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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32.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수 있게 된다."
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막4:30-34)
30 “What shall we say the Kingdom of God is like?” asked Jesus. “What parable shall we use to explain it? 31 It is like this. A man takes a mustard seed, the smallest seed in the world, and plants it in the ground. 32 After a while it grows up and becomes the biggest of all plants. It puts out such large branches that the birds come and make their nests in its shade.”
33 Jesus preached his message to the people, using many other parables like these; he told them as much as they could understand. 34 He would not speak to them without using parables, but when he was alone with his disciples, he would explain everything to them.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0 “What shall we say the Kingdom of God is like?” asked Jesus. “What parable shall we use to explain it?
농부가 씨를 뿌렸습니다.
그것이 길에, 돌밭에, 가시밭에, 옥토에 떨어졌습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을 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농사일을 가르치셨나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라면 황금 길이 있고 진주로 장식된 화려한 집과 천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농부가 농사하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 말씀을 다시 설명하신 것입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마13:11)
먼저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했습니다.
14. 씨를 뿌리는 사람이 뿌린 씨는 말씀을 가리킨다.(마13:14)
하나님의 나라란 은과 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깊은 관계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특별히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활동을 이릅니다.
말씀을 통해 사람 안에 일어나는 존재의 변화를 이릅니다.
금과 은이 없더라도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활동 여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뿌려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멘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입니다.
그 말씀이 100배로 번성하는 곳입니다.
외제 차를 굴리고 은금으로 덮인 호화 주택에 살면서 맨날 싸움판이라면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겠습니까?
거기는 지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머물러서 100배 결실을 내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도 마치 등불과 같습니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아래에나, 침상 밑에 두겠느냐? 등경 위에다가 두지 않겠느냐?(막4:21)
말씀이 없으면 누구라도 벽에다 머리를 박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도 헛다리 짚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높은 곳에 둡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세워질 수 있었다면 그것은 사람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27.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28. 땅은 열매를 저절로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의 알찬 낟알을 낸다.(막4:26-29)
농부는 씨뿌리고 잠을 잤는데 자는 사이에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설명해줘도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알아먹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결국 농부가 한 일은 씨뿌리고 그것을 거두는 일입니다.
씨앗이 성장해서 자라나게 하는 일에 비교하자면 씨 뿌리고 거두는 그 일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5.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했을 뿐입니다.
6.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7.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고전3:5-7)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신 후에 오늘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0 “What shall we say the Kingdom of God is like?” asked Jesus. “What parable shall we use to explain it?
이 말씀은 예수님의 혼잣말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필이 꽂히신 것입니다.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0 “What shall we say the Kingdom of God is like?” asked Jesus. “What parable shall we use to explain it?
첫째 예수님의 고민은 오직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는 일입니다.
둘째로 주님의 고민은 어떻게 설명해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알아먹을까?
그 전달 방식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차 타고 가다가 가로수에 들이박았습니다.
옆에 앉았던 아내가 심하게 다쳤지만 겨우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물놀이 하다가 아내가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경찰도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딸이 의심해서 신고했고 부검을 해 보니 남편이 살인한 것입니다.
그 남자는 아내의 억대의 생명 보험금을 챙겼던 것입니다.
이 일이 믿어지시나요?
며칠 전의 뉴스 내용입니다.
세상은 세상 나라를 챙기는 일에 제정신이 아닙니다.
부를 추구하는 사람은 생명을 적대하게 되어있습니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6:24)
이런 세상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최상의 가치입니다.
실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만이 유일의 가치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가 배타적이라고 공격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만큼 포용적인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죄인을 위해 의인이 죽는 십자가를 그 내용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적인 희생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를 배신하는 세상을 끌어안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세상 죄인을 살리기 위해 매 맞아 죽은 신을 섬기는 종교가 있습니까?
기독교만이 포용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만이 사람들에게 유일의 가치입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교훈으로부터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윤리의식이라는 것이 죽지도 않고 돌아가는 시계와 같습니다.
그것이 진리와 아주 비슷하게 돌아가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시간을 알려준 적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래 사는 것(壽) 돈 많은 것(富) 건강한 것(康寧) 남에게 덕을 쌓은 것(攸好德) 소임을 다하고 편히 죽는 것(考終命)을 오복이라고 합니다.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제자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누명을 씌울 때에 너희는 복이 있다.(눅6:20-22)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복이라고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복들을 나열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복을 추구할 것입니다.
우리 귀에 익숙한 복은 오래 사는 것인데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그것은 복의 축에도 못 끼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 많은 것을 복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첫째로 드신 복은 가난입니다.
소유는 많아도 되고 영혼만 가난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가난입니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것은 영육 간에 두 박자가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물론이고 영혼까지 가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굶주렸다는 것은 거지 나사로가 당했던 그런 물리적인 현실을 이릅니다.
우리는 세상의 정의와 말씀의 정의가 다르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은 정확히 성경적으로 재정의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복의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께 그것을 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하면 예수님께서는 난감하실 것입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진짜 복을 주셔야 할지 아니면 저들이 원하는 것을 주셔야 할지.......
사람들에게 이 박자가 제대로 맞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동안 쓰던 국어사전을 버리는 일입니다.
세상 국어사전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 국어사전을 택하는 일입니다.
단어의 정의가 이렇게 다르다 보니 세상 국어사전을 들고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할수록 오히려 불경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뒤죽박죽되어서 예수님도 그 사람의 기도를 알아먹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어렵지만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유일의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6:33)
북한을 전쟁으로 자극하는 정치인을 봅니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동조하는 목사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보다 이념이 우선입니다.
마르크스만 반대하면 된다고 여기는 자본주의 이념가들입니다.
기독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 사랑의 계명을 저들이 신봉하는 이념 아래 두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한다면 말씀의 사건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만 구해야 합니다.
생명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런데 이 나라를 죄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공원에서 “smoking free”라는 팻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 여기는 자유롭게 담배 피워도 되는 구역이구나 할지 모릅니다.
그 말은 완전히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곳은 담배 연기로부터 자유로운 구역이라는 뜻입니다.
담배 피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안식일에 치료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 행위라고 여겼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끙끙 앓게 놔두는 것이 경건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고는 자신이 의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해석은 안식일의 정신을 완전히 부인한 경우입니다.
주님은 그런 행위에 대해 진노하셨습니다.
그들은 경건을 내세우면서 막상 하나님의 나라를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공개적으로 그 사람을 치료하신 것입니다.
4.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5.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6.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막3:4-6)
하나님의 날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날입니다.
종교 계율을 지킴으로 제 의를 쌓는 날이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의 정신을 내다 버리고 계율을 강도짓의 도피처로 삼아 그 밑에 숨는 자들입니다.
이런 일이 예수님의 때 회당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백인들은 틀림없이 아마 자신들만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흑인을 제 노예로 삼아 짐승 이하의 취급을 했습니다.
그들의 범죄의 근거는 이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24. 노아는 술에서 깨어난 뒤에,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고서,
25.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장 천한 종이 되어서, 저의 형제들을 섬길 것이다."
26. 그는 또 말하였다. "셈의 주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셈은 가나안을 종으로 부릴 것이다.
27. 하나님이 야벳을 크게 일으키셔서, 셈의 장막에서 살게 하시고, 가나안은 종으로 삼아서, 셈을 섬기게 하실 것이다."(창9:24-27)
말씀에 대한 멋대로의 해석이 낳은 역사의 비극이었습니다.
이런 오해들은 대부분 경우 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수많은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들으세요!
사람에게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근거가 있습니다.
잘난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며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혼란을 질서로 바꾸었지만 인간의 말은 혼란을 만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말하려고 하지 말고 그의 말씀을 들으세요.
1.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2. 하나님 앞에서 말을 꺼낼 때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말아라. 마음을 조급하게 가져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으니, 말을 많이 하지 않도록 하여라.(전5:1,2)
우리는 그 분의 말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할 일은 선생님께 ㄱ ㄴ ㄷ....... 일방적으로 배우는 일입니다.
그 아이가 나중에 탁월한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될 천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서울을 가는데 네비게이션과 토의를 합니까?
“부산 쪽으로 빠지면 안 되나?
지루한데.......”
일방적으로 네비게이션의 지시를 듣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31.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31 It is like this. A man takes a mustard seed, the smallest seed in the world, and plants it in the ground.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 보기에 보잘것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씨앗이 길가에 돌 위에 가시밭에 떨어져서는 수확이 없다고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같은 내용을 기계적으로 다시 반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씨앗이 어디에 뿌려져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겨자씨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여지는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 눈에 아주 하찮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같은 집을 두고 전에는 정면도를 이제를 평면도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표현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주님은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2. 주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거느린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내가 미디안 사람들을 네가 거느린 군대의 손에 넘겨 주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제쳐놓고서, 제가 힘이 세어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된다.(삿7:2)
전쟁을 앞두고 군인의 수가 너무 적다 더 모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앞둔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거꾸로 말씀하셨습니다.
군인의 수가 너무 많다.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
그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인간사에 가장 비극은 전쟁일 것입니다.
그것에 지는 날 지옥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731 부대가 도마다 하나씩 서서 여러분을 잡아다가 생체 실험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어린 딸들은 위안부로 잡아갈 것입니다.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만 합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틀림없이 승리가 보장되는 행위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질 것이 빤한데 남이 하라고 해서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전쟁 때만큼은 제가 정말로 믿는대로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군대가 너무 많다.
그들을 돌려보내라!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돼서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따른 것입니다.
그 양(量)이 우상이다.
군인의 수를 믿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라!
또 탱크가 아닌 항아리를 들고 전쟁터로 가라!
그 질(質)이 우상이다.
16. 그는 삼백 명을 세 부대로 나누고, 각 사람에게 나팔과 빈 항아리를 손에 들려 주었다. 빈 항아리 속에는 횃불을 감추었다.(삿7:16)
하나님의 전쟁은 우상들이 깨어져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
기드온은 군인 300명만 남겼습니다.
탱크 대신에 항아리를 들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렇게 전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기드온은 삼백 명이었는데 이번에는 한 명입니다.
기드온은 용기 있는 군인들이었는데 다윗은 어린 소년 혼자였습니다.
그렇게 골리앗 앞에 어린 소년이 나타나자 골리앗은 그 꼴을 보고 웃었습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골리앗의 교만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상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도 모조리 골리앗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떨면서 어쩌자고 사울 왕은 저런 어린아이를 골리앗 앞에 세우나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
나야 무서워서 그 앞에 못 가지만.......
42. 그 블레셋 사람은 다윗을 쳐다보고 나서, 그가 다만 잘생긴 홍안 소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우습게 여겼다.
43. 그 블레셋 사람은 다윗에게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로 나아오다니, 네가 나를 개로 여기는 것이냐?" 하고 묻고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삼상17:42,43)
거인 골리앗이 보니 한 어린 소년이 우스웠고 그의 손에 들린 막대기와 돌멩이가 우스웠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골리앗이 우스웠습니다.
거대한 몸짓이 우스웠고 무기로 뒤집어쓴 골리앗이 우스워 보였습니다.
저것이 죽고 싶나?
하나님께 덤벼들다니!
예수님께서는 바로 세상이 비웃는 그 방식으로 원수를 싸워 이기신 것입니다.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4년 전 저는 시골에 빈집이라도 있나 보러 구례를 찾았습니다.
제가 그럴 처지였습니다.
그 때 지금 우리 달내 교회가 팔려가서 카페가 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교회 땅은 남의 땅에 둘러싸인 맹지고 땅은 미등록에 교회 건물은 불법 건물입니다.
당시에는 교회 의자도 강대상도 없었습니다.
교회문은 자물쇠로 채워져 들어가서 예배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손에 들린 것은 다윗의 작대기와 돌멩이뿐이었습니다.
지금 그것들이 문제가 됩니까?
아닙니다.
다만 골리앗을 쓰러뜨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우리의 작은 것이 문제가 됩니까?
아닙니다.
반대로 큰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32.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수 있게 된다."
32 After a while it grows up and becomes the biggest of all plants. It puts out such large branches that the birds come and make their nests in its shade.”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의 씨앗을 우리 마음 밭에 뿌리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말씀을 뿌리는 일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탈북자 오 은정님의 시입니다.
종자
심을 것인가
먹을 것인가
봄이면 찾아오는 유혹
남한은 쌀로 막걸리는 만들 때 북한은 식량이 없어서 백만 혹은 삼백만이 굶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먹을 것 때문에 중국 공산당 베트남 미안마 태국의 국경은 넘어온 소녀의 고백입니다.
그 녀의 봄날이었습니다.
당장 죽 끓여 먹을 수 있는 종자를 손에 한 움큼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밭 가운데 서 있었을 피골이 상접 한 어린 소녀의 모습.......
이것을 땅에 뿌려 놓고 내일 굶어 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를 듣고 눈물이 왈칵하지 않았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당장 가난이 오히려 복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심을 수 있는가?
그것은 상식을 역행하는 일입니다.
엄청난 위기를 이릅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섰습니다.
겁나는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말씀이 다윗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그 말씀이 옥토에 떨어질 수 있는가?
사람들은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왕도 그를 무장시킨 것입니다.
최소한의 상식을 적용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 상식을 벗어버렸습니다.
38. 사울은 자기의 군장비로 다윗을 무장시켜 주었다. 머리에는 놋투구를 씌워 주고, 몸에는 갑옷을 입혀 주었다.
39. 다윗은, 허리에 사울의 칼까지 차고, 시험삼아 몇 걸음 걸어 본 다음에, 사울에게 "이런 무장에는 제가 익숙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무장을 한 채로는 걸어갈 수도 없습니다" 하고는 그것을 다 벗었다. 그렇게 무장을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삼상17:38,39)
다윗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45. 그러자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에게 말하였다.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삼상17:45)
그러니까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은 세상의 국어사전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 당장에 많이 가진 것. 당장에 남보다 높은 것.
그 가운데 다윗만큼은 하나님 나라의 국어사전을 쓴 것입니다.
복: 가난한 것. 굶주린 것. 애통하는 것.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장되는 것.
다윗만 그 정의에 동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골리앗은 집채만한 창을 들고 있었는데 다윗은 길가에서 작대기를 줍고 돌멩이를 주워서 챙긴 것입니다.
그리고 골리앗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골리앗의 눈에는 자신의 승리는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눈에도 자신의 승리가 정해진 싸움이었습니다.
골리앗의 눈에 다윗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다윗의 눈에도 골리앗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서로 설득시킬 수 없는 가치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서로 생명을 걸고!
신앙이란 전혀 다른 가치를 이르는 것입니다.
제 설교에 코웃음 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전이 옳았습니다.
바울도 이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30. 꼭 자랑을 해야 하면, 나는 내 약점들을 자랑하겠습니다.(고후11:30)
바울이 처음에만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바울의 삶을 두고 초지일관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믿음은 처음에 겨자씨처럼 작은 것이었지만 시간을 두고 성장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33 Jesus preached his message to the people, using many other parables like these; he told them as much as they could understand.
이것은 패배자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4. 블레셋 진에서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싸움을 걸려고 나섰다. 그는 키가 여섯 규빗 하고도 한 뼘이나 더 되었다.
5. 머리에는 놋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는데, 그 갑옷의 무게는 놋 오천 세겔이나 되었다.
6.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각반을 차고, 어깨에는 놋으로 만든 창을 메고 있었다.
7. 그의 창자루는 베틀의 용두머리만큼 굵었고, 그 창날의 무게는 쇠 육백 세겔이나 되었다. 그의 앞에서는 방패를 든 사람이 걸어 나왔다.(삼상17:4-7)
이것은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40. 그런 다음에, 다윗은 목동의 지팡이를 들고, 시냇가에서 돌 다섯 개를 골라서, 자기가 메고 다니던 목동의 도구인 주머니에 집어 넣은 다음, 자기가 쓰던 무릿매를 손에 들고, 그 블레셋 사람에게 가까이 나아갔다.(삼상17:40)
여러분의 눈에 누가 승리자의 모습으로 보입니까?
K9 자주포와 고무줄 새총 중에 누가 이길까요?
성경은 지금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수용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승리자의 모습으로 골리앗에 대해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을 승리자로 소개하기 위해서는 많은 설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 그가 승리자의 모습인가?
이것을 주님은 어디까지 설명하셨나요?
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33 he told them as much as they could understand.
도대체 고무줄 새총이 어떻게 K9 자주포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은 알아먹을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두고 알아먹지 못할 세상 죄인들에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알아먹을 때까지!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33.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33 Jesus preached his message to the people, using many other parables like these;
주님께서 수많은 비유를 들어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계속 설명하셔야 했습니다.
복이 무어냐고 물으면 세상 부자되는 것이라고 즉시 고백하는 사람들을 상대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종로에 있는 금은방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을 상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설명을 하시는 일에 참으로 신실하셨습니다.
주님은 소재를 바꾸어가면서 그 나라를 설명하실 것입니다.
집 지을 때 정면도 측면도 평면도가 다 있어야 합니다.
평면도만 가지고는 그 집의 높이를 알 수 없습니다.
정면도만 있어도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인 씨앗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먼저 길 위 돌밭 가시밭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가라지씨로 겨자씨로 호박씨로 수박씨로 참외씨로 이 씨 저 씨를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25.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마13:24,25)
31.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마13:31)
33.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올랐다."(마13:33)
44. "하늘 나라는 마치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면서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46.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47.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마13:44-47)
우리는 봉사가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배우는 중입니다.
하지만 다리를 만지고 코끼리는 기둥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큰 배를 만져보고 코끼리는 틀림없이 벽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부흥사들이 수두룩합니다.
코를 만져보고 코끼리는 틀림없이 큰 고무호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광화문에 가면 만날 수있습니다.
태극기 들고 뛰어다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호박씨 비유 겨자씨 비유 오이씨 비유........를 다 들은 다음에 종합해서 그 나라를 제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우주 공간 멀리 있고 보석이 즐비하고 금으로 포장된 건축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란 결국 물리적으로 확인되지 않으며 정의되기 어려운 하나님 말씀의 역사를 이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의 활동을 통해 일어나는 사람의 존재 변화를 이릅니다.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34 He would not speak to them without using parables, but when he was alone with his disciples, he would explain everything to them.
본래 사람들은 에덴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들은 에덴에서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그 나라와 경계를 만드신 것입니다.
23.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24.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23,24)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에덴의 동쪽에서 에덴을 읽어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나라 밖에서 그 나라를 설명하게 된 것입니다.
비유가 아니면 그 나라를 말씀하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그와 가까운 자들에게만 그 비유의 비밀을 알리신 것입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12.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이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막4:11,12)
들었다고 자신이 깨달은 줄 아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보았다고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자신만이 안다며 강대상에서 이 자식 저 자식 음담패설을 쓰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따위들에게 쓸려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용한 부흥사니 강사니
주님은 비유를 사용하셨고 바깥 사람들이 아닌 주님과 함께했던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비밀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주님과 가까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치 비유라는 트릭을 사용하시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유를 잘 이해하는 지능 높은 사람들에게 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가까운 사람에게 그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떠나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 바깥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가까이에서 그 분과 대화를 나누는 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따로 설명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앞에 성경을 펴시고 주님과 따로 시간을 가지셔야 합니다.
34.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34 when he was alone with his disciples, he would explain everything to them.
실은 많은 목회자가 고민하는 것은 여러분이 따로 있을 시간을 빼앗아 교회 프로그램으로 돌려버리려는 것입니다.
정신을 홀딱 빼놓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정신을 차리고 예수님과 따로 있으셔야 합니다.
동시에 주님은 주님과 따로 만난 제자를 정하셨던 것입니다.
이 비유의 비밀을 제자들에게만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유의 수수께끼를 알아듣기 위해 그 특별한 제자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 수수께끼를 아는 것은 제자들에게조차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 때도 그런 이유로 다메섹 언덕을 올라가던 길이었습니다.
그가 그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앞장서서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된 줄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바울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11.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곧은 길'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행9:11)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하나님의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를 주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의 백부장을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베드로와 만나게 하셨습니다.
4. 고넬료가 천사를 주시하여 보고, 두려워서 "천사님,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천사가 대답하였다. "네 기도와 자선 행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신다.
5. 이제 욥바로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이라는 사람을 데려오너라.
6. 그는 무두장이인 시몬의 집에 묵고 있는데, 그 집은 바닷가에 있다."(행10:4-6)
주님은 이방인과 베드로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 프로그램을 따라서 세미나 참여하고 행사 참여하고 그것만이 아닙니다.
성경을 펴시고 주님을 따로 만나야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따로 배운 제자들과의 교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수께끼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관계는 신앙의 건전성을 유지시켜 줄 것입니다.
사이비한 해석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관계가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고 해서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마10:40-42)
신앙은 관계의 문제입니다.
제자들과 신도들 사이에 신뢰의 관계가 깨졌다면 큰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전달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상호 간에 신뢰는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