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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57회. '제주에 천년 왕국이 있었다' (2000.02.19.)
57회 : 제주에 천년 왕국이 있었다
제주에 천년 왕국이 있었다
방송일: 20000219 조회수 : 3871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프롤로그
-동문선 책도는 3 문집으로 잘 알려진 동문선에는 과거 시험에 얽힌 한 기록이 있다
과거 시험 수석 합격자의 이름은 고유- 놀랍게도 그는 빈공, 즉 외국인이었다
-제주섬 7 고려시대 탐라는 외국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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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타이틀 제주에 천년왕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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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1
-탐라국 고지도 바닥에서 돌출되고 MC 걸어오며
이 제주도는 고려시대때까지만 해도 외국이었습니다.
고어로 섬나라라는 뜻인 탐라가 역사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죠.
-고지도에서 삼성혈 지점으로 걸어가서
-손으로 가리키면 삼성혈나온다
이곳은 탐라국 개국 신화의 근원지로 알려진 삼성혈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고씨,양씨,부씨 성을 가진 세 성인이 여기 보이는 이 세 개의 구멍에서 솟아 나와 탐라국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제주도에 많은 유적지가 발굴되면서 신화로만 알려져 온 탐라국의 실체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탐라국은 과연 언제부터 존재했던 어떤 나라였을까요...
오늘 역사 스페셜에서는 역사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탐라국의 실체를 밝혀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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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탐라국의 실체가 있다
-바다에서 Z.O 마을 8 삼양동 마을- 이곳은 제주도에서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7 이 해수욕장 바로 뒤 도로변에 특이한 형태의 유적이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다
-원형 집자리 Z.O 12 유적지는 동서로 1.5km, 남북으로 6백여미터에 이른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마을자리인 것이다.
-둘러보는 두사람 10 이 삼양동 마을 유적은 비교적 형태가 잘 보존돼 있다.
-둥근 집모양 11 집 자리는 둥글고 크기는 직경 4~5미터정도다.
내부에 2개의 기둥 구멍이 있고 바깥에도 여러개의 기둥 흔적이 있다.
-앉아서 얘기하는 "상당히 이 안에서 활동이 많았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건물이 재사용되어지고 다시 만들어진 유적들이니까 "
-서서 얘기하는 10 작업 공간은 집 내부 2개의 기둥 구멍 사이에 마련해 놓았는데 각 주거지마다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원형기둥자리 트레킹 7 집안에는 작업 공간외에도 특별한 시설이 (저장시설) 마련돼 있다.
-강창화 INT 저장 시설입니다.곡물이나 토기 안에 뭐를 넣고 나서 이 안에 집어 넣고 나서 필요할 때 꺼내서
썼던 그런 겁니다"
"냉장고나 창고같은"
"그 당시에는 냉장고죠. 따지고 보면"
-발굴팀 실측조사 Z.0 20 삼양동 마을 유적은 지난 96년 제주시에서 삼양동 토지 구획사업을 실시하는 과정
에서 드러났다
공사를 급히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발굴해 들어가자 대규모의 집자리와 각종 시설,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야외 가마터 17 마을에서 야외 가마터가 하나 발견됐는데 직경 4미터로 그 규모가 제법 크다.
안에다 토기를 쌓아 놓고 바깥에서 불을 가해 토기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무암토기 파편 든 17 토기는 진흙에 현무암 알갱이를 섞어 만들어 썼다.
타이트 가마터에서 이렇게 덜 소성된 토기 파편이 많이 출토되는 걸 볼 때 당시 토기는 대량 생산 시스템으로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야외 폐기장 15 마을 바깥 바닷가와 가까운 곳에는 커다란 폐기장이 있는데 여기에는 토기 그릇들이 집중적
으로 폐기돼 있고 동물뼈들도 버려져 있다.
-공동 취사장 PAN 13 눈에 띄는 시설이 또 있다.
취사장과 야외 화덕 시설이 그것-이것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탄화 곡물줍는 17 공동 취사장에서는 비교적 보존이 잘 돼 있는 탄화
곡물들이 발견되는데 콩과 보리 등 잡곡류다. 밭농사를 주로 하며 살았음을 알수 있다.
-맷돌 11 이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주로 짓고 사냥, 고기잡이를 병행하는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창화 "돌 도구를 보면 이것은 철기나 다른 연장을 갈았던 숫돌 종류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멍이 뚫려 있는 숫돌 용도의 사암질 사암 계통 같고 이것은 날이 요쪽에 나 있죠 이 용도는 아마 나무의
껍질을 벗겨냈었던 돌 대패 종류 같습니다"
-집자리 F.S 17 집자리와 여러 시설들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들을 그대로 내려 앉은토기 등 보면 이 마을이 존재
했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데 이 마을은 농경 생활이 정착됐던 시기인 초기 철기 시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전체 마을 F.S 17 이천년전 마을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삼양동 유적 -
-마을 자리C.G 발생 여기에는 거주지만도 250여개 - 시설물도 제법 규모 있게 갖춰져 있다.
-김병모 교수 INT "이런 유적이 과연 우리나라에서 과연 또 나올까
이렇게 250여개나 되는 집이 한군데서 발굴되는 것이 또 있을까하는 그런 의구심이 든다.대단히 중요한 유적인데"
-심교수 INT "제주도 문화가 그저 낙후된 문화 또는 문화의 마지막...보다는 도리어 육지보다는 더 선진적일
가능성도 있다하는는 것을 오늘 저는 느꼈고"
-전시 석촉 동검들PAN 18 삼양동 마을 유적 중 비교적 큰 집자리에서는 특별한 계층이 소장한 것으로 보이는 귀한
유물도 발굴됐다.
-유리 구슬 10 한반도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장신구도 있다.
-옥 도는
-강창화 INT "이 유물을 패용한 사람이 단순한 신분이 아니라 일정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이미 삼양동 마을에 나눠져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박물관 학생들 15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삼양동 마을 유적 발굴 작업을 맡고 있는 제주대 유물 발굴팀의 도움을 받아 복원해 보기로 했다
-설계도면 그리는 손 10 먼저 발굴된 유적지를 토대로 정밀한 도면을
-집모양 도면 만들고 다른 유적지의 모형도 참고로 했다.
-둥근 집자리에 8 먼저 집을 복원해 보자
기둥 구멍 생기는 C.G 버팀목이 되는 기둥의 구멍이 집 안과 밖에 있다
-기둥 박히는 20 집안에 있는 두개의 기둥은 중심축이 된다.
바깥 기둥을 이 중심축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세로로 나무를 얹고 엮는다.
집은 이렇게 원추 모양으로 지어졌을 것이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C.G
-집안 내부 C.G 12 집안을 들여다 보자
기둥이 있는 중앙에서 주로 작업을 하고 잠은 가에서 잤을 것이다.
-야외창고에서 전체 마을 11 마을에는 공용 시설들이 드러서 있다
C.G
-공중에서 마을C.G 7 이천년전 제주도 삼양동에는 이런 큰 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이청규 만나려 가는 10 제주도 유물 발굴 조사에 참여해 그동안 많은 보고서를 발표해 온 영남대 이청규 교수
-지도 23 이교수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철기시대때 제주도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뒤엎게 했다.
당시에는 삼양동보다 더 큰 규모의 마을이 존재했다고 한다.
-이청규 INT "이청규 철기시대에 삼양동 마을이 있구요 그런 큰마을이 제주 용담동에도 있습니다 서쪽으로
외도촌변에 외도동에도 확인이 되구요 다시 서쪽으로 곽지리라는 곳도 잇습니다 그래서 벌써 철기시대 초기에
탐라국 초기가 되겠죠 이때 제주도 서북해안을 끼고 큰마을이 있다는 것이 확인이 되서 상당히 많은 인구가
탐라구 초기에 제주도에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C.G 제주도 지도 표시 10 제주도에는 이미 철기시대때 해안가를 따라 큰 규모의 마을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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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2
-복원 마을에서 조금 걸어오고 집앞에서 서서 마을과 집 가리키며
탐라국 초기에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을 복원한 건데요,,어떻습니까, 2천년전에 육지도 아닌 제주도에 이런 큰
마을이 그것도 여러개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제주도는 화산 폭발로 땅이 척박해 쌀농사를 지을 수 없는데요, 그래서 짚단 대신 흔한 억새풀을 움막에 썼을
겁니다.
그리고 기둥도 여러개 박고 튼튼하게 세워서 제주도 바다 바람에도 잘 견딜 수 있게 했을 겁니다.
여기 살던 사람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도구들도 발견됐는데요, 한번 볼까요...
-집 앞에 보리단 놓여 있고 그 옆에 전복제 반월형 칼 놓여 있다
-앉아서 전복제 반월형칼 들고
그냥 보기에는 전복 껍질처럼 보이지만 이쪽 날을 한번 보십시오, 아주 날카롭습니다.
-발아래 놓인 보리단 베는
이걸 손에다 이렇게 끼고, 이렇게 베는 것인데요,
전복제 반월형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농작물을 수확할 때 사용하는 농기구인 것이죠.
-반월형석도 돌출 여기 보시는 이것은 반원형 석도입니다.
이 전복제 반월형칼이랑 모양이 똑같죠.
한반도에서는 농작물을 수확할 때 돌을 날카롭게 갈아서 만든 이 반월형 석도를 사용했는데요,
탐라국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돌보다 날도 세우기 쉬운 전복 껍질로 만들어 썼던 것이죠.
-파노라마처럼 하나씩 나온다 (전복 화살촉, 조개 목걸이 )
이것은 색깔이 이뻐서 장식품처럼 보이실텐데요,
화살촉입니다. 전복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건 목에 거는 조개 장신구입니다.
탐라국 사람들은 이렇게 바다에서 나는 전복이나 조개 등 바닷가 특산물을 이용해 농기구며 낚시도구,
사냥도구, 장식품 같은 걸 만들었습니다.
탐라국에서 나오는 생활도구들은 재료만 좀 변형했을 뿐 같은 시기 한반도 육지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탐라국와 한반도 육지와는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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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일찍부터 한반도와 밀접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부여 송국리 가는 10 충남 부여 송국리 -
지난 74년 이곳 마을 밭에서 마을 유적이 발굴됐다
-송국리 모형 PAN 9 그런데 이 송국리 마을 유적과 제주도 삼양동마을 유적은 그 형태가 놀라울 정도로 유사
하다
-모형 집안 F.S 9 집안에는 두 개의 기둥이 들어서 있고 그 사이에 일하는 작업 공간이 있다.
-원형 집자리 비교 7 집터도 30-40센티미터 파내려간 원형 모양을 하고 있다.
-중앙 박물관 실장 INT "삼양동 주거지의 특징이라고 하면 평면 원형에 가옥의 작업공 작업공 속에 두 개의
기둥이 특징이다. 이런 특징을 가진 주거지는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발견돼서 송국리형 주거라고 이름 붙인
특이한 주거지입니다"
-삼양동 집자리 스케치 13 이런 주거지는 같은 문화권인 한반도 중부 이남 일대에 나타나는데 바다 건너
제주도에도 들어온 것이다.
-제주 자연사 박물관 외경 2
-곽지리토기들 PAN 15 한반도와 교류가 있었음을 알게 하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토기 도는 바로 제주 지역 토기가 그것-
현무암 알갱이로 만들어 투박하고 입이 벌어진 것이 특징이다.
-곽지리 패총 사진 6 이 토기는 곽지리 패총에서 출토되는데 여기서 다른 형태의 토기가 몇점 나왔다.
-군곡리 토기 돌출 7 당시 제주에서는 찾아 볼수 없는 형태다.
그렇다면 어디서 왔을까?
-군곡리 토기들 25 이 토기는 전남 해남 군곡리 일대에서 유행하던 토기다.
군곡리 토기라고 하며 볼록한 모양이 특징이다.
입주위에 띠를 둘러 점토띠 무늬 토기라고도 한다.
-군곡리 패총 액자 10 그런데 이 토기가 출토된 군곡리 패총에서도 제주 지역 토기가 나온다.
-패총 액자 토기 파편 14 이것은 전남 해남 지역과 제주도가 서로 교류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렬 무늬 토기 19 토기를 통해 한반도와의 교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데 이 공렬 무늬 토기는 입주위에
작은 구멍으로 무늬를 내 일명 구멍 무늬 토기라고도 한다.
-공렬 토기 이동 지도C.G 13 이 공렬 무늬 토기의 이동 경로를 보자.
한반도 서북부에서 유행해 한강이남 경상도 남해안, 그리고 제주도까지 들어온다.
-임학중 INT "동일한 유적이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을 봐서 그 당시에 이미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류는 해류를 이용하거나 조류를 이용한 바닷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포구 바다 스케치 24 선사 시대부터 해양길은 넓게 열려 있었다.
철기 시대에 제주도에서는 이미 열려 있던 바닷길을 통해 한반도 전역의 문화를 쉽게 받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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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3
-한반도 전체 지도+제주 지도 교류 표시
제주도에서 발굴되는 토기를 통해서 한반도와의 활발한 교류 관계를 알 수 있었는데요,
여기 지도로 표시해 봤습니다.
먼저 제주도와 거리가 가까운 한반도 서남해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했구요,
경남 남해안 지역을 통해서 한반도의 문화가 유입이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 서북부 지역과도 교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기본 세트 고대에는 육로보다는 배를 이용하는 해로가 더 발달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탐라국은 일찍부터 열려 있던 바닷길을 통해 한반도와 긴밀한 교류를 할 수 있었고,
선진적인 문화도 빠르게 들여 올 수 있었을 겁니다
한반도와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맺고 활발한 교류를 해 온 이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탐라국 마을표시 지도에서 용담동 돌출
여기 용담동은 제주시의 중심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최근 이 지역에서 고대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있는데요, 용담동의 한 유적지가 그 의문을 풀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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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3 한반도 민족이동시기의 선진적인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용담동 항공 8 용담동은 제주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하천이 흐르고 농사짓기에 좋은 땅이어서 옛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하늘에서 무덤으로PAN
-무덤자리 트레킹 7 그런데 지난 84년 이 마을 뒤편에 있는 텃밭에서 철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굴
됐다-
-용담동 발굴사진 11 이 무덤안에서는 철제 무기가 다량으로 출토됐다
-발견 당시 무덤 C.G 4
-사람 실루엣 C.G 17 이 무덤 주인의 허리 부분에서는 2개의 철장검과
1개의 철단검이,
발아래에는 도끼와 각종 철제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목에는 유리 구슬이 발견됐다.
-목걸이 13 이 유리 구슬은 목걸이다. 다른 철제 무기와 함께 무덤의 주인이 당시 사회에서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단서다.
-철기들Z.I PAN 12 무덤 주인과 함께 묻힌 이 철제 무기는 당시로서 가장 선진적인 것이었다.
-판상철부 PAN 무기들 12 그러나 제주도에는 철이 생산되지 않는다.
철이 생산되지 않는 이곳에서 이런 수준의 철기가 발견된 것일까
-철장검 들어가는 29 더구나 여기서 발굴된 철제 장검은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한다.
양쪽에 날을 세운 이 장검은 손잡이를 달면 그 크기가 1미터가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수준의 장검을 제작할 수 있는 곳은 황해도 지방을 기반으로 했던 낙랑군이었다.
-철도끼 날 16 또한 부채꼴 모양의 정교한 철제 손도끼는 한반도 북부여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철제 무기는 한반도에서 유입된 것이다.
-이청규 교수 INT "용담동 유적에서 나온 철기를 보면 장검 단검 도끼 화살촉등이 있다 그 형식을 보면 한반도
에서 나오는 기원2세기경의 철기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한반도와 거의 같은 시기 나라 성립하는 시기에 제주도
에 이런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한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반도 건국 지도C.G 17 한편 한반도에는 고조선이 붕괴된 이후 북방 민족이 남쪽으로 내려 오면서
혼란기를 거쳐 고대 국가가 성립된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가 바로 이 시기에 건국된 것이다.
-삼성혈 걷는 전경 11 그렇다면 탐라국은 언제 누가 세운 나라일까
-삼성혈 비석에서PAN 8 3명의 성인이 땅에서 솟아 나와 탐라국을 세웠다는
삼성혈 -
-삼성혈 구멍 Z.O 8 탐라국 건국에 대한 기록은 이 신화가 유일하다
-재단 이사 INT "탐라국의 시조가 제주도를 개황한 삼신인이 나온 삼성혈입니다"
-얘기하는 것에서Z.O 11 철기 유물이 발굴되면서 탐라국 건국은 한반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
되고 있다
-신용하 INT "탐라국은 전설처럼 땅에서 솟아 올라와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북방으로부터의 민족 이동기에
부족들이 자기의 출신지에서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거나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남방으로 계속 이동해
오면서 소국들을 만들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고대 소국이라는 것을 증거 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삼성전 F.S 2
-제단 PAN 22 한반도에서 내려온 민족이 건국했다고 하는
탐라국 -
그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단서가 있다.
-을나Z.I 탐라 건국 신화에 나오는 을라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
-신용하 INT "을나라고 하는 것으 북방 맥족이 사용하던 용어로
예컨데 부여 고구려 여진까지도 왕 족장을 말한다 남쪽에는 없다 그래서 탐라는 북방에서 흘러 들어온 부족들이
건국한 나라라는 것을 을나라는 것이 증명해 준다"
-삼성 제단 18 탐라국은 한반도에 고대 국가가 들어 섰던 시기, 북방에서 이주해 온 세력이 세운 또 하나의 고대
국가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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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4
-곽지리 패총 앞에 서서
지금 저는 제주 곽지리라는 마을에서 발견된 패총앞에 서 있습니다.
이 패총에는 각 시대별 유물들이 함께 출토됐는데요, 한번 자세히 들여다 보죠.
-곽지리 패총에 섞여 있는 유물들 가리키는
조개 더미들이 많이 드러나 있고 그 사이에 토기 파편들이 섞여 있습니다.
방추차 같은 것도 있고 유리 구슬도 보입니다.
-동물 타이트에서 말뼈 돌출
이쪽에 보면 동물뼈들이 있는데요, 출토된 동물뼈 가운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말뼈입니다.
이 말뼈는 DNA 분석 결과 3세기경 1미터 20센티미터 가량의 작은 말로 밝혀졌습니다.
-초원에 조랑말 풀 뜯어 먹는 실사 백 화면
이렇게 체구가 작은 말은 고구려와 동예가 그 특산지인데요 이 말이 신라와 백제가 건국될 당시 이들 나라에
전파된 것처럼 같은 시기에 탐라국에도 말이 유입됐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한반도의 여느 나라 못지 않게 제주도에도 북방 문화가 일찍들어 와 있었습니다.
-기본 세트
그것은 해양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고 열려 있던 해양길을 통해 일찍부터 교역에 눈떴던 나라가 바로
탐라국이었습니다.
탐라국은 해양 지리적 잇점을 이용해 활발한 교역 활동을 벌였는데요, 어떤 교역 활동을 벌였는지 -
살펴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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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4 원거리 교역과 중개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바다 Z.O 무덤 자리 9 제주시 해안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용담동 제사 유적지가 있다.
날씨가 좋을때는 해남 반도의 섬도 보인다
-터로 걸어가는 "이 일대가 당시에 토기가 수많이 흩어져 있던 장소가 되겠고 중심되는 부분은 이쪽이 바다쪽을
향해서 전체 유물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발견 자리 트레킹 8 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 유물은 제사를 올리고 깨 버린 자기 파편들이다.
-도기들 9 (조금 보고)
자기는 기술이 없어서 탐라에서 생산을 못해 수입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파편 타이트 9 (조금 보고)
깨진 제사 유물 파편은 바로 당나라 자기인 것이다.
-강창화 INT "이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금동제 허리띠 장식 그 다음에 중국에서 아주 귀중한 월주산 청자
그 다음에 육지 지방에서 직수입한 고급 질그릇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깨진 도기 도는 5 (보고)
-깨진 도기 도는 12 그렇다면 이 당시 탐라국은 당나라와도 직접 교역을 했던 것일까?
-대평리 가는 차 트레킹 8 제주 서남부에 위치한 안덕면 대평리에 그 단서가 있다.
-마을 Z.I 바다 배들 11 태풍이 불거나 날씨가 나쁠때면 수십척의 중국배가 이 마을 포구에 정박한다.
-배들 PAN 15 중국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이곳이 더 가깝기 때문이다.
당나라와의 교역을 확인 시켜 주는 것은 이곳 대평리 포구의 옛이름 -
-마을 주민 INT "당포라고 당나라 당자에 포구 포자라고 해서 당포라고 하는 거다.저거 다 중국배,
지금도 중국배들이 많이 와 있습니다만은 중국하고 가깝지 않습니까 중국에서 무역 관계로 왔을 적에는 여기를
자주 온 것 같아요 거리 관계로"
-포구 배 PAN 19 당나라 배는 물론 탐라배도 이곳 당포를 통해 당나라를 오고 갔다는 것이다.
당포는 전해지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 지명으로도 확인된다.
-제주대 외경 2
-김동전 교수와 지도보는 9 탐라사를 연구하는 김동전 교수 -
조선시대 고지도에는 대평리가 당포로 표시돼 있다고 지적한다.
-지도에 당포 가리키는 6 중국과 또 가까운 표선리라는 곳도 당포로 표시돼 있다
-김동전 INT "중국과 교역이 빈번한 지역이었음을 지명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여러 가지 도자기류라든가 교역품들이 이 루트를 통해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제주도의 여러 특산물이라든가 중국에 사신을 파견 할 때 이 포구를 이용해서 중국과의 빈번한 왕래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창유집 책 13 당나라의 문필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한유-
그의 문집 창유집에 당나라를 드나드는 탐라국에 관한 기록이 있다.
12 (기록 보기)
-일본고기록 탐라방포 25 또 일본 고기록에 탐라의 특산품인 탐라방포, 즉 육포가 일본에서 벼 60단에 거래되고
있음을 적어 놓았다. 탐라의 상선은 일본 해역까지 들어가 교역 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김동전 교수 INT "탐라에서는 탐라에서 생산되는 전복이라든가 방포 말린 고기들이 일본으로 수출되어졌다고
한다면 일본으로부터 탐라국으로 수입되어진 것은 상당히 여러 가지 비단의 종류라든가 도끼,칼자루 이러한
것들이 수입되어지게 됩니다"
-산지항 PAN 6 탐라국의 또 다른 교역 활동을 알 수 있는 유물이 산지항에서 발견됐다.
-화폐들 6 한나라때의 사용되던 중국 화폐가 바로 그것-
-화폐 Z.I 12 산지항에서 출토된 중국 화폐는 모두 18점인데 당시 통용되던 화폐의 종류가 모두 나왔다
-오십대천 6 (보고)
-화포 2 특히 주목할 화폐는
-오수전 2 오수전 -
-오수전 분포 C.G 11 이 화폐는 중국은 물론 한반도 일본 열도 등 동아시아 국제 교역 네트웍에서 통용되고
있었다.
-윤명철 INT "제주도에 있는 산지항이라든가 서남쪽에 있는 지역은 항해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잇다이러한
지역에서 오수전이나 화천 등 여러 가지 화폐가 발견된다는 것은 역시 이쪽을 중심으로 중개 무역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요새말로하면 통행료가 되겠다 고대 항해에서는 중요한 항구라든가 중요한 물목을 통과할
때는 통행료 같은 걸 냈다 제주도 같은 경우도 이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지도 손으로 가리키는 13 고대에는 연안의 육지를 가시권에 두고 항해를 하는데 중국에서 한반도 그리고
일본을 왕래하려면 이 고대 항법상 제주도를 거쳐 가게 된다고 한다.
-한라 Z.I 8 제주도는 동아시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 이들 나라가 서로 왕래를 하려면 제주도를 통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윤명철 INT "항해를 할 경우 악천후를 만나거나 태풍을 만나 부득불 피항을 할 경우가 잇다 피항을 할 수 있는
곳은 유일하게 제주도 밖에 없다 또 많은 시간을 항해 할 경우 물의 보급이라든가 식량의 보급이라든가 환자의
수송이 필요한데 이럴 경우에도 오로지 기착할 곳은 제주도 밖에 없다 때문에 제주도는 본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동아시아 해양에서 모든 인종들과 모든 문화가 모이는 해양 교통의 십자로가 되겠습니다"
-바다 스케치 8 탐라국은 일찍부터 왕성한 교역 활동과 해양 지리적 잇점을 활용해 재력을 축적할 알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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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5
-동아시아 전체 지도 (중국,한반도,일본,오끼나와,대만 + 제주)
여러분이 보시는 것은 동아시아 전체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제주도를 중심으로 해서 한번 살펴 보죠.
제주도의 북쪽으로 한반도가 있구요,서쪽으로는 중국 동쪽으로는 일본 남쪽으로는 대만과 일본 오끼나와
열도가 있습니다.
제주도는 동아시아 십자로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죠.
-지도 거꾸로 돌린다
이 지도를 거꾸로 돌려서 한번 볼까요?!
어떻습니까. 제주도가 동아시아의 정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게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죠?
이런 이런 해양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일찍이 당나라와 왜를 왕래하는 선박들이 빈번하게 탐라를 거쳐갔을 것입
니다.
그래서 탐라는 자연스럽게 북방의 문물과 남방의 문화를 다양하게 받아들이며 다른 나라들과 활발히 교역
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탐라국이 해양 왕국으로서 자리매김하는데도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기본 세트
당나라와 일본까지 먼거리 항해를 교역하던 6, 7세기는 탐라국의 최전성기였습니다.
해양 무역 왕국으로 그 전성기를 구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배였을 겁니다.
먼거리 항해를 했던 탐라국의 배는 상당히 발달했을 텐데요,
그러나 아쉽게도 탐라선에 대해서는 그 어떤 기록도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탐라선의 규모와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는 찾을 수 있었습니다.
탐라선은 과연 어떤 배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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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탐라국의 배는 어떤 배였을까
-이진 포구 PAN 12 전남 해남의 이진항은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포구다. 지금도 이 두 지역은 왕래가 잦다
-포구 돌 쌓은 F.S 2
-포구 PAN 10 이 마을 포구에 제주도 적지 않은 현무암이 눈에 띈다
-포구 현무암 T.S "이것도 제주 돌이고 이것도 제주돌입니다 제주돌 할아버지 INT 중에서 좀 강한 놈이 바깥으로
나와 있고 약한 것 구멍이 뻥뻥 뚫린 것은 이 안에 무수히 있죠"
-마을 담 트레킹 현무암 9 마을 담장도 제주도의 현무암으로 쌓았다.
-집안으로 현무암 트레킹 13 제주도에 있어야 할 현무암이 왜 이곳에 이렇게 많은 것일까?!
-할아버지 INT "제주에서 왜 이리 실어 왔냐하면은 말을 육지로 보내야 할 것인데 배에다 말을 실으면 배가
중심이 위에 있으니까 배가 까발리기가 쉽거든요 그러니까 중심을 낮추기 위해서 돌을 배 바닥에다 깝니다
그래 배가 완전히 밑으로 가라 앉았을 때 말을 실어야 배가 든든하게 안 넘어지거든요 그래서 이놈을 싣고
와서 싣고 가지 왜 놓아 두었냐 하면은 인자 여기 와서는 쌀 같은 것 가져 가거든요 곡식을 실으면 무겁워서
안되거든요.여기서 다 퍼 버리고 거기다 곡식을 실어 가지고 가고 그랬어"
-제주시청 건물 들어가는 6 탐라국때에도 배에다 말을 싣고 날랐을까?
-세사람 FS에서 17 고대 선박 연구가 이원식씨의 도움을 얻어
이원식 얼굴 Z.I 탐라배를 복원시켜 보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육지와 다른 독특한 배가 제주도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탐라 순력도 넘기는 7 조선시대때 제주 목사 이형상이 제주도를 한달간 돌며 그리게 한 탐라 순력도 -
당시 제주도 생활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순력도 배 타이트 7 이 탐라 순력도에 그려진 배 그림에서 과연 독특한 제주배를 찾을 수 있을까
-이원식 INT "제주의 탐라 순력도를 좀 봤는데요,여기 나온배를 보니까 육지에 있는 배하고 좀 다른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뒤에 선미라고 해서 꽁지부리라고 하는데 상당히 날렵하게 돼 있습니다"
-배 그림 사진 찍는 5 제주배는 배의 꼬리가 길고 날렵하게 올라간 것이 특징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길 트레킹 2
-바다에서 일하는 할 7 제주시 성산포-
이곳에 제주도의 전통배를 제작한 경험이 있다는 노인이 있어 찾았다.
-PD+이 찾아가는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내려오는 할아버지 10 바로 대를 이어 배 제작을 해 온 김천우 할아버지다.
-이원식 INT "제주 배는 뭐 때문에 덕판배라고 하나요"
-할아버지 "요거 덕판이라는 것입니다"
"아 요거"
-도면 놓고 10 덕판배가 바로 제주 전통배다
일제 시대때 일본의 강압에 의해 지금은
사라진 배다.
-얘기 듣는 2S 8 젊었을 때 선친을 따라 덕판배를 제작했던 기억을 살려 그 특징을 비교적 상세히 알려 줬다.
-돛대 그려진 배 도면 "요건 돛 ...아귀줄"
-할아버지 INT "배를 대었을 때 박치기 한다거나... 파도가 세기 때문에 단단히 안만들면 안되거든요,
제주배는 어디가서도 암초에 걸려도 깨지지 않으니까,
나무가 두꺼우니까..."
-포구에 복원 덕판배 F.S 3 김천우 할아버지의 고증으로 지난해 제주시에서 제주 덕판배를 복원시켰다
-덕판배 앞머리 T.U 14 덕판배의 특징은 뱃머리 -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덧붙이는데 제주 해안을 드나들 때 암초에 부딪혀 뱃머리가 잘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배 밑 3
-바다 띄울 준비 배F.S 3 실제로 제작된 덕판배를 바다에 띄웠었다.
-배에 현무암 싣는 10 배에 물건을 가득 실었을 경우가 아니면 배 밑에 현무암을 놓는다.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다.
-말태우는 15 말을 실을때도 마찬가지다.
말이 요동을 치면 배가 뒤집히기 때문에 무게 중심을 잡아 줘야 한다.
-돛 올리고 7
-뱃머리 13 말을 싣고 바다를 건너 다닌 제주 덕판배 -
보통 말은 한번에 20~30마리 이상 실어 날랐다고 한다.
8 그렇다면 배의 크기는 복원된 덕판배보다 훨씬 커야 할 것이다.
-목포해양박물관 외경 3
-완도선 PAN 10 지난 84년 완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고려시대배다.
고대 선박의 모습을 설명하는 귀한 사료가 되고 있다.
당시 전라도 남해안과 제주도로 항해하던 배로 고증됐다. 탐라선도 이배의 크기와 비슷할 것이다
-박물관 연구원 INT "저희 생각보다는 상당히 큰 규모를 갖고 있습니다
배의 전체 길이는 약 한 10미터 배의 폭은 한 3.5 미터 가량 되니까 10톤 규모의 선박으로 보시면 된다.
이배는 도자기가 3만여점 가까이 실려 있던 배다 상당한 양의 화물들을 운반할 수 있는 말들도 운반할 수 있는
그런 선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용인 가는 차트레킹 3
-이원식 집 외경 2 탐라선의 설계 도면이 드디어 완성됐다.
-도면 놓고 설명하는 17 "고 위에다가는 삼판을 올리는데 안압지에서 나온 배가 있어요 쪽배가 통나무배라고
그러는데 그 배의 양쪽을 붙여 봤습니다"
-자료들 13 설계 도면은 제주도배의 독특한 특징을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했고 기존의 고대 선박 도면을 참고로
했다.
-꼬리 올라간 그린 도면 7 탐라선은 과연 어떤 배일까?
-이원식 INT "제주도에는 바위가 많고 해안에 암석이 많기 때문에 배가 접안을 할 적에는 배가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선수부분에 통나무 반쪽을 쪼갠 그런 굵은 곡목이라고 하는데 곡목을 썼고, 그리고 선미가 굉장히 깁니다.
이건 제주의 탐라 순력도에 나오는 배를 보니까 보통 선미보다 2배에서 3배 배의 한 1/2정도의 길이로 나와
있는데,이것은 풍랑이나 파도에 견딜 수 있게 배를 만들려고 선미를 늘인 것 같습니다"
-탐라선 복원 C.G 30 컴퓨터 그래픽으로 배을 복원해 보자.
뗏목배의 밑바닥에 외판을 올려 붙인다.
배 앞머리에는 통나무가 덧 붙여져 있다.
배 꼬리는 길고 끝이 올라갔다.
-앞으로 도는 20 교역품을 싣고 동아시아 해역을 개척해 나간 탐라선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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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6
-기본 스튜디오에 복원된 탐라배
이게 복원한 탐라선입니다
탐라선을 한번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죠.
-뱃머리 보는 타이트 스케치
한반도의 배들과 다른 특징은 이 뱃머리인데요, 이 뱃머리에는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서 덧대어 단단하게
만들었는데요,
왜냐하면 제주도 해안 곳곳에 암초들이 많아 배들이 해안으로 드나들 때 암초에 잘 부딪힌다고 합니다.
그래서 뱃머리가 잘 깨지지 않게 이렇게 두꺼운 통나무가 덧대어져 있습니다.
-배가 돌며 꼬리 부분이 MC 쪽으로 오는
또 다른 특징은 이 배의 꼬리 부분을 한 번 보시죠. 꼬리가 길고 날렵하고 끝이 뽀족하게 올라가 있는데요,
이렇게 하면 파도를 헤쳐나가기 쉬워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잇점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배로 먼거리 항해를 하며 교역 활동을 벌였을 텐데요, 이렇게 해양 활동을 통해 쌓은 재력은 탐라국이
독자적인 자치국가를 지탱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을 겁니다.
-기본 세트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같이 큰 나라 사이에서 작은 섬나라인 탐라국이 하나의
독립된 나라로 버틸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탐라국이 천년의 해양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또다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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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6 국제 정세에 발빠른 대응을 할 줄 알았다
-삼국 사기 책 5 삼국사기에는 탐라의 외교 관계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내용 자막 20 476년 백제 문주왕때의 일이다.
문주왕이 탐라의 사신에게 백제의 관직중 3번째로 높은 벼슬까지 하사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달+전쟁 18 당시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지금의 공주 땅인 웅진으로 쫓겨나 있었다.
바로 이때 탐라국의 사신이 백제를 찾은 것이다.
-김동전 교수 INT "이것은 당시 백제가 어려운 상황이긴 했지만 그러한 특산물을 바쳐온 탐라국에게 우호적으로
대해 줌으로써 탐라국을 백제의 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러한 의도가 다분히 내포돼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탐라국으로서는 그러한 백제에게 특산물을 바침으로서 우호적 관계를 형성해 놓음으로써 앞으로 탐라국에
닥칠 어떤 우환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의 경우에는 해상
교역로 항해해상 교역로를 장악할 정도였기 때문에 이러한 백제를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고창석 교수 연구실 10 각종 문헌에 기록돼 있는 탐라국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모아 탐라 사료집을 만든 고창석
교수-
-책 가리키는 8 백제 문주왕과는 명목상 외교 관계를 맺은 것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책 20 동성왕이 친히 정벌에 나선 것은 백제 문주왕에 사신을 파견한 지 불과 20년 후의 일이다.
고구려가 계속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때인 것이다
-고창석 교수 INT "힘이 약한 백제보다는 힘이 강한 고구려하고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이 보다 유리하겠다
이렇게 해서 백제하고는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고구려하고 외교관계를 맺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책 11 중국을 찾은 고구려 사신이 한말이다.
'가는 섭라에서 나는데 지금은 백제에 병합되어 바칠 수 없다'
-책 가 돌출 11 탐라국은 이 이전까지는 특산품인 전복진주를 가지고 고구려와 교역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창석 교수 INT "당시 탐라국의 외교 관계는 그 어느 한나라 하고만 외교 관계를 맺지 아니하고 정세 변화에
따라 독자적으로 아주 유리한 쪽으로 이렇게 옮겨 가면서 외교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지도 백제 고구려 멸망 11 7세기에는 한반도의 정세가 급변한다.
660년 백제가 신라에게 정복 당하고. 669에는 고구려 마저 멸망한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것이다.
-바다 +C.G 18 탐라국은 한반도 정치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발빠른 움직임을 보인다.
당나라와 일본으로 눈을 돌려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김동전 교수 INT "탐라국을 보호해 주는 파트너로서 백제를 크게 인식하고 있었는데 백제가 멸망해 버린것이죠
그래서 탐라국은 자기를 지켜 줄 수 있는 상대파트너를 상당히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을 수없었다
이러한 것으로 봤을 때 탐라국은 국제정세에 아주 긴밀하게 대응을 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해 나갈려고"
-황룡사터 22 경주 황룡사터 -
이곳에는 신라 선덕여왕때 이웃나라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지었다는 황룡사 9층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었다고 한다.
-책 7 (보기)
-황룡사 그래픽 8 9층탑의 각층은 경계해야 할 9개의 적을 상징하는데 신라가 경계해야 할 나라에 탐라도 지목
돼있다
-나라 발생 1' 그렇다면 9적은 어디를 말하는가
삼국유사를 보면 1층은 일본이다.
2층은 중화를 가리키는 것이고 3층은 황화강 이남의 오월을 가리킨다
4층은 탁라 즉 탐라를 말한다 5층은 응유인데 이 응유가 백제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중국
강서성 동쪽 응유도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 다음에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을 뜻하고 8층은 여진 마지막으로 9층은 예맥을 말하는데 이 예맥 역시 사실은
고구려의 옛이름으로 학자들은 이것이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모형 45 이것은 탐라국은 이들 육지의 강대한 나라들과 그 위상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7세기 탐라국은 신라로부터 그 위상을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강창화 INT "이 마을 안에서 확인되는 유물들을 볼 때 이 마을에서 살얐던 주민들은 농경을 중심으로 했던
주민으로 파악된다 그렇지만 바다와 근접된 환경을 고려할 때 다소간에 해산물을 채취하는 활동도 있었고
돌도끼 등의 도구로 봤을 때 나무를 베는 그런 행위도 있었을 것으로 확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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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7
- 기본세트
고려중엽 고려도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인 군현제를 실시하는데요, 이때 탐라국에도 고려의 관리가 파견나와서
직접 통치를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탐라국의 자치 왕권은 급속히 약화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 태종때 탐라왕 고봉례는 왕권을 반납하고 조선에 복속합니다.
이렇게 탐라국은 종말을 맞게 된 것이죠.
제주도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오래된 천년 왕국이 있었습니다.
동아시아 각국의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이며 교류를 해왔던 나라, 탐라!
이것이 바로 새롭게 밝혀지고 있는 탐라의 모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