생의 봄바람을 만끽하면서, 개가(凱歌)의 인생을 꿋꿋이 살아가기 바랍니다.”
당시 망은과 반역의 무리가 악승과 결탁해 학회원을 예속시키려는 모략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참석자는 ‘내가 방파제가 되겠다.’는 신이치의 말을 깊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 뒤, 신이치는 은사공원의 개원식 등에 참석했다. 오후부터는 도다강당의 식당에서 개최한 '홋카이도 미래회‘ 제4기 결성식에서 온 힘을 다해 후계의 제자를 격려했다.
그리고 현지 동지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쓰타강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멤버들을 격려하고 동지가 근처에서 경영하는 찻집에 가서 간담의 한때를 보냈다.
자신의 인간혁명을 활동의 근본으로 하자
목표를 명확하게
“신이치는 아쓰타에서 열린 한번 한번의 모임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거센 바람에도, 거센 파도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홋카이도 동지에게 황금의 지침을 남기고 싶었다.”(26권 ‘아쓰타’) 하고 씌어 있는 대로 온 힘을 다한 신이치의 격투는 멈출 줄 몰랐다.
3일에는 도다강당에서 홋카이도의 광포 공로자를 기리는 추선법요를 열어 선구의 영웅들에게 제목을 보냈다.
이튿날 4일에는 청년부 대표와 묘원 사무국의 멤버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5일에는 삿포로로 이동해 홋카이도문화회관에서 각부 대표와 간담을 했다. 여러 행사를 마치고 6일 오후에는 시내에 있는 개인회관을 방문한 뒤, 다시 묘지공원으로 돌아갔다.
신이치는 7일에 아쓰타의 도다강당에서 개최한 기념근행회에 참석해 광선유포를 총마무리하기 위한 세가지 지침을 제시했다.
첫째, 어디까지나 자신의 인간혁명을 활동의 근본으로 할 것.
둘째, 지역을 소중히 하고, 이웃과 깊은 신뢰관계를 맺는 지속적인 우호활동을 할 것.
그리고 셋째로 한집안의 신심계승을 강조했다.
신이치는 8일에도 기념근행회에 참석했다. 마지막 날인 9일에는 도다강당에서 열린 홋카이도간부회에 참석했다. 신이치는 그 자리에 모인 멤버들이 리더로서 헌신한 점을 칭찬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신심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성인은 <일생성불초(一生成佛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의 이름을 부르고, 경권(經卷)을 읽고,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우는 일까지도 모두 자신의 일념에 공덕선근으로 갖춰진다고 깨달아서, 신심을 일으키시오.’(어서 383쪽, 통해)
요컨대 근행을 비롯해 광선유포를 위해 우리가 하는 활동 하나하나가 자신과 가정의 공덕과 복운이 되고, 행복을 구축하는 중요한 뿌리가 된다는 사실을 강하게 확신하기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활동할 때에는 언제나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직의 목표뿐 아니라 자기 개인의 목표를 정확히 하고, 그 목표를 성취함과 동시에 자신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고뇌를 전환하겠노라고 끝까지 기원하며 투쟁해야 합니다.
‘광포의 승리’는 ‘생활의 승리’가 됩니다. ‘활동의 환희’는 ‘인생의 환희’가 됩니다. ‘학회활동이 좋다!’ ‘절복이 좋다!’는 사람의 경애는 부처입니다.”
신이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지도를 마치고 오후 1시 40분에 도다강당을 나섰다. 그리고 5분 뒤에는 ‘세계광포를 서원(誓願)한 사제의 천지 홋카이도여 승리하여라! 영광에 빛나라!’고 기원하면서 도쿄로 가는 귀로에 올랐다.
자신의 생애는
동지를 위해 모두 사용하겠다
도토지방 지도
제27권 ‘구도’에서는 1978년 6월에 실시한 홋카이도 지도가 펼쳐진다. ‘구도’에는 13일부터 시작되는 도토지방(홋카이도 동부) 방문에 초점을 맞췄다.
오후 4시 45분, 신이치를 태운 비행기는 구시로공항에 착륙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베쓰카이초에 있는 홋카이도연수원까지는 차로 140킬로미터의 길을 달려야 했다.
도중에 신이치가 탄 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이치는 차를 세우게 하고 말을 건네며 격려했다. 신이치는 이 도토에서도 한 사람이라도 많은 멤버를 만나 희망을 보내자는 결심이었다.
“자신의 생애를 광선유포를 위해, 동지를 위해 모두 사용하겠다. - 그것이 신이치의 신념이었다.” (제27권 구도)
그리고 신이치는 연수원에 도착할 때까지 기념품가게를 운영하는 벗의 집에도 들렀다. 베쓰카이초에 있는 개인회관에서는 그곳에 모인 현지 대표 멤버에게 광대한 지역의 광선유포를 추진하려면 어떤 점이 중요한지 강조했다.
“학회원끼리 서로 사이가 좋아야 하고, 그 어느 곳보다도 단결해야 합니다. 만일 지역 사람들이 학회를 잘 알지 못하면서 비난하고 중상해도, 절대로 원망하면 안 됩니다. 상대를 자비로 감싸 안듯이 끈기 있게 교류를 다지고, 성실하게 행동해 반드시 학회를 이해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거기에 불도수행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격려행 끝에 신이치가 연수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8시 반이 지나서였다. 밤은 완전히 깊었다. 그러나 신이치는 이튿날의 준비로 남아 있는 스태프 곁으로 발걸음을 옮겨 진심을 담아 거듭 격려했다.
학회의 보배
이튿날 14일, 신이치는 연수원 안을 산책하고, 네무로지역의 지역남자부장 스가야마 가쓰지를 따뜻하게 격려했다.
‘구도’에서는 스가야마 등의 체험을 통해 도토지방의 학회활동은 ‘대자연과 맞서는 투쟁’이기도 하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신이치는 동행한 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가 광선유포를 추진하고 학회를 떠받쳐왔는가. 바로 저 사람들입니다. 스가야마 씨와 같은, 다기지고 한결같으며 순수한 ‘무명무관(無名無冠)의 왕자(王者)’들이고 ‘서민의 여왕’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에 시달려도, 어떤 사람은 병들어 괴로워도 냉엄한 환경 속에서 때로는 분한 눈물을 흘리면서, 때로는 통곡하면서 어본존을 끌어안고 나와 함께 광선유포를 위해 일어섰습니다. 스스로 숙명의 눈보라에 엄연히 도전하면서 벗을 격려하고, 홍교를 거듭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광선유포의 주역입니다. 말법에 출현한 지용보살입니다. 학회의 최고 보배입니다.”
제자의 분투를 알고 칭찬을 보내며 거듭 격려하는 광포의 스승과 그런 스승의 마음에 보답하고자 용기 있는 한걸음을 내디딜 때 제자의 생명에는 ‘서원의 불꽃’이 타오른다. 그 불꽃이 벗과 지역 그리고 사회를 밝게 비추는 빛이 된다.
지금 있는 장소에서 승리하자
14일 저녁, 신이치는 홋카이도연수원 개원 5주년을 기념하는 근행회에 참석했다. 근행회가 끝난 뒤에는 아내 미네코와 함께 시베쓰초로 가서 현지 공로자들과 간담했다.
이튿날 15일, 구시로권과 도토권의 지부장과 지부부인부장이 참석한 홋카이도간부회가 열렸다. 신이치는 “우리들이 거주하는 산곡광야개개상적광(山谷廣野皆皆常寂光)의 보처(寶處)이니라.”(어서 734쪽)라는 어의구전>의 구절을 배독했다.
“어느 곳이든 우리가 어본존을 수지하고 광선유포를 위해 활약하는 곳이 즉(卽) 상적광(常寂光)의 보처(寶處)이고 불국토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어떻든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바로 인간혁명·숙명전환의 장소이고, 불도수행의 도량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행복의 실증을 나타내는 무대입니다.
아무쪼록 지금 있는 장소에서 승리해 주십시오. 신뢰의 거목으로 성장해 주십시오. 그래야 대불법(大佛法)의 정의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부회에 이어 연수원 광장에서 열린 ‘요원(原) 우호의 모임’에서도 신이치는 벗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황금 같은 추억을 쌓았다.
저녁에는 시베쓰초의 학회원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이동해 지역의 멤버와 대화했다. 그때 신이치는 아직 만나지 못한 동지들에게 만날 기회를 마련해 달라는 요청에 이튿날 16일에 근행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16일, 홋카이도연수원에는 베쓰카이와 나카시베쓰, 시베쓰 그리고 라우스의 벗이 기뻐하며 모였다. 많은 멤버가 신이치와 만난 적이 없었다.
근행회에서 신이치는 각 부서의 벗에게 지침이 되는 지도를 했다.
고령자에게는 “장수와 후회 없는 충실한 인생을”, 젊은 부인부에게는 “미래의 보배인 자녀를 인내 강하게, 훌륭하게 키우기 바란다.”, 청년부에게는 “날마다 조금이라도 어서를 읽는 습관을 들이고, 강한 신심과 구도심으로 지역의 훌륭한 리더로”, 장년부에는 “지역사회의 기둥이라는 자각을 잊지 말고 어본존과 함께 꿋꿋이 살아 신앙과 생활력, 강한 생명력으로 가족을 지키기 바란다.”고 말했다.
당시 도토권의 권장인 미야구치 마사오 씨(홋카이도 참사)는 청년 시절에 이케다 선생님과 구축한 원점이 있다.
1958년 ‘3·16’의 식전 때, 수송반(지금의 창가반)으로 참석했다. 출동을 마치고 보고하러 가자 이케다 선생님이 손짓으로 불러 함께 근행을 했다. 위층에서는 도다 선생님이 쉬고 계셨다.
이케다 선생님은 근행을 마치고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오랜 세월, 감옥에 있으면서 신념을 굽히지 않은 혁명가의 모습을 언급하고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인생은 철저히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창가의 철학을 기필코 관철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라 도토 광포를 끝까지 관철한 것이다.
2만명을 격려
근행회가 끝나자 신이치는 삿포로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타고 구시로공항으로 갔다. 돌아가는 길에도 잡화점과 드라이브인을 운영하는 공로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신이치는 갑작스럽게 그곳에 들렀다.
또 니시산베쓰에 있는 개인회관에도 가서 동지를 계속 격려했다. 그리고 구시로회관도 방문해 비행기가 출발하기 직전까지 벗과 대화했다.
삿포로에 돌아와서도 신이치는 정력적으로 여러 행사에 참석하고 가정방문도 거듭했다. 20일에는 하코다테로 이동해 온 힘을 담아 벗을 격려하며 끝까지 달렸다. 신이치는 16일간에 달하는 홋카이도 지도에서 총 2만명이 넘는 회원과 만났다.
‘구도’는 스승의 각오라 할 수 있는 문장으로 이렇게 끝맺었다.
“이 무렵 종문은 젊은 승려들이 앞장서서 승복의 권위를 내세우며 각 사찰에서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회비판을 일삼았다. 대성인의 유명(遺命)인 광선유포의 대원(大願)에 힘쓰며 살아가는 불자(佛子)를 ‘대성인의 말제(末弟)’라는 승려가 괴롭혔다.
신이치는 세상이 이처럼 악역무도(惡逆無道)한 탁세라고 한다면, 전 동지의 흉중에 그 무엇에도 지지 않는 진정한 신앙의 불꽃을 불태우게 하자고 다짐하고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투쟁했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칠수록 창가정의(創價正義)의 투혼이 새빨갛게, 강하게, 맹렬하게 불타오른다. - 그 사람이 광포서원(廣布誓願)의 용자이다.”
사제공전이란 제자가 스승에게
승리를 보고하는 것이다
삼대성의 노래
제28권 ‘대도’에는 홋카이도의 노래 ‘아 공전(共戰)의 노래(지금의 삼대성(三代城)의 노래)’가 탄생한 경위가 씌어 있다.
1978년 8월 24일, <세이쿄신문>에 가사와 악보가 실렸다. 당시 제1차 종문사건이 발생해 홋카이도에서도 악승이 준동했다. 그런 속에서 분투하는 학회원을 위해 스승은 노래를 선물했다.
신이치는 가사에 담긴 마음을 이렇게 말했다.
“‘스승이 지켜보고 계신다. 스승이 승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생각이 내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사제공전(師弟共戰)이란, 제자가 투쟁하고 승리해서 스승에게 그 승리를 보고하는 것이라고 정했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으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훗날 새로운 곡이 만들어져 노래의 탄생 30주년을 맞은 2008년에는 선생님이 가사를 수정하고 노래 제목도 ‘삼대성의 노래’로 바뀌었다.
또 제28권 ‘승리섬’에서는 테우리섬에서 광포를 위해 끝까지 살아간 벗의 분투도 소개했다.
사제의 혼을 계승하라!
마지막 장인 ‘서원’(제30권<하>)의 마지막 장면은 2001년 11월 12일에 개최한 본부간부회다. 이 회합은 신세기 제1회 홋카이도영광총회의 의의도 담겨 있었다.
“아무쪼록 청년부 여러분은 준엄한 ‘창가(創價) 삼대(三代)에 걸친 사제의 혼’을 단호히 계승하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최종적인 승리자’입니다. 또 그것만이 창가학회가 21세기를 끝까지 승리하는 ‘근본의 길’이고, 광선유포의 대서원(大誓願)을 이루는 길입니다. 그리고 세계평화를 창조하는 대도(大道)입니다.”
삼대성의 긍지도 드높은 홋카이도의 동지는 스승의 이 말을 생명에 깊이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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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노고많으셨어요
책에도읽지만
이렇게
오려주시니또연찬하게되어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노고많으셨어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