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두제자(9)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막 15:40-41
아르헨티나 천재 축구선수 마라도나는, 작은 체격조건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성취하였습니다. 돈과 명예와 성공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성숙한 사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 브라질의 축구선수 펠레는 축구도 잘했지만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마라톤을 잘하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올림필에서 금메달을 딴 황모씨하고, 은메달을 딴 이봉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봉주를 더 알아줍니다. 왜냐하면 황씨보다 인성이 훨씬 좋기 때문입니다. 더 성숙한 인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숙이 목표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성취를 목표로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숙은 희생과 섬김과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건축물에 있어 철근과 콘크리트가 있고, 그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벽지를 붙입니다. 미숙한 사람은 철근을 자랑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철근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숨겨져 있는 충성된 종이 있는 교회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철골 같은 사람이 있는 교회, 이것이 갈보리교회의 성숙도입니다. 링컨의 일대기 중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링컨이 남북 전쟁 승리후 워싱턴 시내를 걸어가자, 흑인들 몇 명이 엎드려 절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링컨은 그들에게 “어서 일어나시오. 그리고 내게 절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한 리치몬드를 함락한 이후, 워싱턴 시내로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를 때, 링컨은 악사들에게 “딕시”라는 남부연합의 국가를 연주하게 했습니다. 이같이 링컨은 성숙한 지도자였습니다. 성숙된 지도자는 이겼으면서도, 패배한 사람을 품어주는 사람입니다. 반면 미숙한 사람은 승리했다면서, 상대방을 경멸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자입니까? 먼저 성숙해야 합니다. 그래서 섬김과 희생과 겸손이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러한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며, 그러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미국의 워싱턴에는 알링턴 국립묘지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기 오직 하나님께만 알려진 명예로운 미국의 전사들이 잠들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야고보인데, 잘 알려진 야고보가 아닌 무명의 야고보입니다. 지금까지 여덟 명의 제자를 살펴보았습니다. 열두제자는 세 그룹의 나뉩니다. 세 그룹을 편의상 A팀 B팀 C팀으로 표현해왔습니다. A팀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입니다. B팀은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입니다. C팀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가룟 유다입니다. 각 팀의 팀장은 맨 앞에 나오는 제자입니다. A팀의 팀장은 베드로이고, B팀의 팀장은 빌립이고, C팀의 팀장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막 3: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팀을 나누는 기준이 예수님과의 친밀도라고 봅니다. 그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팀장으로 세울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정보는 성경에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도 말했을 것입니다. 그도 질문했을 것입니다. 그도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 한 마디도 성경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다대오나 가나나인 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팀장이 조용해서였는지, 팀원들도 그런 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성경에서의 야고보는 가장 흔한 이름 중 하나였습니다. 야고보가 히브리어 야곱의 헬라어 음역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이 열두지파의 실질적 뿌리 아닙니까? 야고보란 이름을 가진 몇 사람만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제자 중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있습니다. 그는 요한의 형이기도 합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핵심 제자 3인방에 속합니다. 성격도 대단해서, 예수님이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붙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는 성격 때문이었는지, 제자들 중에 첫 번째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행 12:1-2절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대신 동생 요한이, 형 야고보가 살아야 할 몫까지 오래 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제자 야고보 하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가리킵니다.
다음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혈육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 7:3-5절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어쩌면 예수님의 동생이었기에, 더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기가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야고보를 따로 만나주셨습니다. 고전 15:4-7절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동생 야고보를 특별히 만나주신 것입니다. 이로 볼 때,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시점이, 그 때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이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열두제자 못지않은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영향력 면에서는, 그들보다 더 큰 지도자였습니다. 구원론 문제로 예루살렘교회에서 총회가 열렸을 때, 그가 의장을 맡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자존심 센 바울도, 그의 영향력을 인정할 정도입니다. 갈 2:9절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를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의 3대 기둥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를 베드로와 요한보다도, 더 앞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야고보에게는 특별한 별명이 있습니다. 바로 낙타 무릎입니다. 그가 얼마나 기도의 삶을 살았는지를 말해주는 별명입니다. 그는 특히 야고보서를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으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아홉 번째 제자입니다. 마가는 그를 달리 “작은 야고보”라고 부릅니다. 막 15:40절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그를 왜 작은 야고보로 불렀는지, 나름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열둘 중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가 작은 야고보로 불렸을까요? 큰 야고보로 불릴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가 다른 야고보에 비해, 나이가 적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대원 다닐 때 후배 중의 같은 학번의 같은 이름이 있어, 대창, 광창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출신지역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대창은 대구 창주로 지금 총회 총무이고, 광창은 광주 창주로 지금 한신대 구약교수입니다. 축구국가대표팀에도 같은 이름이 있어, 큰 정우영, 작은 정우영으로 구분하여 부릅니다.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순수하게 나이입니다. 그리고 이건 가장 일반적인 구분법입니다. 혹 키로 구분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이로 구분하기 애매한데, 두 사람의 키가 눈에 띨 정도로 차이가 난다면, 큰 누구, 작은 누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농구나 배구 같이 키가 중요한 종목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영향력으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에 비하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영향력이 작은 편이었습니다. 팀장이니까 영향력이 미미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핵심제자 3인방에 속한 야고보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세베대는 상당한 재력가였고, 대제사장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니, 아버지의 영향력 면에서도 차이가 난다고 봐야 합니다. 나이가 적어서 작은 야고보로 불렸든지, 키가 작아서 작은 야고보로 불렸든지, 영향력이 작아서 작은 야고보로 불렸든지,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작은 야고보로 불린 것이지, 작은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작은 야고보로 불린 것이지, 작은 사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작은 야고보로 불린 것이지, 실제로 작은 야고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부르느냐로, 내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야, 못난이”라고 부른다고, 내가 못난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나는 못난이야’라고 정의할 때, 진짜 못난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고 있으면, 타인에 의해 자신이 결정지어집니다. 사실 그보다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아니, 왜 타인이 나를 결정짓게 한단 말입니까? 그가 무슨 권한으로, 나를 향해 “너는 이런 존재야”라고 규정짓는단 말입니까? 우리는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답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보면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탈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면을 쓰고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가면을 벗으면 어색할 수 있습니다. 오랫 동안 탈을 쓰고 살아왔는데, 탈을 벗으면 처음엔 부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 나입니다. 진짜 나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나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남들이 큰 야고보라고 부르든, 작은 야고보라고 부르든, 상관할 게 없습니다. 그냥 야고보일 뿐입니다. 예수님한테 큰 야고보나 작은 야고보로 부름 받은 게 아닙니다. 그냥 야고보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럼 야고보로 쓰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아니 뭐 또 작은 야고보면 어떤가요? 반드시 큰 야고보가 돼야 합니까? 작게 쓰임 받으면 안 됩니까? 작은 일에라도 쓰임 받으면 복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 ‘작은 야고보’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은 아무개’라는 별명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일하는 ‘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가령, 목사님으로 말하면, 어떤 목사님들은 그 이름이 국내외로 알려져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대접도 잘 받고요. 그렇지만 어떤 목사님들은 조그마한 농어촌 교회나, 개척교회에서 평생을 목회하시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을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분들이 부끄러운 분들인가요. 진짜 작은 분들일까요? 아니지요. 하나님이 크게 여기시는 분들입니다. 작은 야고보가 이런 제자가 아니었을까요. 그럼에도 생각 없는 분들 중에,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분들을 무시하고, 큰 교회를 목회하는 분들만 존경하는 교인들이 있는데, 안 될 일입니다. 오히려 작은 교회 목회를 위해 충성하는, 진정 큰 일꾼들을 존경해야 마땅할 줄 믿습니다. 장로님들 중에서도 이름이 드러난 유명한 장로님들도 있지만,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작은 일에 충성된 장로님들도 많습니다. 이런 분들을 알아주고 존경해야 될 줄 믿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관점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작은 것의 가치를 매우 중요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종들을 칭찬하셨습니까? 적은 일에 충성하는가를 확인하시는 주님입니다. 마 25: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적은 일에 충성한 사람을 칭찬하시는 주님입니다. 주님이 왜 적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셨습니까? 눅 16:10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사람의 심리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은 작은 것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작은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에서 큰 나무를 보셨고,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작은 겨자씨에서 천국을 보셨습니다. 영혼의 민감성을 가진 사람들은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작은 씨, 작은 소자, 작은 목자, 작은 교회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작은 것을 크게 보고 큰 것을 작게 볼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눈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시하는, 작은 것을 크게 볼 수 있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요,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작은 야고보’, 주님이 보실 때는 결코 작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 대한 가치를 인식해야 합니다. 심지어 주님은 이런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눅 16:11절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을 자칫 오해할 수 있는데, 공동번역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충성된 자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평이 좋은데, 교회 밖에서는 평이 안 좋다? 그러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직장에서 일은 성실한데 교회에서 일은 불성실해서도 안 되지만, 그 반대여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유대 역사학자 유세비우스는 그에 대해서 이런 재미나는 표현을 했습니다. “작은 야고보, 그는 제일 미남이었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이 작은 야고보를 제자들 중에서 제일 미남으로 그렸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 그림 중에서 제일 미남을 고르면 그 사람이 틀림없이 ‘작은 야고보’랍니다. 이렇듯이, 그는 미남이었고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 그 주님이 너무 좋아서, 크게 떠들면 주님의 영광이 가릴까봐, 조용조용히 말하고 평생을 주님 앞에서 숨어서 주님을 섬겼던 아름다운 제자가 바로 이 ‘작은 야고보’라는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 이 야고보처럼 ‘작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작은 자라고 여깁니까? 그래도 착하고 충성된 마음을 가지면, 주님이 큰 자라고 칭찬하십니다.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큰일로 여기고, 충성하는 것이 바로 작은 야고보의 모습입니다. ‘작은 자’라는 별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작은 일을 큰일처럼’ 여겨, 충성을 다하는 진정한 ‘큰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작은 야고보의 가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알패오입니다. 막 3:18절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알패오를 아버지로 둔 또 다른 제자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막 2: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바로 레위입니다. 곧 마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레위가 혹 형제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두 사람이 절대로 형제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존 맥아더나 이동원 목사 같은 분들은, 그럴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싣습니다. 흥미로운 추정이지만,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알패오가 동일인이 아니라면, 마태의 아버지와 야고보의 아버지는 동명이인입니다.
알패오와 글로바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는 게, 더 유익할 거 같습니다. 요 19:25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마태복음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마 27:56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자리에,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가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알패오와 글로바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그래서 알패오의 별명이 글로바일 거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알패오와 사별을 한 후, 글로바와 재혼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같은 사람인 게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어머니는 마리아입니다. 막 15:40절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마 27:56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눅 24:10절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아들 야고보만큼이나 어머니 마리아도 흔한 이름입니다. 대표적으로 주의 모친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입니다. 주의 모친 마리아나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굳이 소개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는, 일찍이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쭉 섬겨왔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현장 목격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왔던 여인들 중에 한 사람이었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 중 하나였습니다. 막 16:1-2절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작은 야고보에게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막 15:40절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동생의 이름은 요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으로 나옵니다. 마 27:56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요세는 열두제자 안에 포함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열두제자 안에 포함되었다면,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 이어, 형제 제자로 이름을 올릴 뻔했습니다. 요세가 왜 열두제자로 부름받지 못했습니까? 그의 모친인 마리아와의 친분을 고려해서라도, 부를 만한데 말입니다. 부르심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것에, 기뻐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위한 부르심도 복이고, 사역을 위한 부르심도 복이고, 안식을 위한 부르심도 복입니다. 구원을 위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릅니다. 사역을 위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직분자로 살아갑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또 하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도 복이기에, 우리가 언제라도 순종할 준비를 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아주 말수가 적은 기도하는 제자였다.’ 말수가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잠시라도 입을 닫고 있을 수 없어 합니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궁금하여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상대는 궁금하지 않는데, 기어이 알려주고 싶어 합니다. 옆 사람은 조용히 있고 싶은데, 그런 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른 일행도 함께 탄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말을 쉬지 않습니다. 호칭이라도 안 쓰면 좋겠는데, 그런 거 가리지 않습니다. 그럴 때면 적잖이 당황스럽습니다. 난처하여 눈치를 줘도 못 알아챕니다. 말수가 많으면, 당연히 말실수가 잦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 때문에 곤란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럼 말을 많이 하는 게 잘못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말수가 적은 게 잘못이 아니듯, 말수가 많은 것도 잘못된 게 아닙니다. 말수가 적으면 적은대로 괜찮고, 말수가 많으면 많은대로 괜찮습니다. 다만 말수가 적은 사람한테, 말을 많이 하라고 하면 힘듭니다. 말수가 많은 사람한테, 말을 적게 하라고 하면 역시 힘듭니다. 베드로는 말수가 많아서 실수도 잦았습니다. 반면 작은 야고보는 말수가 적어서 말실수는 안 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성경에 기록 한 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는 말수가 적은 대신, 기도하는 제자였습니다. 말수가 적었기에, 기도하는 제자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을 주고받으며 떠들고 있을 때, 그는 조용히 기도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제자들 사이에서 끼지 못하여, 겉도는 그런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주님이 그에게 팀장을 맡기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말을 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었습니다. 그는 경청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래도 경청의 사람이, 기도를 잘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일종의 경청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거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말씀드렸으면, 하나님도 나한테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그냥 내 할 말만 잔뜩 늘어놓고, “아멘” 하고 일어나버린다면, 그건 기도라기보다 독백에 가깝습니다.
물론 말수가 많은 사람도, 얼마든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붙들고 말을 많이 하듯, 하나님을 붙들고 더 오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말이 많은 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본래 말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말을 많이 하여, 속마음을 다 털어놔버렸습니다. 그러면 굳이 답답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붙들고, 자기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지 않아도 됩니다. 자기 말을 들어주고, 자기 하소연을 다 들어주고, 자기 신세타령을 밤새 들어주는 사람이 주위에 많다면, 굳이 하나님께 나와 기도할 필요를 덜 느낍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자기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자기 속에 겹겹이 쌓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수가 적은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핵심제자 3인방처럼, 활동적인 제자들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제자만 있으면 안 됩니다. 작은 야고보 같은 제자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다 필요해서 부르셨습니다. 단순히 열둘이란 숫자 채우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는, 다양한 성향, 다양한 기질의 제자가 필요합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작은 야고보’는 시리아에 가서 전도하였고, 이 야고보에 의해서 시리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되었답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쳤는데도, 야고보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톱을 가지고 ‘작은 야고보’를 켬으로써 장렬하게 순교하였답니다. 톱이 작은 야고보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전승된 것을 볼 때, 그가 톱에 잘려 순교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유명한 제자가 아닙니다. 그는 두드러진 뭔가를 남긴 제자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가 무시해도 될 제자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엄연히 열두제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원하여, 직접 부르신 제자입니다. 특히 그는 세 번째 그룹의 팀장을 맡았던 제자입니다. 그는 말수가 적은 제자였지만, 대신 기도의 제자였습니다. 무엇보다 그 역시 복음을 전하다가, 다른 제자들처럼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야고보’에 대해서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제일 예수님을 닮았던 제자가 작은 야고보였다.” 예수님도 실제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학교나, 대학병원 같은 현관에, 기부자 명단이 쭉 적혀 있는 것을 보셨지요? 그런데 천국에 가면 그 새 예루살렘 성벽 주춧돌에 12제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계 21:14절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보다 더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그 찬란한 새 예루살렘 기초석에, 12제자 명부에 9번째요,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야고보’의 이름은 작게 새겨져 있을까요? 수제자 베드로라고 해서 더 크게 새겨져 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 야고보의 이름도 똑같은 크기로 새겨져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소망을 거기에 두어야 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이 주실 상을 기대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상을 다 받으면, 그곳에서는 상이 없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여러분의 이름도 새 예루살렘 기초석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기를 바랍니다.
옛날에 큰 성당을 건축하면서, 총책임을 맡고 있던 황제가, 성전완공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했답니다. 건물이 올라가면서 사람들은 “누가 상을 받을까?” 하고 여러 추측을 했답니다. 설계자일까, 아니면 건축업자인가, 조각가, 목수, 돌을 다루는 석공일까? 그런데 시상식장에서 의외로,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시골 노인이 수상자로 발표되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도대체 이 노인이 무슨 큰일을 했는가 알아보니, 이 노인은 석공이 대리석을 실어 나를 때, 땀을 흘리는 황소에게 마실 물과 건초를 먹였다고 합니다. 아주 작은 일이었고,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 들었던 것입니다. ‘작은 야고보’가 바로 이런 상을 받지 않을까요? 우리도 비록 부족하지만 이런 상에 도전하기를 바랍니다. 작으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제일 많이 닮았다면, 그보다 더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주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면 닮게 되겠지요. 주님의 사랑에 매여 살면 닮게 됩니다. 작은 야고보처럼, 말은 적어도 기도하는 제자가 되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말을 많이 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하려고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도 작은 야고보처럼 영혼의 민감성을 가진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작은 씨, 작은 소자, 작은 목자, 작은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작은 것을 크게 보고 큰 것을 작게 볼 수 있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의 눈을 소유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 사람들이 무시하는, 작은 것을 크게 볼 수 있는 거룩한 사람, 깊은 영성을 소유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작은 것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게 하옵소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작은 일에 충성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작은 야고보처럼 요란하지는 않았어도, 있어야할 자리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있었던 그런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그냥 그 자리에 있기만 했던 사람, 조용히 자기의 할 일을 성실하게 했던 그런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는 없어도, 말없이 복음을 위해 충성한 그런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은 이런 ‘작은 야고보’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힘들다고 다 떠나갈 때,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작은 야고보’는 ‘작지만 꼭 필요했던 제자’였습니다. ‘작은 야고보’처럼 묵묵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그런 그런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