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88)
2부(38)
하늘이 정해 주신 연분(緣分)
휘몰아치는 폭풍(暴風)이 지나고 나자,
수안댁(遂安宅)은 새삼스럽게 불안감
(不安感)에 떨며 호소(呼訴)하듯 속삭였다.
" 나 같은 계집 때문에 삿갓 어른께서
불행(不幸)해져서는 절대(絶對) 안 돼요,
오늘 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할 테니,어서 내 집에서 나가 주세요."
김삿갓은 공포(恐怖)에 떨고 있는 수안댁
(遂安宅)이 측은(惻隱)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넌지시 달래주는데,
"자네와 가까이하는 사내는 모두 죽게 된다니까 겁이 나서 그러는 모양(模樣) 이구먼.
그러나 그런 무당의 허튼수작(酬酌)에
휘둘리지 말고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절대로 죽지 않으니까."
"아니에요. 할머니 무당의 말씀은 허튼소리가 아니에요. 그 무당의 예언
(豫言)은 한 번도 빗나간 일이 없는걸요."
한번 믿기 시작하면 미신(迷信)처럼
무서운 것이 없어서,수안댁(遂安宅)의 강박관념(强迫觀念)은 여간해서 떨쳐 버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김삿갓은 어떤 방도(方途)든지
수안댁(遂安宅)을 공포(恐怖)에서 구출(救出)해 내고 싶은 의무감(義務感) 조차 느껴졌다.
그래서 불안(不安)에 떠는 수안댁
(遂安宅) 을 꼭 껴안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사람의 운명(運命)이 귀신(鬼神)의
손에 달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릴세.
서로 좋아하는 남녀(男女)가 잠자리를
같이한 것이 무슨 죄(罪)라고 재앙(災殃)
이 생기겠냐는 말이야.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김삿갓은 수안댁(遂安宅)의
벗은 몸을 천천히 애무(愛撫)했다.
그러자 처음과 달리 수안댁(遂安宅)은
김삿갓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러면서도 불안감(不安感)이
쉽사리 떨궈지지 않는지, 한 마디 뇌까렸다.
"삿갓 어른께서 아무 재앙(災殃)도
없으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허 어!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
안심(安心)하라니까!
내 말이 믿어지지 않거든 몇 달 동안
나하고 같이 살아 보면 될 게 아니야?"
김삿갓은 수안댁(遂安宅)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기 위해,
의도적(意圖的)으로 수안댁(遂安宅)의
몸을 재차 덮어 눌렀다.
두 번째 정열(情熱)도 첫 번째 못지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한 듯,
두 사람의 섞임은 약속(約束)이라도
한 듯이 한 편의 장중(莊重)한 오케스트라처럼 황홀(恍惚)하게 화합(和合)했다.
두 번의 정사(情事)로 두 사람은
녹초가 되었다.
그들은 벗은 몸을 서로 끌어안고
달콤한 새벽잠에 빠져들었다.
"꼬끼오~ !" 어느새 창밖이 밝아왔다.
잠자리에서 깬 두 사람은
서로를 가는 실눈으로 마주 보았다.
김삿갓을 보고 있는 수안댁(遂安宅)의 눈에는 까닭 모를 불안감(不安感)이 묻어있었다.
김삿갓은 여인(女人)의 벗은 엉덩이를 만지며 속삭였다.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치우고 그만 일어나서 밥을 지어와요.
간밤에 신방(新房)을 치렀으니
이젠 신랑(新郞)이 초례상(醮禮床)을 받아야지 할 것 아니겠나? 후 후!"
김삿갓의 익살에 수안댁(遂安宅)도 마음이
놓이는지 일어나 옷을 추려 입으면서
수줍은 듯 미소(微笑)를 짓는다.
"朝飯(조반)을 지어 올 테니
그동안 한잠 푹 주무시고 계세요.“
여인(女人)은 사랑하는 남자(男子)를
위해 밥을 짓는 것이 그렇게나 행복(幸福)한 모양(模樣)이었다.
얼마 뒤, 두 사람이 겸상(兼床)으로
조반(朝飯)을 다정(多情)하게 먹고 있는데
문득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 왔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찾아온 사람은 조조였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방안으로 들어오다가 두 사람이 함께 식사(食事)하는 모습(模襲)을
보고 대뜸 농담(弄談)을 퍼붓는다.
"어럽쇼! 어제저녁만 해도 두 사람 모두,
결혼(結婚)을 안 하겠다고 우겨대더니,
어느새 신방(新房)까지 치르고
초례상(醮禮床)까지 받았네그려.
과부와 홀아비가 만나더니만,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모양(模樣)이네?"
김삿갓은 무안(無顔)해서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 허! 허!,
과부와 홀아비라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네.
없던 마누라가 하룻밤 사이에 생겨 난 것은
오로지 자네들 덕택(德澤)일세.
너무도 고마워 친구(親舊)."
"잘했네! 잘했어! 하늘이 정해 주신
연분(緣分)은 어쩔 수 없는 거야.
또 이래야만 자네가 우리 마을에서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살 게 아닌가?"
이렇게 말을 한 조조는 흡족(洽足)한 웃음을 지으며 밥상을 들여다보더니,
"아니, 수안댁(遂安宅)은 하룻밤 사이에
정(情)이 얼마나 깊어졌길래,
새 서방에게 영계백숙까지
대접(待接)하고 있는가?"하고
수안댁(遂安宅)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수안댁(遂安宅)은 얼굴을 붉히며,
"반찬(飯饌)이 하도 없길래
병아리 한 마리 잡은걸요.“
김삿갓도 잠자코 있기가 쑥스러워서,
"이 사람아! 영계백숙 한 마리 얻어먹으려고
간밤에 내가 수고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자네는 알기나 하고 그러는가?"
조조는 그 소리를 듣고 배를 움켜잡고 웃으며, "하하하, 간밤에 자네의 수고가 많았으리라 斟酌(짐작)되네. 그나저나 허리는 괜찮은가?"
"예끼, 이 사람아!“
"하! 하! 하! 하!"
조조는 이 같은 걸쭉한 농담(弄談)을
한바탕 퍼붓고 나서,
곧 정색(正色)하며 수안댁(遂安宅)에게 묻는다.
"오늘부터 술장사는 그만두어야 할 것 아닌가?“
"글쎄요. 아직 그 문제(問題)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네요."
"생각을 안 해보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여보게 삿갓!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글쎄,그 문제(問題)는 본인(本人)의 의사(意思)에 맡기는 것이 합당(合當)
할 것 같네."
"그래? 이 친구(親舊)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는걸.“
그러면서 부랴부랴 밖으로 달려나가며 김삿갓에게 당부(當付)했다.
"나 어디 잠깐 다녀올 테니,
두 사람은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게!"
김삿갓은 조조가 무슨 일로 어디를
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해서,
"저 친구가 별안간(瞥眼間) 어디를 다녀온다고 야단이지?"
하고 수안댁(遂安宅)에게 물었다.
그러자 수안댁(遂安宅)도 고개를 갸웃하며,
"글쎄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하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時間)쯤 지난 뒤였다.
조조가 대동(大同) 계장(契長) 제제를 앞세우고 20여 명의 상조(相助) 계원과 함께 나타났다.
김삿갓은 너무나도 뜻밖의 일로 깜짝 놀랐다.
"아니, 자네들은 무슨 일로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왔는가?"
그러자 제제가 일동(一同)을 대표(代表)하여 근엄(謹嚴)한 어조(語調)로 선언(宣言)하듯 말했다.
"우리는 자네에게 결혼식(結婚式)을 올려주려고 몰려왔네.
자네가 수절(守節)하는 수안댁(遂安宅)을
함부로 건드려 놓고 훌쩍 도망(逃亡)이라도
가버리는 날이면, 그야말로 우리 마을의
불상사(不祥事)가 아닌가?
더구나 자네의 애매모호(曖昧模糊)한
태도(態度)로 보아, 그런 불상사(不祥事)
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保障)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그런 불상사(不祥事)를 미연 (未然)에 방지(防止)하려고 여럿의 계원(契員)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네와 수안댁(遂安宅)을 정식(定式)으로 부부(夫婦)로 맺어 주려 하네.
자네는 설마하니 이제 혼인(婚姻)을
못하겠다고는 하지 않겠지?"
평소(平素)에는 스스럼없이 지내던 친구(親舊)였지만, 이때만은 제제의 태도(態度)가 준엄(峻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계장(契長) 제제의 말이 끝나자
다른 친구(親舊)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네는 복(福)도 많으이. 돈 한 푼 안 들이고 혼인식(婚姻式)도 올리고 말이야!"
"그러게나 말이야, 저 친구(親舊)
좋아하는 얼굴 좀 보라지!"하고
제각기 놀려대고 있었다.
사태(事態)가 이쯤 되고 보니,
김삿갓도 이제는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옆에 서 있는 수안댁(遂安宅)조차
까닭 모를 불안(不安)에 떨면서도
무척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만사개유정
(萬事皆有定)이라,이것도 피치
못할 운명(運命)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순간(瞬間) 이런 생각이든 김삿갓은
마음을 고쳐먹고 친구(親舊)들을 향해 말했다."자네들의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報答)해야 할지 모르겠네.
고맙네. 자네들의 호의를 받아들임세."
그러자 친구(親舊)들은 쌍수(雙手)를
들어 환호(歡呼)했다.
"우리 마을에 아까운 과부(寡婦) 하나 없어지게 되었구나."
"수안댁(遂安宅)은 복(福)도 많았구먼그려,
저 친구(親舊)가 수안댁(遂安宅) 남편
(男便)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하고 제각기 한마디씩 놀려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