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제해종 장로의 봉평 이야기
2023년 9월 15일 가을 단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제해종(諸海琮) 원로장로가 봉평을 방문했다. 그는 내 고향교회 선배 조현상 목사의 장인이다. 내가 봉평교회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아내 제미아(諸美雅) 사모가 놀라면서 아버지가 봉평교회 권사였다고 소개했다. 어느 날 1969년도 주보에서 제해종 권사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성(姓)이 희귀해서 아버지인가를 묻자 맞는다고 했다. 사람 인연이란 게 참 묘하다. 내가 봉평에 온 이후 부쩍 그의 아버지는 봉평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오랫만에 메밀꽃 잔치가 열리는 때를 맞춰서 봉평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제해종 장로는 1938년 경남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1960년 육군 갑종 제154기로 소위에 임관하였고 1964년에 대구에서 군복무하던 중 휴가 나와서 당시 봉평교회 이석희 목사의 주례로 교회 예배당에서 김행자와 화촉을 밝혔다. 그때 장인이 봉평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봉평교회에 출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7년 전역하고 삼 남매 중 둘째를 낳을 때까지 예비군 중대장으로 있다가 1971년에 발령을 받고 태백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는 중대장을 그만 두고 한국석탄공사에 입사하여 광부들의 막장 생활을 돕는 업무를 맡았다. 1973년 태백지방 금천교회에서 장로가 되었고 나중에 지방 내 장성교회를 섬겼다. 1996년 퇴직 후 일산에서 제2의 인생을 살면서 사위가 인천에 개척한 한마음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일산에서 인천까지 교회 출석이 어려워 2000년 일산교회로 파송받고 2008년에 일산서지방에서 은퇴했다.
낯설지만 친근한 봉평교회를 방문한 원로는 감회에 젖는다. 머지않아 산수(傘壽, 88세)를 맞이할 연배인데 정신도 흐리지 않았고 몸도 건강했다. 허리협착증 수술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꾸준한 재활 치료 덕에 먼 길을 올 수 있어서 기뻐했다. 자연히 지난날 봉평에서 살던 이야기가 첫 화두였다. 기도의 용사 박송녀 권사, 교회 종지기 권혁인 권사 이야기는 은혜가 되었다. 권혁인 권사는 방송국 시계처럼 정확하게 종소리를 울렸고 행여 다른 사람이 종을 치는 일이 있을 때는 상당히 언잖아 했었다. 그를 보면서 자기 사명에 대한 고집스러운 충성심을 보면서 깨달은 바가 많았다.
대망의 1970년 초 이석희 담임목사가 제천으로 이임했을 때의 이야기다. 한 동안 후임자가 부임하지 않아서 힘들었었는데 가장 큰 일이 예배였다. 당시 중직이라고는 조경덕, 권혁림, 김병애 그리고 제해종 권사 뿐이었다. 1969년 봉평국민학교 교장이던 김종사 장로는 평창으로, 한경원 장로는 단양으로 발령받고 이미 교회를 떠난 상태였다. 모두들 예배 인도는 예비군 중대장 직을 맡고 있는 제해종 권사가 해야 한다고 반 강제로 떠미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제 권사는 여러 달 동안 강단을 맡게 되었다. 가장 힘든 일은 설교여서 그때 말씀 준비하는 목회자들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경험할 수 있었다. 이후로 그는 이렇게 준비한 말씀에 토를 다는 사람은 바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장기간의 담임자 부재로 교회가 힘들어지자 제해종 권사는 당시 제천지방 박재훈 감리사에게 달려가서 빨리 담임자를 파송해주지 않으면 감리교회 간판을 내리고 다른 교단 간판 걸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도 해보았다. 또 전임자였던 김행식 목사에게 찾아가서 현재 영월 상동제일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올수 없겠는냐며 떼도 써 보았다. 전에 담임하던 교회로 다시 부임하는 일이나 더욱이 당시 그 교회가 봉평교회보다 더 컸었으니 안 될 일인데도 다급한 나머지 이런 부탁까지 했던 것이다. 결국 수개월이 지나서야 최충수 목사가 부임하였고 그에게 봉평교회 담임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후 1971년 제해종 권사도 태백으로 전근하게 되어 봉평을 떠났다. 그의 이야기는 모두에게 추억 열차에 올라타게 했고 또한 뒷사람들은 몰랐던 교회의 역사였다.
1968년에 울진 삼척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봉평에서 전개되었을 때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그때 방축동에는 옹기굴이 있었는데 공비 3명이 그곳에 숨어 지냈다. 갑자기 그 굴에서 총성이 울리는 바람에 그들의 본거지가 발각되고 말았다. 군과 경찰은 갑호 비상령을 내렸고 급하게 향토 예비군 소집령을 발동하여 마침내 원길리 뒷산에서 한 명은 자폭하여 죽었고 남은 공비는 사살됨으로써 일망타진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 군과 함께 공비소탕작전을 진두지휘했던 예비군 중대장이 바로 제해종 장로였다. 무장 공비를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어느 노름꾼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다. 그는 밤새 노름하다가 다 잃고 새벽에 집으로 들어왔다. 아내는 땔감도 없는데 남편이란 사람은 도박에 미쳤다면서 빨리 땔감이나 해 오라고 바가지를 긁었다. 아내에게 미안한 그는 하필이면 공비들이 숨어 있던 방축동 옹기굴 위에서 땔감을 긁어모았다. 공비들은 자신들이 발각된 줄 알고 그에게 총을 쏜 것이 그만 자신들의 근거지를 노출시킨 꼴이 된 것이다. 그 당시 봉평에 살았던 조송암(曺松岩) 장로는 그때의 정황과 총에 맞아 죽을 뻔했던 노름꾼을 잘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추임새를 넣듯이 화답하는 둘의 모습은 마치 고향 선후배 같았다.
"장로는 입을 닫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교회가 은혜롭지요. 하나님은 원로가 되니 입을 더 봉하는 것 같아요. 기도의 말까지 자꾸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깨달은 거예요. 원로의 미덕은 침묵에 있어요."
제해종 장로는 원로가 된 후 깨닫는 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무장로 때는 시무에 맞게, 원로장로 때는 원로에 맞게 일해야 한다. 특히 장로는 항상 예배의 앞자리에 앉아서 성도들에게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백발의 원로가 예배의 앞자리에서 졸지 않고 반듯하게 앉아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성도들은 은혜를 받는다고 했다. 피곤하여 졸 수 있지만 그렇다고 조는 것은 장로의 본분이 아니다. 졸지 않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 장로로서 예배의 본이 된다. 좋은 교회가 되려면 늘 교회 생각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장로다. 끊임없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구구절절 새겨볼 말이었다. 두툼한 월급봉투는 헌금 계산하느라 얇아졌고 그런 모습을 보는 어린 딸은 부모의 믿음이 이해되지 않아서 투덜거렸지만 목회자의 아내가 되고 보니 항상 교회와 목회자를 걱정하는 아버지 신앙이 존경스러웠다고 술회한다.
제해종 장로는 원로가 되었어도 열심히 말씀을 묵상하고 찬송을 즐겨 부른다. 스마트 폰에 성경 앱을 깔아놓고 매일 방문하며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 그 앱에는 방문한 누적 일수가 표시되는데 오늘로 480회라고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앱은 하루만 방문 안 하면 다시 1회로 돌아가는 단점이 있다. 제 장로는 그전에 200회를 달성했다가 다시 1로 돌아가기를 여러 번 했었다. 이처럼 그는 원로가 된 후에도 꾸준히 말씀을 묵상하고 스스로 은혜받는 신앙 훈련에 게으르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뇌 운동을 하면 치매 예방에도 좋아서 말씀 묵상은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는 치매 걸릴 확률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치매는 유전적 성향도 있지만 꾸준한 후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병이니 나이 들면서 더욱 말씀을 묵상해야 할 이유였다. 갑자기 카톡을 펼쳐 보인다. 오늘 읽지 않은 메시지 분량이 상당했다. 그가 매일 묵상한 말씀을 나누는 지인들이었다. 타인과 단절된 원로가 아니고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는 노년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베푼 손길 위해 기도하는 제해종 장로, 한때 땀을 흘리며 섬겼던 봉평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목이 멘다. 지금까지 이 교회를 지켜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또 앞으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길 비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1965년 교회 근처에 집을 지었다는데 당시로서는 꽤 잘 지은 건물이었다. 문득 그 집이 지금까지 있는지 궁금하다면서 대략 위치를 설명한다. 근 60년이 되는데도 본인이 손수 지은 집이 그대로 있으니 뭉클 진짜 고향의 감흥이 그의 코끝을 찔렀다. 아버지를 모시고 온 딸에게는 난생 처음 본 생가(生家)였으니 그에게도 진짜 생생한 고향 체험이 되었다. 이것이 그들에게 봉평이 고향 같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5년 후면 고향 봉평교회가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이 감사예배에서 만나자고 했더니 인간적으로는 자신이 없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믿음으로 약속했다. 이제는 기도 가운데 만남을 이어가며 바람결에 들리는 소식에는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로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좋은 원로가 되는 것은 평소에 잘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복임을 새삼 깨닫는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편 71:18).
차 한 잔에 목이 멘 기도를 하는 제해종 장로
딸 제미아 사모와 제해종 장로
메밀꽃밭을 관광시켜주는 깡통열차
1965년 제해종 장로가 지은 집 건물, 면 사무소 앞에 위치하고 있다.
1965년 당시 건축 중인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