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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전능하시고 한없이 선하시다 만약 이것이 진리라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난관에 처할 때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조언을 구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우리가 기도하든 말든 하나님은 선을 행하실 것이고 최선의 것을 만들어 가신다. 우리의 기도 때문에 하나님은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으시다. 이것은 흔한 기도 무용론의 논리이다.
다음 구절은 기도 무용론을 더 확증해 준다.
마태복음 6장 7절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시편 139:2~3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마태복음 10::30 "너희는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나에 관한 정보를 전혀 모르시기 때문에 알려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만 계셔서 이 세상의 돌아가는 상황에 깜깜 하시기 떼문에 하나님이 통치시는데 도움이 조금 될까하여 정보원으로 일러바치는 행위도 아니다. 필자는 이 구절에 한 때 매몰되어 간단명료한 한마디 중심으로만 기도했다. "주님 다 아시지요?"
그런데 또 느닷없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6 라는 명령은 또 무엇인가? 이 두가지 모순된 말씀으로 초보 신앙시절에 깊이 고민한 적이 있다.
고민 끝에 해답이 있었다. " 나는 너를 다 안다 그런데 너는 나를 얼마나 아니?" .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보자. 하나님은 내 필요를 아시며 자기의 계획을 온전히 이루어 가신다는 그 분께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대체 무엇일까 성경에는 그 해답이 있을까?
이 구절을 더 잘 풀게 하는 열쇠가 기록되어 있다..
" 아담에게 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통치권이 주어진바 되었다.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와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아담은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아들"(눅 3:38 영어성경 참조)이었다. 그는 더 낮은 차원의 존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표자로 세움을 받았다. 하나님의 주권을 가질 수는 없지만 본성에 하나님과의 뜻과 조화되었기에 하나님과 대화하고 더낮은 차원의 것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빛을 전한 사람들 27.28
성경에는 여기에 대한 고전적인 해답이 있다. 히브리어로 "만들다" 단어는 크게 두가지다 בָּרָא, Bara와 עָשָׂה, Ahsa 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고 (בָּרָא, Bara) 사람을 창조하실 (בָּרָא, Bara)때 ,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모두를 손수 쓰실 생각이 없으셨다. 그래서 인간을 여섯째 날 창조하셨고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에 함께 하셨다. 창조의 물리적인 역사는 6일인데 실제적인 완성은 7일 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로서 우주에 전개 되는 대 부분의 사건 중에 인간에게 하룻 동안만의 참여을 적게 나마 허용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아담에게 그 분이 만드신 동식물에게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허락하신 것이다. 이 허용의 역사를 히브리어로 Bara 가 아닌 다른 만듦 즉 Ahsa 라고 한다. 아사(עָשָׂה, Ahsa 만들다)는 행하라는 의미로도 쓰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라에 아사를 덧붙여 이룩하신 창조물을 보신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시고 “ 안식하셨음이니라" (창 2;3)라고 하셨다.
명백한 증언의 말씀에 이렇게 언급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결혼키시고 거기 "두신 후"에(창2:8)야 비로소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이 온전히 아름다웠으며"라고 선언하셨다. (빛을 전한 사람들 29) 그리고 그 후에 장엄하게 선언하셨다. "창조는 이제 완성되었다" (상동 30)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사람을 만들어 자신의 만든 것 중 어느 것을 사람에게 위임하고자 하셨는데 “이 땅의 통치권”이었다. 우주만물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셨지만 이 땅의 것 만큼은 인간에게 넘기고자 희망하셨다. '에덴의 거주자들에게 동산을 관리하며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는( עָשָׂה, Ahsa )일에 지구에 관한 전세권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지구상에 역사하시기 위해 이 땅의 관리자인 인간의 영역에 하나님과 대화 (기도) 의 매개를 주심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 주신 권한이 위임되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 통로를 통해 역사하고 계신다. 이 원리를 알면 전술의 마태복음의 말씀이 풀린다. "사람의 영역이니 사람이 기도함으로 나 하나님의 역사를 이용하거라"
일반적으로 인간이 어떤 일을 이루는데 필요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바로 세상 일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노동(일=Work)과 영적인 일의 성취에 필요한 기도(prayer)이다.
그럼 세상 일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노동의 결과를 보자, 일을 함으로 재화를 얻는다. 일에 시간을 투자함으로 보상을 받는다. 농사를 아무리 잘 지어도 풍작을 확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잡초를 하나라도 뽑으면 그 잡초 한 포기만은 확실하게 사라지고 비료를 조금이라도 주면 비료로 인해 곡식이 한 뼘이라도 더 자라게 된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건강에 해롭고 지구의 자원을 마구 쓴다면 자원이 없어지거나 지구가 오염이 되어 인류 전체에게도 반드시 위협이 된다. 우리가 물리적 규칙에 의해 행하는 행위는 창조의 보장된 질서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냉혹하다.
그러나 영적인 일을 성취하는 도구인 기도로 일어나는 결과는 어떤가? 인간의 전적인 몫인 노동과는 다르게 기도는 하나님이 기도 응답의 효력의 재량권을 온전히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기도는 잘못하면 인간에게 너무도 위험한 활동이 된다. 왜냐하면 기도의 효력이 일단 나타나기만 하면 ,시간과 공간과 제약을 모두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를 들어 주시거나 거부할 재량은 전부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
파스칼(Blaise Pascal)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기도를 만드신 목적은 어떤 일을 유발하는 존재로서의 특권을 부여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즉 그분은 미약한 우리에게 그 분의 사역에 적게나마 동참하도록 자신의 사역에 기여할 수 있는 존엄성을 부여해 주신 것이 바로 기도라는 행위이다. 앞서 창조의 이치를 정하실 때 우리의 행위가 변수가 되게 하셨다. 더욱이 타락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이룩해 나가는데 있어서 기도응답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수정의 여지를 두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는 어떤 식으로 맞물리는 것일까? 하나님의 섭리 없이는 참새 하나도 떨어지는 일이 없다(마 5:29)고 하셨다.
예를 들어 보자, 필자에게 오랫동안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성경절이 마태복음 9장 37-38 말씀이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어느 마을에서 전도를 하시다가 하신 말씀인데 가만히 보면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니 너희들 이외에 다른 이를 더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 전지전능 하신 그 분은 추수할 일꾼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리 아실 텐데 직접 필요한 자를 보내시면 되지 굳이 우리보고 기도까지 하여 일꾼을 구하라는 것은 웬 말씀인가?“
주기도문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
γενηθήτω τὸ θέλημά σου, 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τῆς γῆς·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ίε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Ὅτι σοῦ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빨간 글씨의 헬라어의 원문을 직역하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이루어짐과 같이 땅에서도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직접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면 될 텐데 이를 기도를 통해 해결하라고 하시는가? 이유는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늘에 가는 열린 통로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기도의 의미를 국어사전에서 살펴보니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떤 절대적 존재에게 빎, 또는 그런 의식"이라고 썼다. 우리는 사전에서 말하는 의미로만 기도를 하니 우리가 기도할 때 인간보다 뛰어나며 절대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하나님께 나의 원함을 들어달라고 한다.
그런데 성경적에서 말하는 기도의 의미는 보편적인 그런 국어사전적 기도의 의미와는 사뭇 거리가 멀다.
헬라어에서는 간구하다는 의미는 여러 개로 쓰인다. αἰτέω는 보통 “to request 청구하다”는 의미에 자주 사용되며 신약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또 ζητέω 란 단어가 있는데 “to require 요구하다”라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 9절의 주기도문에서 쓰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προσεύχομαι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기도이다. προσεύχομαι는 προς (toward …쪽으로 )와 εύχομαι (to wish)의 합성어로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개념 αἰτέω 혹은 ζητέω의 의미로 보다 더 확실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도의 원형 προσεύχομαι는 성경의 사용용례는 특이하게도 모두 수동태로 쓰인다
수동태로 쓰이면 προς(toward …쪽으로 )의 방향이 달라진다. .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 헬라어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쪽으로 그븐의 뜻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밖의 대상으로 계신 하나님께 올려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바람(to wish 진리)이 사람에게 흘러 내려가는 방법으로서의 도구가 기도라는 뜻이다.
빌립보서 2:13절에서 이 개념이 명징하게 설명되어 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기도)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기도란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흘러오도록 하는 요청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원함이 나의 원함으로 전이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 자기 이웃을 돌아 하나님께 그것을 이렇게 흘러 보내도록 간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거꾸로 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의미있는 관계를 원하시는 “관계적”인 존재다" ( God is relational being with which we can have a meaningful relationship) 대쟁투 325
그러므로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와의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얻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과 교제 하는 있는 기회다 (Prayer is opportunity for you to enter into communion with the Creator of all the universe.) 이 얼마나 대단한 특권인가? 기도를 통해, 저 멀리 우주 너머에 계시는 희미하고 상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창조 하셨지만 우리와 인격적으로 교제 하고 싶으신 그분과 같이 하여, 지금 여기 곁에 계신 분과 대화하는 멋진 기회다. 그분이 우리와 대화를 원한다. 그런 관계를 원하신다.
우리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예수님도 지상에 계실 때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꼐 기도하셨다
" 우리 구주께서는 그의 의무를 다하고 시련을 굳세게 견디시는 방편으로 그의 아버지께 , 끊임없는 믿음의 공급과 인류룰 위한 탄원을 계속 지속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셨다.... 죄악 세상에서 당하는 상처난 마음의 투쟁과 고민으로 얻은 악한 품성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다. 그렇게 형성된 품성(稟性)은 그에게 기도를 더 필요하게 하였고 드디에 기도가 특권이 되게 하였다. 인류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도 기도의 필요를 느꼈다면 천성이 연약하고 죄많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은 더 많이 기도할 필요을 느껴야 한다... (그 분은)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는 일을 일생의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셨다.... 그리하여 오직 기도로서만 무한하신 자와의 마음과 연락(連絡)되셨다 " 정로의 계단 174.175. 177.
이렇게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기도를 따라 하면 결국 우리는 이런 특권을 얻을 수 있다.
“기도는 예수님을 우리의 곁으로 오시게 하고, 낙심하고 고민하는 영혼들에게 세상과 육신의 정욕과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새 힘을 준다. 기도는 사단의 공격을 물리치게 한다. 사람이 그들의 눈을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돌려 예수를 바라볼 때에 그들의 품성에 신령한 변화가 생긴다.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화하게 한다. 그 다음에 그대가 할 일은 예수를 높이는 일이다. 마음의 눈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에게로 돌려라. 그리고 그대가 이 일에 종사할 때에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약 5:20)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실물교훈 250-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