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은 과연 목화씨를 도입하였는가?

우리는 흔히 목화씨 도입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즉,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돌아가는 길에 목화씨 3개를 관리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몰래 따서 그것을 붓뚜껑 속에 넣어서 고려로 돌아오다가 그것도 국경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원나라 관리들의 엄중한 검사를 무사히 피했다는 것이다. 또 그것을 가지고 고국에 와서 재배를 했는데 그 중 2개는 죽고 1개가 용하게 살아남아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성공해 그로 인해 국내에 널리 퍼져 의류 혁명을 일으켰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실을 유심히 보면 다소의 과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익점에 관해서는 현재도 신화처럼 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그의 목화씨 도입으로 인한 의류혁명의 공헌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정확한 사실상의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그에 관한 고려사 문익점 열전의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인데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올라 가 정언(正言)이 되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덕흥군에게 붙어 있었던 바 덕흥군이 패배하니 본국으로 돌아 오면서 목화씨를 얻어 가지고 와서 자기의 외삼촌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그것을 심었다. 처음에는 재배하는 방법을 몰라서 거의 다 말라 버리고 한 그루만 남았었는데 세 해만에 마침내 크게 불었다. 목화씨를 뽑는 물레와 실을 켜는 물레들은 다 정천익이 처음 만들었다."
또 다른 공헌자 정천익
또 다른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편에 나와있는 문익점 졸기의 내용을 보자.
" 전 좌사의 대부 문익점의 졸기. 전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졸(卒)하였다. 익점(益漸)은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科擧)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 박사(諄諭博士)로써 좌정언(左正言)에 승진되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 고을 사람 전객 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되었다. 천익(天益)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鄕里)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의 중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木)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였다. “오늘날 다시 본토(本土)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몇 일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 을묘년에 익점을 불러 전의 주부(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가 졸(卒)하니, 나이 70세였다.
이 두 사료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목화씨 도입 당시의 드라마틱하면서도 극적인 목화씨 도입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기록상으로는 고려사에서는 목화씨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길가의 목면(木)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목화가 주위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당시 목화씨는 국경에서 삼엄한 감시를 하며 반출을 금했던 물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익점의 정치 생활도 우여곡절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기록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덕흥군에게 붙어 있었던 바 덕흥군이 패배하니 본국으로 돌아 왔다"는 내용에 대해 사실 관계를 살펴보자.
당시 문익점이 원나라로 갔을 때는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인해 여몽 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상태였다. 이와 더불어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자 원 정부는 공민왕을 폐하고 원에 와 있던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책봉해 고려에 보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문익점 일행이 원나라로 출발한 시기와 덕흥군이 고려로 향한 시기가 같았다. 당시 원나라에 있던 고려 관리들은 공민왕과 덕흥군 중 한 명을 임금으로 선택해야 했다. 과거에도 원나라가 고려의 왕을 폐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세운 선례가 많이 있었다. 충선왕과 충숙왕, 충혜왕 등이 모두 원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다시 즉위했던 임금들이다. 이런 전례 때문에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선택한 덕흥군이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덕흥군에게 붙어 벼슬을 받았다.
그 후속 조치로 원나라는 군사 1만을 보내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를 치게 했는데 이 군사는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덕흥군이 패함에 따라 그에게 벼슬을 받은 문익점은 객관적으로 역신(逆臣)이 되었다. 그런데 문익점 일행은 무슨 언질을 받았는지 우두머리인 이공수(李公遂)와 함께 공민왕 13년 10월 고려로 귀국했다. 다행히 파면에 그치면서 목숨을 건진 문익점은 고향인 진주 강성현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목화 재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천익이 장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사에는 외삼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정천익과 함께 목화를 시험재배 하는데 처음에는 재배법을 몰라 한 그루만 겨우 살게 되었다. 목화 재배에는 성공했으나 목화씨에서 실을 뽑는 법을 몰라 실생활에 접목되지 못한 상황에서 원나라 승려(湖僧) 홍원(弘願)의 도움으로 목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를 만드는 방법을 전수 받아 전국적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 따라서 백성들의 의복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목화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도 충분히 도입이 가능하였던 물품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덕흥군에게 가담했던 문익점이 덕흥군에게 저항했던 것으로 바뀌게 된다. 덕흥군에게 저항하다가 미움을 사 강남에서 3년 동안 귀양을 사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 내용은 훗날 문익점의 후손들에 의해 이룬 것으로 보인다.

후세에 왜곡된 문익점의 정치행보.
순조 19년(1819) 후손 문계항(文桂恒) 등이 편찬한 (삼우당실기 (三憂堂實記)와 (정조실록)에 실린 전라도 유생 김상추(金相樞)의 상소문에서 문익점의 내용이 나타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문익점은 사명을 받들고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공민왕이 어둡고 포악스럽다고 원나라에서 장차 폐위시키고 새로 다른 임금을 세우려고 하자, 조칙(謂勃)을 받들 수 없다고 다투다가 드디어 검남(劒南)으로 유배 (流配)되었습니다. 3년 만에 비로소 돌아오게 되자 중국에서 목면(木綿)을 몰래 가져와 사람들에게 직조(織造)를 가르쳤으니, 백성들에게 이롭게 한 사실이 이와 같았습니다."라면서 고려사 내용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바뀌게 된다.
공민왕을 배반하고 덕흥군에 붙었던 내용이 공민왕에 충성을 바치다가 강남에 유배당하는 것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그와 함께 목화도 몰래 들여오는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사전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적 태도를 보이다가 대신들의 상소를 받아 파면 당하는 내용도 없어지고 만다. 이처럼 문익점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오면서 조금씩 달라지게된다.
문익점의 목화도입과 재배성공은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의류혁명을 가져왔고, 그 자체로 높게 평가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관료들이 중국을 왕래하며 목화를 보았지만, 그것을 재배할 것을 생각해낸 것은 문익점의 신선한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위대한 발명이 그렇듯 아주 사소한 생각의 전환에서부터 발생한다.
구태어 그의 정치적 태도를 왜곡시키지 않더라도 충분히 위인으로 공경받을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친원파의 입장에서 덕흥군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극형을 면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이미 그 당시에 그의 목화씨 재배에 대한 공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훔쳐서 가져온 것 보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도입한 것이 더 낳은 것이 아니겠는가?
목화씨를 도입한 문익점과 재배에 성공한 정천익, 실 뽑는 기술을 전수해 준 홍익 등의 각고의 노력으로, 목화씨는 조선 땅에서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인해 중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수입해 들어오던 물품의 대체효과를 가져 온 것은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진정 목화 재배가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목화씨 재배로 인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겨울철의 혹한을 이겨 낼 수 있게 되었고, 그로인해 동사자도 엄청나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문익점과 정천익은 생명을 구하는 의류혁명을 이루어낸 인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