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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후 믿음생활(3) (요한복음 21:18-23)
1. 오늘 이야기는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우리는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압니다. 젊어서는 내 맘대로 다닐 수 있었지만, 나이 들어 늙게 되면 내 맘대로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베드로가 어떻게 죽게 될 것인지를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팔을 벌린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도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고 들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도 있지만 나처럼 다시 살 수도 있다는 말씀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더 이상 피하려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2. 예수님에게서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곁에 있는 동료인 제자 요한이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 이 제자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였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매우 궁금하였습니다.
자신만 특별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혹시 자신에게 가장 힘든 것을 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기나 해라”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에게 기분 나쁘게 들릴 수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주님 재림할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자기는 장차 죽을 것인데, 요한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요한하고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너는 요한의 일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요한은 너하고는 격이 다르다는 식으로 들릴 수가 있습니다.
3. 이것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오고 간 대화입니다. 베드로는 자신과 제자 요한을 비교합니다.
요한 제자는 94세까지 살았습니다. 가장 오래 산 제자입니다. 요한 제자는 오래 살아 있으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베드로 제자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똑 같이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느냐 하여 잡혀 죽을 때에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 살다가 갔습니다. 오래 산 사람도 예수님을 따라 살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린 베드로도 예수님을 따라 살다가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그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우리도 종종 비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가 더 오래 다녔느냐를 말하기도 하고, 누가 더 헌금을 많이 하느냐를 말하기도 하고, 목사님이 누구를 더 신뢰하느냐를 말하기도 하고, 누가 더 기도를 잘 하느냐를 말하기도 합니다.
제자성경공부를 할 때입니다. 가르치다 보면,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하기에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법입니다. 비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가르치는 사람도 어느 수준에까지 이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가르치다 보면 수준으로 이끌어 올리기보다는 교인들의 수준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이유는 공부하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 수준을 낮추어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보면, 가르치는 저보다 배우는 교인들의 신앙이 훨씬 더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 혼자 잘난척할 뿐입니다. 가르친다고 하여 신앙이 훨씬 더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앙은 결코 비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오직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어떠한지는 자기 자신만이 아는 것입니다. 실낱 같은 신앙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과 연결이 된 것이기에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5. 오늘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말씀을 따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교회보다 저 교회가 더 낫다고 여기고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교단보다 저 교단이 더 낫다고 다른 교단으로 떠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머무느냐 떠나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든, 저기에 있든, 내가 살았든 죽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을 따르지 않은 사람이 저기에 가면 따르겠습니까?
6. 오늘날 기독교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옛날처럼 기도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인내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씨름하던 신앙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미국에 살기 때문인지 모두가 편안하고 안일하기만을 원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도 괜찮은 건가요? 기독교의 중심은 무엇인가요? 무엇 때문에 기독교라고 하는가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없이는 기독교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예수그리스도가 없이는 기독교의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십자가도 없고 부활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한 번 더 말씀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한 번 배반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걱정이 되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한 번 더 확인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면이 있습니다. 요한은 오직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습니다. 나중에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언을 했을 정도입니다. 베드로의 화끈한 자세보다도 끊임없이 사랑하는 그 마음이 더 무게감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요한보다는 베드로에게 더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기에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곧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7. 지난 주일에 아빠와 3살난 딸이 숨바꼭질하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과 같은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숨고 아빠가 찾는 것이라면 재미가 없습니다. 아빠는 딸이 어디 숨었는지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아빠를 위한 놀이가 아니고 딸을 위한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재미있는 것은 아빠가 숨고 3살난 딸이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딸은 정말 아빠를 찾고 싶습니다. 어디에 숨었는지 정말 궁금한 것입니다.
아빠는 딸이 찾지 못하도록 숨지 않습니다. 찾을 수 있도록 계속 사인을 주고 기침을 합니다. 그래서 찾으면 아빠랑 딸이 정말 신나 하고 즐거워합니다. 딸의 마음 속에 아빠가 행복을 심어주고 천국을 담아주는 것입니다.
평생을 잊지 않을 기억으로 남습니다. 살다가 힘이 들더라도 아빠와의 좋은 경험들이 그에게 힘이 됩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오시는 것은 마치 아빠가 숨어 있는 모습인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빠를 찾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인도 주시고 기침도 하시고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저는 주님께서 싸인을 주시는 것은 3번에 걸쳐 부활 후의 믿음생활에 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1) 신앙일기를 쓸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2) 지난 주일에는 우리의 눈이 열리도록 계속적으로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감동이 있어야 하고, 정성된 마음으로 성찬을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3) 오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신앙을 잘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신학자 반뷰렌이 “예수님 부활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내 안에 있는 다이아몬드”에 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내 안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 다이아몬드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8. 어떤 분이 “나의 선택”이라는 신앙일기를 썼습니다. 그는 28살에 아프리카 콩고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런데 콩고 내전 때에 살해당하여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콩고로 떠가기 전에 쓴 일기입니다. 그의 이름은 빌 맥체스입니다.
“아침 여덟 시, 나는 햄과 계란으로 마련된 아침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한 시가 되면 잘 구운 스테이크로 점심을 그리고 일과를 마친 후 다시 저녁을 들겠습니다.
방마다 전화가 있고,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는 거실과 예쁜 커튼으로 꾸며진 문, 그런 현대적인 집을 갖고 싶습니다. 사랑스런 것들로 잘 정돈된 아늑한 방, 스프링이 들어 있는 폭신한 안락의자, 그리고 좋은 텔레비전 한 대를 갖고 싶습니다.
나는 또 최신 유행의 조끼, 정장이 가득한 깔끔하고 멋진 최고급 옷장을 갖고 싶습니다. 크리스천은 좋은 것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인가요?
그 때 나는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갈릴리의 비천한 자 예수를 따르렴.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도 쉴만한 굴이 있으나, 나는 네게 잠자리도 줄 수 없구나. 내 자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자란다.”
수치심으로, 부끄러움으로 나는 고개를 떨구고 울부짖습니다 “어떻게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을 거절할 수 있는가? 그 분이 가셨던 길, 기도로 지새운 그 분의 수많은 밤들을 어찌 내가 잊을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그 분이 가신 길을 나도 가렵니다. 그 어떤 다른 길도 나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므로 이것이 나의 선택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나의 선택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무엇이 그로 안전한 미국 생활을 뒤로 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결정하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로 먹고 싶은 음식과 살고 싶은 집을 마다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9.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나를 위해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나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요? 주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선택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숨바꼭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찾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택을 해야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정권을 주었습니다. 서로 비교하지 말고 믿음으로 결단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다이아몬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참되게 살고 선하게 살고 거룩하게 사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이 우리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누가 죄 많은 내 인생을 불쌍히 여겨주나요? 누가 죽음의 종착역에서 내릴 수 밖에 없는 나에게 “우리의 종착역은 부활의 역입니다”라고 말해주나요?
예수님은 어디에 머무느냐에 마음을 두지 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 마음을 두고 살라고 하십니다.
다시 우리를 만나러 오신 주님을 날마다 다시 만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