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세 번 나온다. 사도행전 11장 25-26절에서『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보기에 그들의 말, 행동, 활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신도들에게 가르쳤으므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이방인들에게도 전하게 되었는데, 포교하는 과정에서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 추종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경계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26장 28절에서『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니,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그립바 왕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냉소적으로 대한 것이다.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서는『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신도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면, 강하게 반대에 부딪히고, 심지어는 그들이 신도들에게 창피를 주거나 협박까지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는 이렇게 이방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 원죄의 문제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것을 이방인들에게 말을 하면 그들은 강하게 부정한다. 따라서 예수가 인류를 대신하여 대속의 죄로 죽었다는 것에 혐호한다. 예수가 신성모독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무슨 말인가 라는 반응이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죄의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원죄의 성격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전하므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둘째, 원죄에 대해서는 에덴동산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데, 무조건 믿어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아담은 죄의 원조가 되어 버렸으며, 이방인들은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생각한다.
셋째, 믿음과 구원의 문제이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므로서 이방인들이 극도로 경계한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이냐 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속의 죄를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라는 식으로 포교한다.
대부분 교회에서는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듯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져야 함에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 바라보는 시각을 해소해주는 것이 더 중요한데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해야 할 지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자들이라는 말을 목사들은 자주한다.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으면서, 교회생활의 충실, 마음의 감동, 체험신앙 등을 은근히 들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구체적으로 말을 할 수 없지 않은가? 회개하여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다가가신다. 그래서 믿음을 주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인격적 만남이 아니라, 자신이 영적으로 갇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만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다.
국가나 사회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답게 행동해야 하는 식으로 말을 한다. 법을 잘 지키고, 불의한 이웃을 돕고, 정직한 생활을 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아가 전쟁 등으로 어려움에 처하거나 가난한 나라를 돕는 그런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그들 나름대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정체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으로 부활했는가를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런 문제들은 해결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을 넘어서, 다른 국가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상 국가를 보면 기독교인들의 점유율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은 나라에도 선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내용을 전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정확히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어슬프게 알고 있으므로 이방인들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이다. 예수의 죽음은 나의 죄를 대속할 뿐, 나도 예수와 함께 죽었음을 말하는 교회는 많지 않다. 부활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없으므로 육체가 죽어서 부활하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부활은 예수와 함께 현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며, 새창조라는 말이다. 새창조된 것을 모른다면, 말로는 그리스도인 답게 행동하자고 하면서도 실생활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 사람들이 열심히 전도하여 기독교인 숫자가 일천만명에 육박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는 교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에 온 사람들은 대개 가족, 친척, 친구를 따라 왔다가, 신앙생활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므로 믿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제대로 성경 내용도 모르면서, 교회에서 설교 듣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계명을 잘 지키는 등의 활동으로 신앙인이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냉소적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으니 참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람이라고 정체성의 정의 내리듯이 말하는 사람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내적 변화는 없고, 외적인 변화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내적 변화는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신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현재적으로 부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