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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재 지음
소를 사랑한 화가 이중섭
제주도에 갔을 때 이중섭이 살았던 곳을 방문했다. 이중섭거리로 조성되어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사후 너무나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만 삶이 녹녹지 않았고 불행한 죽음을 맞이함에 안타까웠다.
사랑하는 가족이 삶의 원천이었던 이중섭은 아내와 아이들과 헤어지고 가장으로서 성공하고픈 욕구가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보낸 편지화 <남쪽나라를 향하여> 이 그림이 눈길이 간다.
현실은 비참했음에도 바다 건너 가족에게 보내는 그림은 한없이 밝기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품에 안고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그의 간절함이 너무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절절해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사랑, 희망, 그리움, 간절함, 답답함, 슬픔, 고통, 언어로는 절대 표현할수도, 전할 수도 없을 그 오만 가지 정서를 단 한장의 그림에 담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진정성이라 부릅니다.p33
편지화는 <길떠나는 가족>으로 재탄생합니다.
그는 기필코 사랑하는 가족과 재회해 따스한 남쪽 나라로 가야했습니다.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답게 그의 그림에는 순도 높은 화가의 감정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림 속 화가로 보이는 소 끄는 사내의 포즈와 한껏 쳐들어 올린 왼팔에 주목해보세요. 희망의 외침인지 고통의 절규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그의 그림에서 밝은 희망과 함께 처절할 정도의 절박함이 느껴집니다. p38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원조 신여성 나혜석
첫사랑 최승구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 나혜석은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 김우영과 결혼을 한다. 삼남매의 자식을 둔 상태에 나혜석은 셋째가 태어난 지 몇개월도 안된 젖먹이를 시댁에 맡겨놓고 남편과 세계일주를 떠난다. 그녀는 '내가족을 위해, 내 자신을 위해, 내 자식을 위해' 라고 한다.
결국 이 선택은 그녀의 불행을 비롯해 남편과 자식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만다.
당당한 신여성으로 살기를 원했지만 시대는 그녀를 부도덕하다고 손가락질 했고 결국 가족들도 외면한채 쓸쓸히 삶을 마감한다.
<해인사 3층석탑>의 작품에서는 어딘가에 있지만 볼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불공을 드리며 탑을 하나둘 쌓아 올리는 떨리는 손이 그림을 통해 전해집니다.p92
나혜석. 그녀는 모든 것이 헐어진 자신의 마음속에 최후의 빛과 색을 채우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죠. 세상과의 단절에서 오는 고립감과 아이들이 보고싶어 몸부림치며 밤을 지세우는 시간이.누적되며 극도의 신경쇠약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p93
자신이 너무나 소중했고 성공하고 싶었고 이 시대를 역행하고 싶었던 나혜석도 자식이 너무나 보고싶었던 엄마였다. 젊은 시절 첫아이(나열)를 임신했을 때는 자신을 힘들고 아프게 하는 아이를 두고 '자식이란 모체의 살덤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표현했던 나혜석이었다. 그러나 20여년의 시간이 흐른뒤 낳은 정과 기른 정이 거대한 모성애가 되어 한없이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가 된 것이다.
나혜석은 잠시 머물렀던 수덕사여관에서 이응노 화백을 만났다.
한국 최초의 월드 아티스트 이응노
"예술이란 자신의 뿌리를 나타내는 작업"이라고 말한 이응노는 전통 동양화와 근현대 서양화를 흡수해 한민족의.정체성이 고스란히.담긴 현대적 '한국화'를 창조하는 것에 평생을 바친 미술가이다.
'내그림이 조국에 닿진 못하지만, 내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군중의 외침. 조국에 가 닿을 수 있을까?' 그는 사람을 그립니다. 오직 사람을 그립니다. 불의에 죽어간 그 수많은 민중의 넋을 달래고자. p134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을 파리에서 들은 77세 노장 화가 이응노는 그 소식을 듣고 두 뺨에 멈출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1980년 <군상>을 통해 민중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작품속에 용감히 담아내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라는 타이틀 이전에 그는 매우 뛰어난 사업 감각을 가지고 있던 '사업천재'였다.
<작품>은 1957년 작으로 '한국의 자연'에 담긴 본질을 자신의 추상언어로 변환해 담았다.
태백산맥의 웅장하면서도 유려한 검은 능선, 뜨겁게 지는 붉은 태양에 물든 샛노란 하늘, 산에서 들판으로 이어진 울탕한 초록 나무 숲, 풍년을 알리는 누런 밭, 그 경계를 희망차게 감싸안은 푸른 동해. 그 독창적이면서도 극도오 절제된 기하학적 형상들이 모여서 이룬 구성미가 느껴진다. 또한 자연의 심장을 품고 있는 색체에서 뜨거운 맥박이, 자연의 살결을 담은 물감의 오돌토돌한 질감의 맛이 느껴진다. p170
"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어. 세상에 태어나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 나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간섭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싶은대로 그리면서 평생 자유로운 예술을 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얼마나 좋은지 몰라."p181
아이의 낙서처럼 심플한 그림 장욱진
유영국과 장욱진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같은 세대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살며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를 몸소 겪었다. 함께 신사실파로 활동하며 서로의 예술 세계에 영감을 불어주었다. 유영국은 현실에 발을 딛고 이상을 추구한 반면 장욱진은 현실을 벗어나 오로지 이상만을 추구했다. p185
"나는 나로서 족한 것이지 왜 남하고 비교하는가.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열등의식이 생기고 자아가 망가진다. 그림이란 무엇인가. 결국 자아의 순수한 발현이어야 하지 않는가. 비교하다 보면 절충이 될 뿐이다. 누구의 그림이 좋다 하여 그것을 부러워하여 내가 그렇게 그리고자 한다면 그게 어디 그림인가. 자존심을 가져야 할 덧이다. 남에 대해서 인정할 것은 다 인정하고 자기는 자기로서 독립할 수 있어야 한다. 예속된다는 것은 자아의 상실이다. 너를 찾고 너를 지켜라. 자유로 가는 길이 거기에 있다. p208
진진묘는 아내의 법명입니다. <진진묘>는 삶에서 온갖 풍파를 겪는 중에도 가족을 위해 불경을 외며 흔들림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 아내를 부처로 승화시키고 있는 그림입니다ㅡ 아내에게 바치는 남편의 존경과 감사를 담은 말없는 불화인 것 입니다. p211
1979년 둘째 아들 형구가 세상을 떠난다. 가족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장욱진은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 형구를 뿌린 곳에 뿌려달라고 한다.
장욱진의 천진난만함과 해학은 민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그의 그림에서는 양반의 산수화와 서민의 민화가 오묘하게 뒤섞여 있다. 조선의 미학은 이렇게 장욱진의 그림에 한데 섞이며 하나가 된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 김환기
그의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한국 20세기 현대회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영국과 함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며 무엇보다 단색화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로 미술사적 가치를 공고히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서 아무도 추상미술을 하지 않았던 때 추상을 했다. 1947년 결성한 모인 신사실파로 유영국, 이규상과 위기투합한 동인이다. (이후 장욱진, 이중섭, 백영수 등 참여)
이상의 부인이었던 백동림은 이상이 죽자 김환기와 결혼한다. 1944년 서른둘의 김환기와 스물아홉의 김향안. 당시 김환기는 집안이.정해 준 아내와 이혼하고 딸 세명이 있었다. 집안의 반대 앞에 동림은 성을 버리고 김향안(환기의 성 김과 환기의 아호 향안)으로 다시 태어나 김환기의 평생 반려자로 그의 작품활동을 도와준다.
"네 엄마는 파리에 와서 나 때문에 진정 피나는 고생을 한다. .. 내 하찮은 예술의 성공을 위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말 못할 고생이다. 네 엄마의 희생적인 노력과 협조가 아니고서는 나는 잠시도 편히 붓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며..." 파리에서 환기가 딸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환기는 백자항아리의 매력에 빠져 수집하기 시작한다.
" 둥글다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 모두가 흰 빛깔이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단순히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기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고요하기만 한 우리 항아리엔 움직임이 있도 속력이 있다. 싸늘한 사기지만 그 살결에은 다사로운 온도가 있다. 실로 조형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p243
"사랑이랑 믿음이다. 믿지 않으면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 없다. 믿는다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거다. 곧 지성이다."(향안) p264
서민을 친근하게 그려온 국민화가 박수근
1926년 열세살 소년 박수근은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감동을 받고 밀레의 작품을 통해 공감과 영감을 얻어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겠다고 결심했다.
<갈가에서> 속 젖먹이 아기를 업고 있는 소녀를 박수근은 너무나 정갈하고 귀엽게 단순화시켰습니다. 마치 신라인들이 진심어린 불심으로 화강석을 살살 다듬어 하나둘 쌓아올려 석탑을 짓듯, 수근은 갓난 아기를 업고 있는 소녀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그 마음을 담아 소녀의 모습을 정성들여 툭툭 쌓아올린 것리죠. 고무신부터 종아리, 고운 연분홍 치마, 엄마가 개천에서 빨아다 주신 새하얀 이불보, 고슬고슬 검정 저고리, 그리고 장난기 어린 싹뚝 단발머리까지, 마치 신라의 이름 모를 도공이 석탑을 쌓아올리듯 그렇게 모든 성심을 다해 수근은 아기 업은 소녀상을 툭툭 쌓아 올렸습니다.p294
독보적인 여인상을 그린 화가 천경자
눈. 우리는 눈이라는 창을 통해 소통합니다. 그런 인간의.본능을 잘 이해하고 있는 화가가 있습니다. 천경자. 우리는.보통 천경자를 '여인상을 그린 화가'로 기억합니다. 그런데.그녀가 그린 여인상을 곰곰이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점점 더 명확하게 깨닫게.되는.것이 있습니다. 천경자는 여인의.말 못 할 감정을 담은 '눈'을 그리기.위해 여인을 그렸다는 것을 말이죠.p303
<황금비>를 곰곰이 들여다 보세요. 화면의 모든 붓질이 결국 정중앙에 있는 '눈'을 살아있게 만들기 위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천경자는 자신의 감정을 그 여인들에게 이입시켜 그렸습니다. 그렇기에 그녀가 그린 여인상들은 모두 그녀의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자신의 감정. 그 오묘한 감정을 자신이 그리는 여인의 눈에 담아 '말없이' 전하려 했던 화가, 천경자.p305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백남준은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아버지는 사업을 물러받길 원했지만 그는 음악과 미술에 빠지게 된다.
그는 존케이지의 공연을 보고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파괴시키고 그의 정신과 인생을 바꿔놓게 된다.
존케이지는 세상의 모든 소음을 음악에 가져온다. "우리가 어디를 가건 우리의 귀에 들리는 것은 대부분 소음이다. 우리가 소음을 귀찮아한다면 소음은 오히려 우리를 괴롭힌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주의 깊게 들으려 한다면 소음이 얼마나 환상적인 것인가를 드디어 알게된다. 소음이야말로 경이로운 음악인 것이다. 가장 자연적인."p349
서양음악에 대한 상식 중에서도 가장 당연한 상식이었던 '악보와 악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것. 25년 전, 서양미술에 대한 상식중에서도 가장 당연한 상식이었던 '미술은 회화와 조각'이라는 고정관념을 파괴하며 현대미술의 신세계를 연 마르셀 뒤쌍.
백남준은 케이지와 뒤쌍을 스승으로 여기며 추종하게 된다. 그리고 탄생한 것이 행위음악이다.
<다다익선>에서 그는 무려 1003대의.모니터를 사용해 거대한 탑을 만들었다. 굳이 1003대로 맞추려 한 것은 한민족 역사의 시작인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의 의미를 작품에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돌조각을 예술로, 모노파 대표 미술가 이우환
이우환은 철학자이며 동시에 미술가이다.
그는 사실상 철학자입니다. 해박한 철학적 지식과 통찰을 바탕으로 한 그만의 명쾌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상을 바탕으로 근대를 비판하고 근대미술을 비판하고 있죠. 더불어, 이런 단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사실상 온 인류가 앞으로 새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자신의 조각과 회화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고도로 정제시켜 매우 간명하게p397
이우환은 관객이 <관계항>을 볼 때 '타자와의 만남'을 직접 체김해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항상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며 일상을 살아왔을 관객이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과 순수하게 대화를 나눠보는 시간을 가지길 바랐습니다.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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