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노트 50
< 수행 노트는 1996년도부터 미얀마 마하시 명상원의 수행지도 스승과 한국인 수행자들의 수행면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참고는 수행자를 돕기 위한 묘원의 글입니다. >
질문 : 호흡의 일어남과 꺼짐이 실낱같이 미세해서 알아차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망상을 하거나 졸음에 떨어집니다.
답변 : 일어남과 꺼짐이 머리칼처럼 미세해져도 그것을 잡아서 밀착해서 알아차려야 한다. 호흡이 미세해도 알아차림을 밀착시키지 않으면 수행의 진전이 없다.
< 참고 >
위빠사나 수행은 어떤 상황이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좋을 때는 좋은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좋지 않을 때는 좋지 않은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은 잘하기 위해서 하지만 가장 잘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대상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대상에 개입하면 나의 성향이 들어갑니다. 나의 성향은 내가 있고 나의 고정관념이 지배합니다. 내가 있고 나의 고정관념이 지배하면 존재의 성품을 알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대상에 개입하지 않아 마음이 고요합니다. 마음이 고요해야 법의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자신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가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은 즐거울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날씨가 맑은 날이 있고 흐린 날이 있듯이 인간의 상황도 조건에 따라 항상 변합니다. 조건에 따라 변할 때는 조건을 거부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리기만 해야 합니다. 수행의 궁극의 목표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존재의 성품은 무상, 고, 무아입니다. 무상, 고, 무아를 알 때만이 집착이 끊어져 괴로움에서 해방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존재의 성품을 알아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내게도 최종적 목표여야 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집중이 안 될 때는 집중이 안 되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만입니다. 집중이 안 되는 것을 잘하려고 하면 욕망으로 하는 것이라서 수행이 아닙니다. 집중이 잘 되어서 대상이 미세해지면 미세해진 상황에 맞추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상이 미세할 때는 미세한 것을 알아차리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미세할 때는 분명할 때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대상이 분명할 때의 알아차림과 미세할 때의 알아차림은 분명히 다릅니다. 다른 상황에서는 다른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상황에 맞는 알아차림이 바로 알아차림의 순도입니다. 수행 중의 알아차림은 순도가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습니다. 미세할 때는 집중이 강해지고 알아차림이 약해집니다. 이때는 약해진 알아차림이라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뀐 상황에서 알아차림의 순도를 높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상황에 맞는 알아차림이란 뜻입니다.
알아차림은 ‘두는 알아차림’이 있고 ‘있는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수행자가 처음에는 노력을 해서 두는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미세한 상황에서는 지혜가 이끄는 있는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있는 알아차림은 노력을 한다고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은 상황에 맞는 알아차림이 있기 마련이므로 어느 상황에서나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아차림이 항상 완벽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서 알아차림이 안 된다고 자책하거나 괴로워해서는 안 됩니다.
호흡이 미세해질 때는 일어남과 꺼짐 사이의 작은 정지 상태를 알아차리고 다시 꺼짐의 끝을 주목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남과 꺼짐 사이에도 작은 정지 상태가 있고 꺼짐과 일어남 사이에도 작은 정지 상태가 있습니다. 요약하면 일어남, 쉼, 꺼짐, 쉼, 일어남 이런 식으로 일어남과 꺼짐 사이에 있는 호흡이 약간 정지된 쉼의 순간을 알아차리면 밀착해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또 일어남에서 바람의 팽창하는 느낌을 느끼고 꺼짐에서 바람이 빠지는 느낌을 느끼면 밀착해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매번의 호흡에서 바람이 부풀고 빠지는 느낌을 모두 다르게 느끼면 더 좋습니다.
호흡에도 강과 약, 길고 짧음, 단단함과 부드러움, 밀고 당김, 팽창과 수축 등이 있습니다. 코에서는 차가움과 따뜻함이 있습니다. 이 중에 어느 것 하나에 주의를 집중하면 미세한 호흡에서도 지속적인 알아차림이 가능합니다. 호흡이 미세할 때는 호흡이 가지고 있는 다양함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번 다른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알 때 흥미를 잃지 않아 계속해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찰나 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므로 항상 새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3. 질문 : 수행 중에 화가 너무 치밀어서 알아차렸는데도 진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답변 : 호흡을 알아차릴 때 먼저 일어난 알아차림과 다음에 일어난 알아차림 사이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냄은 알아차림과 알아차림 사이에서 들어온다. 알아차림의 지속만이 성냄의 불길을 잡을 수 있다. 분노가 발전하면 그 불길을 잡기가 힘들다. 어떤 대상에 대한 나의 견해가 작용하기 전에 먼저 알아차려서 집중을 해야 한다.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고 집중을 해야 성냄이 일어나지 않는다. 작은 한순간에 성냄이 일어나니 처음 알아차림과 뒤에 일어난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도록 하라.
< 참고 >
호흡의 일어남 꺼짐 사이에 다시 일어남이 있기 전의 짧은 순간의 정지된 상태에서 망상, 졸음이 일어납니다. 마음은 워낙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짧은 순간도 소홀히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호흡은 일어남과 꺼짐 뒤에 호흡이 정지된 짧은 순간의 쉼이 있습니다. 일어남과 꺼짐은 움직임이 분명해서 알아차리기가 쉽지만 쉼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짧은 순간이지만 알아차림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을 밀밀하게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일어남’ ‘꺼짐’ ‘아는 마음’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남, 꺼짐, 아는 마음’, ‘일어남, 꺼짐, 아는 마음’으로 진행하면 밀밀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아는 마음’은 정지된 순간을 ‘아는 마음’으로 채우라는 뜻입니다. 이런 알아차림의 지속이 집중입니다. 집중이 되어야 망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행 중에 화가 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집중이 되지 않아서 화가 날 수도 있지만 수행이 발전해서 마음이 고요해져도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과거에 숨겨진 잠재의식 나타나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가 나는 것도 수행을 할 때 일어나는 과정의 하나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 수행이라서 수행의 결과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화가 나는 것이 적어지는 것으로 수행의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화가 나지 않기 위해서는 화가 나는 순간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화가 난 것을 알아차리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화가 난 것을 거듭 알아차리면 차츰 화가 욕망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라는 지혜가 납니다. 이렇게 해서 점점 화가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지 않으려면 화가 나는 순간을 많이 경험해야 합니다. 잠재의식에 가득 차 있는 분노가 표출되어야 알아차림에 의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숨어있으면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화가 날 때는 화가 알아차릴 대상이며 오히려 화가 소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삽니다. 이 고정관념이 잠재의식입니다. 인간의 잠재의식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가장 많습니다. 내가 가진 가장 많은 자산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런 고정관념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고정관념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합니다. 고정관념은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세력을 키워온 것이라서 어떤 방법으로도 제거하기 힘듭니다. 제거하려고 하면 더 강해집니다. 누구나 오히려 고정관념을 더 강화하기 위해서 삽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없애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지혜를 얻는 길밖에 없습니다. 고정관념은 오직 통찰지혜에 의해서만이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화의 원인은 욕망입니다. 욕망의 원인은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의 원인은 자아입니다. 사실 어리석음이 선하지 못한 마음의 근원이지만 이것보다 더 큰 근원은 자아입니다. 자아의 반대가 무아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야 비로소 고정관념이 소멸합니다.
수행을 해서 화가 줄어들면 욕망이 줄어든 것입니다. 수행을 계속해서 욕망이 줄어들면 어리석음이 줄어든 것입니다. 수행을 계속해서 어리석음이 줄어들면 자아가 소멸하고 무아의 지혜가 난 것입니다. 이처럼 의식이 소멸하는 과정은 여러 단계를 거쳐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할 일은 어떤 대상이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점진적인 지혜를 얻는 길밖에 없습니다.
화가 날 때는 먼저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이 일을 하는데 일하는 마음이 화가 났으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가 난 마음을 수습하려면 먼저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가슴으로 가서 화난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 두근거리거나 콩닥 거리를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런 느낌을 계속 알아차려서 진정이 되면 그 자리에 호흡이나 맥박이 일어납니다. 이때 호흡이나 맥박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화난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 느낌이 고요해지면 이미 화난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소멸이 아니므로 대상을 집중해서 알아차려야지 다시 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화는 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이 대상입니다. 화는 알아차릴 대상이라서 법입니다.
이 길은 혼자서 가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스스로 타파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드시 앞에서 이끌어주는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조금씩 개선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자를 붓다라고 합니다. 붓다가 아니면 누구나 반드시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붓다가 아닌 모든 성자는 스승의 도움을 받아서 괴로움을 해결하였습니다. 나는 혼자서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아가 강해서 생기는 오만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모르는 것을 알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