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전환적 표현의 경계 찾기
-임경희의 《치야인형》에 부쳐서
1. 들어가기
수필은 작가의 경험을 밑거름으로 하여 창작한다. 작가가 체험한 일상 속에서 의미 부여가 가능한 것을 찾아 해석하고 본질을 찾아 주제도 설정하여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때 가장 유념할 것은 체험 자체가 글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작가가 경험한 바를 줄글로 내리 적어 놓고, 그것이 수필이라 한다면 엉터리도 보통 엉터리가 아니다.
작가가 체험한 일상에서 선택한 것을 문학적 글감으로 바꾸는 일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다음 글감이 갖는 의미를 찾아내서 작가만의 것으로 만들어 특허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특허에는 다른 사람이 이미 언급하지 않은 나만의 것이어야 가능하다. 륭내를 내서는 안 된다.
문학은 정신적 작용으로 이루어지기에 반드시 글감에 대한 해석이 없이는 집핍할 수 없다. 이 과정을 무시하고 바로 경험만을 기술해 나간다면 현상의 기록에 머물게 된다. 문학은 현상의 기록이 아니고, 본질의 기록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수필은 태생적으로 있었던 이야기만 해야 하고, 허구가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 허구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믿기에 수필은 비전환적 표현을 추구한다. 정시적 작용을 요구하면서도 허구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이다. 하지만 수필은 그래야 한다. 즉, 허구는 물리치고, 상상만 허락한다는 점이다.
2. 비전환적 표현의 경계
수필 문단에서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만큼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학자에 따라서 주장하는 바가 다르기에 성급하게 어느 한쪽에 붙어서 목소리를 키울 수도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우리 수필가들도 둘로 생각이 갈라져 있는 게 사실이다. 나름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간다면 나름 보기에도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임경희 수필가는 허구를 용납하지 않는 진솔한 길을 선택하고 있다. 사실에 근거하고 거기에 조금 허구를 가미하여 문학적 효과를 거둘 수도 있는데, 한 발도 내딛지 않고 있다.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나 된 듯 철저히 지키고 있다. 어느 글에서도 허구가 등장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원래 수필은 비전환적 표현이라는 태생적 특성에 충실히 의존하여 글을 쓰고 있다.
마음이 좀 가라앉았나 보다. 어쩜 이리도 둥글둥글 예쁠까. 크고 작은 돌이 포개고 포개어 서로를 토닥토닥 안아주는 것 같다. 모난 것 없이 매끈매끈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깎이고 깎이며 닳고 닳아 둥글납작해졌을까. 한 덩어리였던 큰 돌이 파도에 쓸려 부딪히면서 깨지고 또 깨져 지금의 모양을 갖추었을 터. 처음부터 둥글둥글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난 돌 조각과 조각이 서로 부딪히면서 크고 작은 생채기를 내며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중에도 서로 안아주고 쓸어주며 상처를 치유했겠지. -<몽돌>에서
바닷가 몽돌밭에 가면 수많은 몽돌이 서로 둥근 얼굴을 비비며 웃고 있다. 저 돌이 지금은 동글동글하지만, 예전에도 그랬을까. 커다란 바윗돌이 서로 부딪히며 깨지고, 부서질 때마다 모서리의 날카로움이 날아간다. 파도에 밀려 지속해서 부딪히면 언젠가는 모난 곳은 모두 사라지고 둥근 외형을 갖추게 된다. 이것은 허구가 아니고 실지 그렇게 변하게 된다.
본래 수필은 작가가 찾아낸 본질에 의미를 부여하여 형상화하는 문학이다. 작가는 몽돌이 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삶을 찾아낸다. 몽돌의 갈고 닦음과 사람의 갈고 닦음은 전혀 다르지 않다. 모난 성격도 세상살이하며 유순해지고 세상을 부드럽게 인식하는 사람으로 바뀐다. 인간의 되어감을 자연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작가는 모난 돌이 몽돌이 되기까지 서로 부딪히며 생채기를 낼 때마다 전율한 아픔을 기억한다. 그리고 서로 안아주며 보듬었을 몽돌의 관계 설정을 떠올린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기에 공깃돌 놀이를 하면서 손등에 남은 몽돌로 자신의 생명을 점친다. 욕심이 발하여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손등의 몽돌을 자기 생명에 보탠다. 백 알이 넘는 몽돌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다. 좀 전까지 ‘뭐 하러 사나?’ 하며 신세 한탄을 했는데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게 인간인가 보다.
이 작품들이 그냥 생긴 건 아니다. 그동안 얼마나 바늘에 찔려 피를 흘렸는지 모른다. 붉은 피가 하얀 천에 뚝뚝 떨어질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잠시였다. 볼품없는 천에 불과했던 조각조각들이 나의 손을 거쳐 여러 가지 작품으로 탄생할 때의 기쁨은 손에 난 생채기의 아픔을 충분히 감싸주고도 남았다. 첫 작품에서 오늘 만든 작품까지 차례로 배치를 해 본다. 갈수록 태가 나고 맵시도 좋아 보인다. 해냈다는 자신감이 나를 미소 짓게 만든다.
딸도 나도 새로운 도전을 위해 서툰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다. 언젠가는 씽씽 달릴 그 날이 멀지 않았음을 생각하며 오늘도 딸은 연필로 쓱쓱 문제를 풀고, 나는 재봉틀로 드르륵 드르륵 작품의 모양새를 잡아간다. -<걸음마> 마무리 부분에서
조각만 따로 떨어져 있으면 무엇 하나 쓰임이 없다. 각각의 조각들이 제 위치에 연결되어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진다.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인내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퀼트. 천 조각 하나라도 규칙과 질서에 어긋나면 작품이 되지 않는다.
-<퀼트>에서
앞의 글 <걸음마>는 겁이 많고 소심했던 딸아이가 갖은 노력 끝에 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대학원에까지 진학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홈패션에 도전한 이야기다. 전혀 재봉틀을 만져보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하여 하나씩 익혀가는 과정이 눈에 보듯 그려져 있다. 세상 어느 일이 어렵지 않은 게 있으랴. 바늘에 찔리기도 하고, 재봉한 실선이 제 맘대로일 때 느껴야 했던 불안감도 있다. 무슨 일이든 과정의 고통이 없을 수 없고, 그 고통의 정도가 심할수록 기쁨은 크다는 것을 독자에게 내보인다.
다음 글 <퀼트>는 조각난 천을 바늘로 기워 작품을 만드는 모습을 잘 그려줬다. 제각기 따로일 때는 아주 쓸모없던 것도 함께 어우러지면 소중한 물건이 된다. 이 작업을 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주 긴 시간을 두고 바느질에 전념해야 하고, 집중력도 있어야 한다. 퀼트의 작업을 하며 체험한 것을 그대로 글감으로 사용하고 있다. 허구가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제자리에 가 있을 때 그 가치가 있다. 엉뚱한 곳에 혼자 있을 때는 소용 없는 것도 하나의 구조 속에서 위치를 확보하면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 자리를 찾기 위해 인간들은 무수한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아무리 혹독한 고통이 밀려와도 좌절하지 않고 인내와 끈기로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정해진 순서를 따라야 하고 그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와 규칙을 철저히 지켜나갈 때만 가능하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각자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 삶을 위해 인간들은 세심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누구에게나 다 똑같은 것이 아닌 나만의 자리를 찾아 자신의 적합도도 가늠해 본다. 만약 잘못된 자리라면 한시바삐 제자리로 돌아오는 노력도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처한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는다.
역시 작가는 글감에서 얻은 의미에 허구를 끌어들이지 않고 비전환적 표현에 몰두한다.
3. 가족, 그 울타리
작가 임경희는 생활인이다. 가정을 가지고 살고 있고, 생업을 위해 학원도 운영하고 있다. 철저한 생활인이다. 밖으로 활동을 하다 보면 가정에 소홀하기 마련이지만, 작가 임경희는 그렇지 않다. 어느 구석에든 구멍이 뚫리지 않는다. 그러나 가슴에 박힌 사연은 그의 행동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어머니의 모습은 흡사 누에의 형상이었다. 머리칼이 다 타버려 흉했다. 거기다가 흰 약을 발라놓으니 영판 누에 같았다. 끔찍해서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오랜 기간 동안 화상 치료를 받았다. 살이 차 오르기까지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징그럽고 험악해서 얼굴을 돌리기도 수차례였다. 몇 번이나 변하는 어머니의 등은 누에가 한잠자고 또 다른 단계의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 허물을 벗는 듯했다. 본래의 매끈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등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니 그때서야 어머니가 목숨을 건졌다는 게 얼마나 천만다행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날씨가 궂은 날은 고통이었다. 등이 쓰리고 가려워서 몹시 괴로워했다. 상처가 아물어도 벅벅 긁는 일은 일상사였다. 안쓰러움에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등을 긁어드렸고, 어머니는 연신 팔 아프다며 그만 두게 했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시원해 하시던지. -<허물벗기>에서
작가의 모친은 농촌에서 누에를 치셨다. 그러던 중 집에 불이 나서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 어머니의 등을 볼 때마다 작가는 누에를 떠올린다. 화재 직후 어머니는 심한 화상으로 목욕탕에 가기도 꺼리셨다. 당신의 그 험한 흉터를 남들에게 보이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화재 사고로 흉직했던 상처를 치료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상처를 이따금 보게 될 때마다 작가는 고개를 돌린다. 차마 바라볼 수 없다. 어머니 등의 상흔은 영락없는 누에였다. 다섯 번 잠을 잘 때마다 허물을 벗는 누에처럼 어머니의 상처는 살갗이 벗겨졌다.
누에는 다섯 번 잠을 자고 허물을 벗을 때마다 몸뚱이가 자란다. 허물 벗는 아픔을 견뎌내야 비로소 비단을 짤 수 있는 명주실을 뽑아 고치를 만든다. 고치를 다 만들고 나면 다음 세대를 위하여 깊은 잠에 든다.
어머니의 등은 궂은날을 정확히 안다. 쓰리고 가려워서 견디기가 힘들다. 상처가 아물었어도 긁지 않을 수가 없다. 안쓰러움에 자식들이 긁어드리면 ‘팔 아픈데 그만하라’신다.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 밀려와도 자식 걱정이 먼저이고, 정작 당신을 위해서는 배려하지 않으시는 어머니. 작가는 누에에서 어머니의 삶을 읽고 있다. 모든 고통을 참으면서 오롯이 고운 비단을 뽑아내는 누에처럼 어머니 역시 견디기 어려운 아픔 속에서도 참고 자식만을 키우셨다.
과한 영양으로 힘들어하는 제라늄을 볼 때 아이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싫어하는 것을 과하게 시키니 하라는 것은 안 하고 다른 곳에서 방황하는 아이. 역효과만 나고 돈만 낭비한 것 같다. 아이의 성향에 맞추어 좋아하는 운동을 시키고 재촉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아이는 더 나은 성장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가 밀려든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시키기에는 환경이 따라주지 못하였고, 또 큰 아이가 있어서 작은 아이에게 몰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지나치게 강요하고 구속하지 않았는지 꽃을 보면서 반성을 해 본다. -<삽수>에서
흔히 과잉보호는 아니 함만도 못하다고 한다. 차라리 제 홀로 성장하게 두었더라면 독립심이라도 길러 제대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육아와 교육에 대한 후회를 적은 글이다. 아들을 결혼시키며 그동안 어미로서의 회한을 적었다.
이런 작가의 회한을 제라늄에 빗대었다. 제라늄을 키우다 보니, 지나치게 과잉보호하여 병이 들었다. 지나친 정성이 한 목숨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기온에 맞추고 날씨를 유념하여 거름도 주고 물도 공급해야 하는데 너무 자주 제공했다. 열대성 식물인 제라늄에 수분을 과잉 공급하였으니 목숨을 앗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아들을 결혼시키며 갖는 어머니로서의 회한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작가 임경희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꾸밈없이 그렸다. 늘 가슴 안에는 가족이 똬리를 틀고 있다.
4. 자연, 내가 살 둥지가 있는
작가 임경희는 그 흔한 아파트 주민이 아니다. 전원에 집을 짓고, 바다의 풍광을 즐기며 자연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 까닭에 늘 친자연적이다. 한순간 짐승들의 귀찮은 행동에 짜증을 부리다가도 종내에는 마음을 바꾸고 그들과 공존의 길을 선택한다.
오래전 이곳은 짐승들의 터전이었다. 전원마을이라는 이름을 걸고 개발이 시작되기 전까지 전망 좋은 곳이라는 명목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그 바람에 짐승들은 터전을 잃고 쫓겨났다. 그럼에도 원래부터 내 땅이야 하며 물 마시러 오고 배고파 먹을거리를 찾아 날아드는 그들을 무작정 쫓아내기만 했다. 그동안 까마귀의 행동은 내 터전이고 내 집이니 돌려달라며 항변한 것은 아니었을까. 갑자기 미안해진다. 먹을 것이 많은데 어지럽힌다고 목소리를 높인 내가 진정 적반하장이었나 싶다. 이젠 까마귀에게도 한 곳을 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까마귀>에서
우람한 체구에 검은 털 색, 그리고 날카로운 울음은 절로 섬뜩하게 느껴진다. 그 소리가 음울한 빛을 띠고 야릇하게 출렁이면 공포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면서도 인가 근처에 기거하며, 사람들이 버린 음식물을 주로 취하니 생활권은 언제나 공유하는 셈이다. 참새처럼 날아든 듯 사라지면 모르겠으되 덩치도 있어 자주 눈에 밟히는 까마귀.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는 인식은 흉조인데, 작가의 인식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일을 접하게 된다. 연일 인간답지 못한 사건에 가슴이 아렸던 작가는 제 동료의 주검을 지키고 있는 까마귀를 보면서 인간임을 부끄러워한다. 묻지 마 범죄, 남 탓 일색인 인간,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해야 하는 세상을 사는 작가는 까마귀에게 송구할 뿐이다.
내가 사는 여기는 원래는 짐승들의 삶터였다. 인간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전원주택을 짓지만, 실은 그들의 보금자리를 앗아버린 꼴이다. 까마귀가 전원마을을 찾아드는 것은 제 삶터에 오는 것이니, 인간이 내몰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자연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자연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인간이 소유할 일도 아니라는 관점이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결국 한 곳을 내어주자는 주장이다.
천연 염색은 대체적으로 색이 은은한 것 같다. 그래서 천연염색이 내는 빛깔은 튀지도 않고 수수해서 오래도록 싫증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이며 곱게 늙은 사람을 보면 친근감이 든다. 정겹다. 그런데 세월을 거스르며 온갖 치장을 하고 주름살을 펴려 성형한 흔적이 보이면 왜인지 자연스럽지가 않다. 처음엔 눈에 확 들어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색하다. -<자연이 부르는 소리>에서
천연염색을 시도한다. 처음 배우는 것이다. 이론과 실제를 터득해 가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강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많은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모든 것은 원 바탕이 깨끗해야 하고 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염색에서도 천을 깨끗하게 해야 모든 물이 예쁘게 들기에 정련에 힘쓴다. 부피가 작고 가벼운 견직물은 정련이 수월하나, 면직물은 시간이 많이 소용되고 정성과 노력이 많이 요구된다.
광목을 정련하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동원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작업에는 많은 표백제가 사용되기 때문에 고약한 세제 냄새와 화학약품 냄새도 견뎌내야 함을 경험한다. 그리고 지금껏 이런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이렇듯 자연 속에서 순리에 따라 얻어지는 색은 부드럽고 편안한데 억지로 힘을 가해 얻어지는 결과는 무리가 따름도 터득한다. 무리하게 얼굴에 칼을 대어 고치거나 순리를 거스르며 욕심을 부리면 화를 피할 수 없음에 귀가 열린다. 자연의 소리가 귀로 다가선다.
5. 생활인의 흔들리지 않는 궤적
생활인 임경희 수필가는 아주 평범한 주부이다. 작가라 하여 티를 내는 법이 없다. 난 체하거나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들고 나는 사람이 아니다. 보통 주부나 다름없이 가정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예민하지는 않다. 다른 주부와 같이 하루 세끼면 만족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살기를 가계부에 기록하며 가정의 안정과 편안을 꿈꾼다. 그러기에 시아버지의 낡은 가계부에 의미를 부친다.
그런데 점점 남편에게서 아버님의 모습이 보이니 참 아이러니다. 살림살이에 참견 한번 없던 사람이 자꾸 잔소리를 한다. 부엌에 와서 하는 잔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을 판이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제 때에 못 먹으면 버린다느니, 잔소리는 극에 달한다. 이러쿵저러쿵 일일이 따져 물으니 부아가 난다. 나도 잘못했음은 인정한다. 나이를 먹으니 일에 지쳐 손을 못 쓸 때가 있어 버려지는 것도 제법 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눈 감아 줄 만도 한데 지나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버님 아들이 확실한 것 같다. -<낡은 가계부>에서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방을 정리한다. 어디 하나 흐트러진 곳이 없이 철저하게 정돈되어 있는 책꽂이에서 낡은 가계부를 발견한다. 펼쳐보니 힘주어 쓴 시아버님의 글씨체가 정겹다. 그리고 원 단위까지 정확하게 적은 기록을 보면서 시아버님을 추억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은 가계부, 근검절약하셨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흔여섯이 되도록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사신 분. 그분 아래서 성장한 남편은 지나친 간섭과 절약이 불만이었고, 야박한 아버지를 절대로 닮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아버지의 흉내를 내는 듯이 보이니, 딱하기 그지없다. 수돗물 절약, 전기 절약…, 작은 일에서부터 잔소리이니 작가의 불만이 터진다.
겉으로는 불만이라 했지만, 글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버님에 대한 신뢰이고, 남편에 대한 신뢰이다. 그러기에 작가는 ‘아버님의 낡은 가계부가 새것으로 바뀌어 남편에게로 쭉 이어가면 참 좋겠다.’고 고백한다.
아버지에겐 천천히 걷는 것도 사치였는지 모른다. 힘든 삶을 잘 살아온 아버지였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때론 강하게 때론 여린 아버지의 속내를 알게 된 것은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였다.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우리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비례했다. 자식 키우는 일이 어디 예사인가. 얼마나 힘들고 애가 타는지 절절이 느끼면서 더해갔다. 아버진 부드러운 분이 아니었다. 약속한 일은 철저하게 이행하셨고, 만약 누구든지 어기면 엄한 벌이 내려졌다. 비록 엄하셨지만, 속마음은 아니었다. 세심하게 챙기며 두루 살피는 분이셨다. 잘못엔 가차 없어도 잠든 뒤에 비로소 쓰린 상처를 어루만지며 마음 아파하셨다. -<새벽을 여는 사람들>에서
작가에게 있어서 ‘새벽’은 특별한 시간이다. 수필집 여기저기에서 만나는 ‘새벽’은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이다. 새벽을 달리는 사람의 등은 우람하게 보인다. 작가 역시 그 대열에 끼기를 소망한다.
이른 아침 대문 앞에 나왔다가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과 마주친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힘겹게 신문을 돌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측은지심에 빠진다. 그리고 이내 한 소년을 소환한다. 작가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중학생 때 상경하여 고학했다. 객지에서 일하며 학교에 다니기는 쉬운 게 아니었다. 학비를 벌어야 했고, 끼니마저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새벽부터 시작한 하루의 일과는 늦은 밤 전철 안에서 끌어안은 신문을 모두 팔아야 끝이 났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짬만 되면 중국집 배달까지 하였다.
작가는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한평생 자식들에게 강인했던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아버지를 닮고 있는 자신이기에 작가는 지금도 그의 삶을 존경한다. 겉으로는 강한 척해도 안으로는 여리기 그지없었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피가 내 몸에 흐르고 있음에 자랑스럽다. 근검절약이 몸에 짙게 배어 있던 아버지를 추억하며 감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6. 삶, 끝없는 성찰
하루는 너무 더러워 세탁기에 빤 적이 있었다. 아이는 놀다가 지쳤는지 잠을 자려고 ‘치야 인형’을 찾았다. 못 본 척하며 동태를 살폈더니 온 집안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결국 찾지 못하자 아이는 막무가내로 울음을 터트렸고 펄쩍펄쩍 뛰며 안절부절 못했다.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서둘러 탈수를 했다. 수건으로 인형을 말아 밟고, 선풍기에 말리고, 또 다리미로 다리고 하여 안겨주었다. 아직 덜 말라 축축했지만, 아이는 기어코 눅눅한 인형을 안고서야 잠이 들었다.
‘치야 인형’이 나의 바쁜 손을 움켜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리고 나의 바꾸기 작업에 항변한다. 편리함과 깨끗함만을 원해 이것저것 다 갈아 치우는 내 행동에 차단기를 내리려 한다. 버려지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끌려나온 것들의 앞에 서서 내게 궐기하고 있는 것이다.
- 새것만 찾지 말아요. 깊은 정이 든 것들인데……. -<치야 인형>에서
집안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침대 커버를 바꾸고, 밝아진 분위기에 설복되어 커튼과 벽지마저 교체하기로 한다. 도배를 위해 살림살이도 끄집어내고, 장롱 속의 불필요한 물건도 정리하게 된다. 처음에야 침대 커버 하나였지만, 일이 커져 집안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게 된다. 장롱을 정리하다 보니, 큰아이가 가지고 놀던 ‘치야 인형’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큰아이가 어렸을 때 이 인형에 의지해 잠을 잔 기억이 소환된다. 맞벌이하다 보니 아이는 낮 동안 엄마와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엄마 없는 시간을 이 인형에 의지해 견디다 보니, 손에서 전혀 놓으려 하질 않아 세탁도 할 수 없다. 그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 인형을 다시 버리지 못한다.
그러면서 편리와 깨끗함만을 추구해 묵은 물건을 버리려던 작가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깊은 정이 쌓인 지난 인연을 되살린다. 결국 작가는 간밤에 내다 버린 물건들을 다시 끌어들인다.
어쩌면 이 글은 인간들의 편리만을 추구하는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글 같다. 그래도 그동안의 정을 기억해 달라는 울림이 잔잔히 밀물져 온다.
참고 견딘 이십 년 세월, 차분히 생각해 본다.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 밀려오는 고통을 인내하는 힘은 결코 그 시절의 훈련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지금 생각하니 진정으로 나를 지탱해 주는 큰 힘의 원천인 것이다.
코치 선생님 생각이 난다. 어쩌면 퇴직을 하고 손자를 돌보고 계실지도 모른다. 만나보고 싶다. 따뜻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실 것 같다. 나 또한 흘겨보던 눈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정말 반가운 마음에 덥석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 -<마음 열기>에서
작가는 학창 시절 탁구 선수였다. 매일 반복되는 혹독한 훈련으로 몸은 파김치가 되었고, 강인한 체력을 위한 코치의 담금질은 지독한 육체적 고통으로 이어졌으며, 나약함을 보일 때에는 살벌한 체벌이 가해졌다.
그때마다 작가는 탁구가 싫어졌고, 코치에게 불만이 쌓여갔다. 더러는 운동에서의 탈출을 위해 뒷동산으로 도망도 쳤다. 궁둥이의 피멍으로 어머니가 항의하여 전학까지 시도하였으나, 그것마저 막겠다는 학교의 으름장으로 주저앉았다. 어쩔 수 없이 탁구 훈련을 지속해야만 하는 괴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결혼 후 학원을 경영하면서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세상의 어느 일이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겠는가. 난관에 맞닥뜨릴 때마다 그 순간순간을 이겨내며 고비를 넘겼다.
지금에 와서 생각한다. 그 많은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탁구를 하면서 나약했던 마음이 굳어진 덕이라고. 그토록 원망의 대상이었던 코치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되었다는 사연이다. 그래서 지금은 만나면 반가운 마음으로 덥석 손을 맞잡을 수 있겠다는 소회를 적었다.
7. 일상 속에서 발칙하게 본질 찾기
지인에게 전할 선물은 울퉁불퉁하고 못난 귤로 정했다. 매끈하고 윤이 나는 감귤이 훨씬 좋아 보이긴 해도. 소비자가 원하니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을 치고 마지막 단계에서 윤이 나는 광택제를 바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게다가 우수 품질이라는 표까지 붙인 감귤이니 가격이 당연히 비쌀 수밖에. 농장 주인의 얘기를 들어보지 않았다면 비싼 귤을 샀을 것이다. 망설임 없이 매끈하지도 않고 생채기투성이인 귤을 과감하게 선택했다. 못생긴 귤은 농약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설명과 함께 잎과 잎끼리, 가지와 가지끼리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 스치면서 난 생채기로 검게 보일 뿐 알맹이는 아무렇지 않다며 부수적인 설명까지 더하는 농장주의 말에 신뢰가 갔다. 시각적인 면에서 볼품이 없을 뿐이지 상품의 질은 오히려 좋다고 한다. 오늘 수확한 것이니 이삼일 두면 더 숙성되어 지금보다 훨씬 새콤달콤한 맛을 낼 것이라며 미소를 보인다. -<다시 제주도>에서
여행 중에 기념 물품을 사게 되는 일은 흔한 일이다. 여행지의 특성도 나타내고, 지인들에게 선물도 주기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관광객들은 빛깔이 곱고, 보기에 예쁜 감귤을 구매한다. 이 같은 인식은 대부분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그런데 농장주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듣고는 좋은 물품에 대한 판단력이 선다. 오히려 약을 치지 않고 출하에 앞서 광택제를 바르지 않은 감귤이 더 싸고 맛도 괜찮다는 설명이다. 판매하는 쪽에서야 금액이 비싼 물건을 권할 텐데, 그러질 않고 값이 싼 볼품 없는 물건을 권한 데에 신뢰가 간 것이다.
어찌 보면 겉의 아름다움을 먼저 생각하는 세태에 한 번쯤 쓴소리를 한 수필이지 싶다. 사람의 판단에도 외모를 중시하는 우리의 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살짝 숨어 있는 듯이 느껴진다.
황금송은 뒷산에 무리 진 그들과 같이하려 한 것이다. 어우러져 살아가려고 자신의 옷을 조금씩 벗어 놓고 주변의 옷 색깔로 갈아입던 중이었다.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 모르고 짐작만으로 진짜가 아니라고 의심하고 실망했다.
황금송은 다시 우리 집 귀한 보물이 되었다. 비록 본래의 색깔은 아니지만 늠름한 자태 또한 얼마나 멋있고 우아한지. 주위의 환경에 자신을 맞춰가는 배려와 함께함으로 내 마음에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참 고마운 나무다. -<황금송>에서
작가는 전원에서의 꿈을 이룬다. 늘 가지고 있던 꿈의 주택을 짓고, 정원도 만들었다. 그리고 수소문하여 황금송도 구해다가 심었다. 그런데 많은 대금을 지불하고 옮겨온 황금송이 제 빛인 황금색을 잃고, 녹색으로 변해 간다. 이는 틀림없이 가짜이거나 병에 든 것이라 추측한다.
그러던 중 소나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자문하니, 그럴 수 있다며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점을 알려준다.
순간 작가는 멀쩡한 나무를 가짜라고 의심하고 실망한 것 같아 겸연쩍다. 이제는 오히려 주위의 나무들에 가까이 가기 위해 녹색으로 제 옷을 갈아입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황금송이 늠름한 자태로 다가선다. 멋지고 우아하다.
우리가 살면서 진짜를 모르고 가짜로 오인하는 경우는 없을까. 속단하고 멸시한 경우는 또 없을까. 작가는 황금송의 변하는 색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조급히 세상을 속단한 지난 세월에서 성찰을 하고 있다.
8. 나가기
이상 작가 임경희의 수필 세계를 살펴보았다. 임경희 작가의 수필에는 그 흔한 허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경계에 울타리를 치고 철저히 지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수필이 더욱 현실감을 느끼게 하고 진솔하여 정감이 간다. 이제 데뷔 17년 만에 첫 수필집을 내었다. 조금은 느슨하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두 번째 수필집은 터울을 길게 잡지 않았으면 한다. 수필의 태생적 특징을 유념한 진솔한 수필집이 바로 독자들을 찾아가길 기대해 본다.
교수님 수필 이론
|
첫댓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수필은 허구가 아니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다.
수필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상처럼 정직하고 솔직한 문학이라는 점을 새삼느끼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