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정이 2023년 2월 26일(가해) 사순 제1주일 제2648호 <유익한 심리학>
모세와 예레미야의 ‘자기개념’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신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신다. 여러 가지 표징을 보여주시며 모세를 안심시켜주시지만 모세는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탈출 4,10)라고 말한다. 유다 임금 아몬의 아들 요시야 시대에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을 때 그는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라고 말한다.
불안해하는 모세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형 아론을 붙여주시지만 실제로 숱한 난관을 돌파하고 지혜롭게 사명을 수행한 것은 모세였다.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 앞에서도 당당했고, 많은 백성이 불평하며 소란을 일으킬 때도 확신에 찬 말로 그들을 이끌었다. 어디에도 자신이 생각했던 말솜씨도 없고 어리숙한 모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예레미야 역시 사람들이 나를 받아주기나 하겠냐고 여기며 망설였으나 정작 현실에 부딪히자 예언자로서 자기 소명을 다해낸다. 모세와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참된 자아에 도달한다.
많은 이들이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을 때가 있는 것 같다. 물론 하느님 앞에서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겸손의 미덕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양 함부로 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다. 의미 있는 충만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넘치는 젊은이였다. 어려서부터 특별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하나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에 대하여 확고히 한 것은 광야에서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광야에서 40일을 보낸 예수님은 이전의 예수님과는 다른 모습이다. 교회는 이때를 공생활의 시작으로 본다. 어쩌면 예수님은 이때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느님의 아들’로서 ‘자기-SELF’를 만나지 않았을까?
우리는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자아감에 손상을 입기도 하고 과잉 자아감으로 현실에서 좌절하기도 한다. 이렇게 손상된 자아감 속에서, 많은 사람이 자기만의 특별하고 유능한 특성을 놓친다. 자기를 제대로 알고 만나기도 전에 자기에게 실망하고 좌절한 나머지 자기를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또는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등 갖가지 이유로 자신을 폄훼한다.
실제로 살아보면 잘 할 수 있는 일도 시작도 전에 두려워하고 잘 해내지 못할 거라고 미리 예단(豫斷)하여 실패와 실수를 자초하는 때도 있다. 그러면서 ‘거봐! 내가 하는 일이란 늘 이 모양 이 꼴이야!’ 하며 자기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합리화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존재, 하느님을 닮은 존재(창세 1,26 참조)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훌륭하고 유능한 존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산다.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하든, 자신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가 떠돌든 자신만의 가치를 잘 알고 산다면 우리도 모세와 예레미아처럼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기 가치를 깨닫는 것은 신앙에서도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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