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서에 기록된 세례의 상징
세례가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의 증인들과 함께하시겠다던 예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에서 보듯이 지상명령(至上命令)에도 세례가 포함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발전 역사를 자세히 기록해 놓은 사도행전에도 “세례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려 아홉 번이나 기록되어 있다.(2:41, 8:12, 8:38, 9:18, 10:48, 16:15, 33, 18:8, 19:5) 왜일까? 성서는 최소한 다섯 가지의 ‘상징’을 통해 세례에 들어 있는 의미를 보여주는데, 오묘하게도 이 다섯 가지는 인생의 과정과 참으로 흡사하다. 즉, “다시 태어남, 죄를 가려줄 옷을 입음,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한 거룩한 신부, 죄인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국 입성에 필요한 구원하는 표”가 그것이다.
1. 세례는“다시 태어남”이다.
세례는 “다시 태어남”이다. 즉 세례에는 거듭남, 즉 사람이 천국 백성으로 다시 태어남의 의미가 들어 있다. 어두운 세상의 속된 백성에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태어나려면 세례를 통해야 한다. 이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요 3:1-21) 예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고 선언하셨듯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 여기서 ‘낳다’를 뜻하는 ‘겐네떼(γεννηθῇ)’는 ‘겐나오(γεννάω)’의 3인칭 수동태 부정과거인데 ‘아오리스트(aorist)’다. 아오리스트는 불변의 사실이나 섭리를 말할 때 사용되는데, ‘한 번, 한번은, 일단’ 등의 부사가 들어간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번역한다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한 번 태어)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가 된다. 그만큼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에서 “성령으로 난다”는 이해가 쉽지만 “물로 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다행스럽게도 고린도전서 10장 1-2절과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이 물과 관련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 3:21)
위의 두 구절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과정에서 경험했던 갈라진 홍해를 건넌 일과 하나님께서 대홍수로 세상을 멸하려 하실 때 방주 안에서 구원받은 노아의 가족 이야기는 모두 ‘세례’와 직결되어 있다. 사람들을 가운데 두고 상하좌우에 물이 있었다는 점에서 ‘물에 온전히 잠긴 세례’라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0장 2절은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 했고, 베드로전서 3장 21절은 “물은∼ 곧 세례라”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나야한다”는 요한복음 3장 5절은 ‘물세례’와 ‘성령세례’에 대한 가르침이 분명하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고 한 사도행전 2장 38절의 말씀처럼 물세례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세례, 즉 성령의 선물을 받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의 육체는 혈육을 통하여 세상에 태어났으나 영혼이 새로워지는 거듭남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가능하다.
2. 세례는“죄를 가려줄 옷”이다.
세례는 “죄를 가려줄 옷”이다. 즉 세례에는 “죄로 더럽혀 있는 사람의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위해 입은 옷”의 의미가 들어 있다. 현대사회에서 옷은 다양한 역할을 한다. 추위나 더위를 막아주는 보온(保溫)의 역할, 멋을 더해 주는 패션(fashion)의 역할, 그리고 신체의 부끄러운 곳을 가려주는 은폐(隱蔽)의 역할도 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 한 후 벗었음을 알고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행위는 자신들의 죄를 가리기 위한 은폐의 목적이었다.(창 3:7) 그러나 곧 시드는 나뭇잎은 근본적인 해결책
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 입히신 옷이 가죽옷이다. 가죽옷에는 “가죽을 마련하기 위해 동물을 희생시켰다.”는 제물의 의미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리는 성서의 첫 예고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기록한 갈라디아 3장 27절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선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의 옷으로 우리의 죄를 가려주신다.
신약성서에는 옷과 관련된 기록과 해석이 하나 더 있는데, 예수께서 들려주신 혼인 잔치에 입고 와야 할 ‘예복’의 비유다.(마 22:1-14) 어느 임금이 혼인을 앞둔 자기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종들을 보내 사람들을 초청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온갖 변명을 대며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었으나 그들은 그 종들을 죽이고 말았다. 대로(大怒)한 임금은 그 마을에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멸하고 그 대신 거리의 사람들을 초대하자 많은 이들이 혼인 잔치에 찾아왔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하객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은 그를 보며 진노하고 벌을 내린다. 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2)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2-13) 여기에는 세 가지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하나는 임금 아들의 혼인 잔치가 열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잔치에 하객을 초대했다는 점이며, 마지막 하나는 그 혼인 자리에 함께하려면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예복을 입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하나는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보았듯이 정결 예식인 세례이고, 또 하나는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의 기록처럼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는 삶의 자세다. 이처럼 신약성서에 나타난 옷이 주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 받은 세례”에 부여된 상징이다.
3. 세례는“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하는 것”이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하는 것”이다. 즉 세례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한 거룩한 신부”라는 상징이 들어 있다. 세례에 대한 이 상징이 성서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2-27)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와 같다. 따라서 교회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란 “성도들의 공동체”이기에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도가 될 수 있는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즉 믿음을 전제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혼인했다는 뜻이다. 속된 인간이 거룩하신 주님과 혼인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일이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신부인 성도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자기의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면 신부 된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상적인 신부라면 정결을 지켜야 한다. 이후로는 세속에 빠지지 않고 성결하여서 오직 신랑이신 그리스도만 사모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19장 1-10절, 특히 7-8절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 성도다운 삶인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한다. 이처럼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한 거룩한 신부”가 된다는 뜻이다.
4. 세례는“죄인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이다.
세례는 “죄인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이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한 로마서 6장 23절을 보듯이 죄를 지은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의 실현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되 모든 사람의 죄를 무조건 덮어 주지는 않으신다. 죗값을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셔서 인류를 구원할 길을 열어 놓으셨다.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자체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보듯이 반드시 대속자이신 예수를 믿고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비로소 대속의 약속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서 6장 3-5절에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세례는 죄인의 죽음과 그 죽은 자의 장사 지냄과 부활 의식”이다. 죽으신 분은 예수시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세례를 받는 모든 사람의 죗값으로 인정하신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의 죽음이 그에게도 효력이 발생 되어 죄인 된 옛사람은 죽어 장사 지내고 이후로는 그리스도처럼 부활에 동참한다. 따라서 세례는 죽음과 부활의 동시 실현이다.
5. 세례는“구원하는 표”다.
세례는 “구원하는 표”다. 세례를 “구원하는 표”라고 번역한 곳은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이다.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기록되었듯이 세례에는 “구원하는 표”라는 상징이 들어 있다.여기에 나타난 “구원하는 표”에 대해 번역본들은 다양한 단어들을 사용하였다. 이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안티튀포스(ἀντίτυπος)’인데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에 상응하는, 일치하는, 부합하는”으로, 명사로 사용될 때는 “표본, 원형, 표현”으로 활용된다. 여기서는 형용사로 사용되었으므로 “방주는 세례에 상응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뜻이 된다. 명사로 사용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방주의 원형은 세례”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즉, 방주가 노아의 식구들을 구원시켰듯이, 세례도 사람을 죽음에서 구원시킨다는 뜻이다. 방주가 물에 있었듯이 노아의 가족들이 물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도 된다. 성서 번역본들도 이에 관하여 다양한 단어를 사용하는데 살펴보면 거의 비슷하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미리 보여준 것”으로 번역, 방주가 세례였음을 미리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현대인 성경’은 “상징합니다”라고 번역하여 방주가 세례를 상징한다고 했다. ‘KJV’는 ‘figure(인형, 모형)를 사용하여 “방주는 세례의 모형”이라고 번역하였다. ‘NIV’는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이 물은 세례를 상징한다)”로, ‘CEV’는 “Those flood waters were like baptism(그 홍수는 세례와 같다.)”로 번역하였다. 이 모두를 종합해 보면 “세례는 노아 시대 사람들이 물 심판에서 구원받으려고 승선했던 방주와 같다.”거나, “방주가 물 가운데 있었기에 그것은 세례와 같다.”는 뜻이다. 즉, 세례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표 같은 상징이라는 말이다. 방주 안에 있어야만 물 심판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듯이 세례는 구원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구원하는 표”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세례는 구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필수과정이다. 왜냐하면 세례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그리스도로 옷 입어 죄를 가리며,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그분의 신부가 되는 길이다. 또한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해 죽어 장사 지낸 후 부활하는 것이고, 천국 입장이 가능한 구원의 표라는 것, 이것이 세례를 상징하는 성서의 가르침이다. 그만큼 세례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결코 소홀히 하지 말라.
임학균 전도자 / 등대 그리스도의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