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9대 숙종의 대를 이을 아들 둘이 있었다. 두아들 중 제20대 경종과 또 다른 아들이었던 제21대 영조는 서로 정치적 기반이 달랐다.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았고, 숙빈의 아들이었던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았다.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건강이 좋지 못해 시름시름 앓다가 때마침 영조가 진상했던 감과 게장을 먹고 탈이나서 사망하게 된다. 이로인해 영조는 제위기간 내내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에서 평생 시달리게 된다. 영조가 왕이되자 소론의 정치적 기반은 약해지고 노론이 등극하게 된다. 하지만 영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노론, 소론 가릴것 없이 탕평책을 펼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소론 출신의 궁중 여인들이 사도세자를 중심축으로 측근들로 심게 된다. 따라서, 소론들은 사도세자 측근에서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만들기 시작했고, 심지어 세자의 어머니인 "선희궁(영조의 후궁)"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아들과 어머니와의 관계도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세자는 소론파 내인들에게 학문보다는 무예를 배우게 되고 점점 학문을 멀리하게 되자. 영조는 이런 사도세자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가 맞이한 세자빈이 바로 "혜경궁 홍씨"다. 노론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영의정까지 오르게 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세자가 15살 되던 때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왕을 대신해서 국정을 운영)"을 맡기게 된다. 하지만, 무예에만 관심이 많았던 세자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국정을 운영하는 일에 서툴렀고, 이런 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조는 세자를 더욱 핍박하고 윽박지르면서 부자간의 갈등이 시작 된다. 아버지의 신임을 되찾기 위해 나름 노력했으나 그럴수록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져 세자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경계증", 큰 소리를 무서워하는 "뇌벽증", 심지어 옷차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의대증"과 같은 정신분열 증상까지 보이게 된다. "의대증"이 심해져서 내인을 죽이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한 번 사람을 죽이자 계속 사람을 죽이는 광기를 보이기 시작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세자에게 죽임을 당한 내인의 수가 약 100명에 달할 정도로 세자는 미치광이가 되어 갔다. 결국, 이 모든 사실을 알게된 영조는 세자를 문책했고, 노론의 기반인 세자의 어머니인 "선희궁"마저 세자에게 등을 돌리자 소론이 기반인 세자는 폐서인 되고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한다. 하지만, 세자가 스스로 자결하지 않자 뒤주에 가둔다. 하지만 실록에는 뒤주에 가둔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뒤주에 가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뒤주에 갇힌 세자는 처음에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영조는 뒤주에 못질을 해서 못나오게 해서 결국 죽게 한다. 이것을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임오화변"이라고 한다. 세자 나이 27세였다.남편이었던 세자가 죽고나서 혜경궁 홍씨는 28살의 나이에 아들(제22대 정조)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도세자가 복위가 되면서 다시 세자빈의 신분을 되찾게 된다. 남편을 잃은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혈육인 아들 정조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무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마침내 정조를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등극 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정조는 이 때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생모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혜경궁"으로 높이고 지극 정성으로 효도를 하고 혜경궁 홍씨가 환갑이 되던 해에 어머니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수원으로 행차를 한다. 그렇게 해서 사도세자가 죽은지 32년 만에 드디어 남편의 무덤인 현릉원으로 가게된다.
이와같은 이야기가 담긴 책이 한중록이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가 죽고 나서도 15년을 더 살게 된다. 81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사망한다. 혜경궁 홍씨에 대한 사후 평가는 크게 둘로 나뉜다. 남편잃은 극한의 고통을 겪고 아들 정조를 왕까지 만든 비운의 여인으로 기록하고 있거나 , 또 햔편으로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남편을 버리고 소론에 붙었다가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한중록이라는 책까지 쓴 비정한 여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노론에 대한 복수로 풀어나간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에 걸맞게 장식하는 문화적 시설로 풀어나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였던 수원을 자급자족이 가능한 도시로 키우고자 화성을 축조하여 조선 왕릉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게 한 것은 모두 아버지에 대한 원한 문화정책으로 풀어낸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도세지의 묘는 양주 매봉산 밑에서 수원으로 옯기고 현륭원이라 하였고, 그뒤 부부합징하여 융릉으로 격상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 영조는 노론이 기반이었고, 사도세자는 소론 기반이었는데 노론의 기세를 당하지 못하여 축출 되었다는 학설이 근거가 있다.
정조대왕은 재위 기간 중에 여러번의 암살 위험이 있었고 그래서 2,000명의 호위병을 양성하여 행차시에 활용했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이 쉬고 싶을 때 찾을 목적으로 축조한 궁궐과 성곽이 유네스코자연유산에 등재 될 정도로 정성드려 만들었다.
11월 10일 목요일에 정조대왕의 숨결이 느껴지는 수원화성을 돌아보고 격동의 조선말기를 회상 해 봄이 어떨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