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호우 / 정선례
추석을 앞두고 농약 방에서 월동 배추 모종 세 판을 사 왔다. 일반배추보다 식감과 단맛이 좋고 추위에 강해서 눈 속에서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김장하고 남은 배추는 겨우내 수육에 쌈으로 먹고 끓는 물에 데쳐 된장초무침도 한다. 겨울이 다 갈 무렵 김장 김치가 물릴 때는 절여 손으로 찢은 배추에 냉동실에 얼려둔 김장하고 남은 양념 한 봉지를 꺼내 겉절이로 버무려서 상에 올리면 밥도둑이다. 아마도 눈보라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해서 단맛이 더하나보다.
한낮은 여전히 뜨거워 흐린 날 오후에 30cm 간격으로 구멍을 파서 충분히 물을 대준 후 심었다. 심고 나서 물을 주면 뿌리에 스며들지 않고 곧바로 흘러내려 버리기 때문이다. 먼저 먹을 용, 김장용으로 열흘 간격을 두고 무와 쪽파도 심었다. 로터리를 친 직후 심어 땅이 촉촉해서인지 며칠 만에 흙을 박차고 올라온 연둣빛 여린 떡잎이 함초롬하다. 거기에 시샘이라도 하는 듯 잡초도 빼곡히 올라왔다. 텃밭은 흙의 기운을 받은 김장거리. 잡풀조차 싱그럽다. 틈틈이 가서 고랑에 쪼그려 앉아 두둑의 풀을 다 뽑은 후 날 끝이 넓적한 호미로 고랑을 긁어 맸다. 깨알보다 작은 산모기가 입도 비틀어지지 않았는지 옷과 맞닿은 등과 엉덩이를 물어 댄다. 호미 끝으로 연신 긁었더니 견딜 만하다.
장마철에도 수캐 오줌 누듯이 슬쩍 지나간 비는 여름내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마을 어르신들이 20년 만의 가뭄이라고 입을 모았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다. 반가웠다. 드디어 길고 습한 폭염도 한풀 꺾이려나 보다. 봄비는 내릴 때마다 따뜻해지고 가을비는 그와 반대다. 땅심으로 제법 자란 배추 사이에 비료를 넣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드리우더니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옷이 젖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이내 폭포수처럼 줄기차게 퍼부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호우다. 논에 다녀온 남편이 저수지 아래 큰 냇가에 물이 넘쳐 논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잠겨 통행이 어렵다고 한다. 물이 빠질 때까지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꼭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적당하게 내리는 약비로 왔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시간당 50mm로 역대급 물 폭탄이다. 수봉과 만봉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도랑물이 합류한 물길이 성배골로 흘러들었다. 급기야 농수로가 넘쳐 사방이 물 천지다. 남편은 축사와 퇴비장, 집 주변 배수로에 비닐이나 나뭇가지가 걸리지 않았는지 잰걸음으로 돌아본다. 피해가 잇따르는지 호우 재난 문자가 쉴 새 없이 들어온다. 때아닌 가을 호우에 농장과 길이 빗물에 잠겼다.
재산의 절반인 소에게 자칫 피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물을 빼는 데도 사방에서 쏟아지다 보니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나도 고무 양동이로 주름관을 타고 올라오는 폐수를 연신 퍼 날랐다. 목이 마른 소가 행여라도 그 물을 먹어 질병에 걸리면 약값이 더 든다. 그래도 비 예보와 볏짚과 사료를 비닐로 잘 덮은 비설거지 덕분에 젖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러잖아도 국제 곡물가 영향으로 사료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는데 소 값은 바닥이다, 소 키우는 일은 금방 접을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손해를 보면서도 버티고 있다.
마침내 비가 그쳤다. 앞산 너머 하늘에 부채 모양의 무지개가 떴다. 바라보는 마음이 하나도 신비롭지 않다. 마치 약 올리는 것 같아서. 비 온 뒤 남겨진 상흔이 크다. 추수를 앞둔 벼는 물에 잠겼다. 냇가 건너 지대가 낮은 큰 논은 큰비만 오면 으레껏 물에 잠겨 쓰러지는지라 일찍부터 논을 말린다. 벼들이 수분을 찾아 더 깊이 뿌리를 내려 태풍에도 잘 견디기 때문이다. 시멘트가 발라진 길 끝에 흙길은 깊은 구덩이가 파였다. 밭둑이 무너져 내리면서 애써 기른 김장 채소까지 흙에 쓸려 내려가 버렸다. 꼼꼼하고 미리 대비하는 성품인 남편이 물에 잠긴 벼를 바라본다. 지난봄부터 벼를 심고, 가꾼 수고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며칠 후면 싹이 나버릴 것이다. 35년 동안 농촌에 살면서 늘 강풍과 호우 폭설로 풍수해를 겪는다. '농사의 반은 하늘이, 반은 사람이 짓는다'는 말이 실감 난다.
이렇듯 때때로 찾아오는 고비가 버거워 도시로 나가 살자고 여러 차례 말했다. 골투재 휘돌아가는 모퉁이 큰 바위처럼 꿈적하지 않는다. 지금 나가서 뭐 하고 사느냐고 자기가 정해놓은 말만 되풀이한다. 적게 벌어 적게 쓰면 일 안 하고도 살 수 있다고 설득하지만 열 번 생각하고 한번 행동하는 남편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다. 남편을 두고 혼자 읍내에 나가 살 수도 없다. 내가 보태지 않아도 충분히 고단한 하루를 사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운 정도 정이라고. 남편에게 뭐든 좋은 것은 다 해 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제철 음식 정갈하게 차려 내고, 이부자리 햇볕에 뽀송뽀송 말리고, 청결한 옷가지 가지런히 걸어둘 수밖에. 그래도 미운 정도 정이라고. 뭐든 좋은 것은 다 해 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오늘도 나는 이른 봄에 삽목한 무화과 모종을 집으로 들어오는 도랑 가에 줄 맞춰 옮겨 심었다. 동해에 취약하지만, 다른 나무에 비해 병충해도 없고 폭풍에도 잘 견딘다. 사과, 배, 포도나 단감이 나오기 전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과일이다. 내년 봄에는 수국 꺾꽂이를 마사 흙에 묻어서 아래 축사 주변에 심고 이웃에도 나눠야겠다. 싹을 틔워 생명을 자라게 하는 흙은 어머니다. 한 가정의 지어미인 나는 더 말해 무엇하리. 어느새 나도 여기 성배 골짜기에 느릿하게나마 뿌리가 내리고 있는 게 아닐까?
첫댓글 그놈의 비는 안 와도, 많이 와도 걱정입니다. 하여튼 정선례 선생님은 부지런하네요. 벌써 그 골짜기에 뿌리를 내렸는대요 뭐.
수캐 오줌 누듯 슬쩍 지나가던 야속한 비가 어느 날 갑자기 저희 산동네까지 삼킬 기세에 무섭기까지 했던 그날이 생각나네요.
올해 농사 피해가 어마어마 하다고 하네요.
기후위기가 남 일이 아닌데요.
뿌리 잘 내렸으니 튼실한 나무가 되어 식구들에게 쉼터를 내 주겠지요.
애써 기른 채소가 몽땅 흙에 쓸려 가 버렸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그 비 올 때 저가 광양에 있었더랬어요. 정말 겁나게 쏟아졌었지요. 서천변이 넘칠 것 같았어요. 아무쪼록 남은 기간 동안이라도 마무리 잘 되시기 바랍니다.
자연은 적당히가 없나 봅니다. 그래도 선생님 글에서 느껴지는 싱그러움은 참 좋습니다.
농부 작가님의 글이 오늘따라 더 가슴을 울리네요. 피해가 잘 복구되었길 바랍니다. 또 한 고비 넘기고 이웃과 나누는 삶, 예쁘게 사실 모습이 그려집니다.
저도 시골의 산에 살다보니 큰비 내릴 때마다 가슴 졸여서 선생님 마음에 더욱 공감됩니다. 1차 산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노력만큼의 댓가가 나오지 않아 허탈할 때가 많아서 안타까워요.
선생님, 글 흐름이 좋은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