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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가셨다.
18.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
19. 그들은 근심에 싸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예수께 말하기 시작하였다.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사람이다.
21.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 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막14:17-21)
17 When it was evening, Jesus came with the twelve disciples. 18 While they were at the table eating, Jesus said, “I tell you that one of you will betray me—one who is eating with me.”
19 The disciples were upset and began to ask him, one after the other, “Surely you don't mean me, do you?”
20 Jesus answered, “It will be one of you twelve, one who dips his bread in the dish with me. 21 The Son of Man will die as the Scriptures say he will; but how terrible for that man who will betray the Son of Man! It would have been better for that man if he had never been born!”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의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생명의 구원인데 구원은 의인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의란 말할 필요 없이 죄가 없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죄에 대한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이 순간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이 터진 것입니다.
실은 이 순간은 아주 복잡합니다.
내 죄를 발견한 것입니다.
내 죄가 얼마나 큰지!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의인이 되는 구원의 순간 우리는 우리의 의가 아닌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지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이 정도 쯤이야 했습니다.
스스로를 두고 나만큼은 법 없이 살 수 있는 의인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엄청난 죄 앞에서 대안조차 없다는 절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완전한 반전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 용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이란 죄에 대한 문제입니다.
죄를 인식하는 일이며, 그 죄로 인한 낙담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극적인 전환을 이르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죄에 대한 문제를 말했을 때에 불교 신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왜 그렇게 집착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선이면 어떻고 악이면 어떻냐는 것입니다.
마치 도사 같은 말을 했습니다.
불교에서 도를 닦아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그 집착을 극복해버리는 일입니다.
그들이 보리수 밑에서 도가 튼 순간에 선즉시악이 되며 악즉시선이 되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비중이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이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인 나에게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악몽입니다.
완전한 혼란이기 때문입니다.
악이 선이고, 선이 악이고!
사람들은 종교란 다 똑같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데 전혀 모르는 소리입니다.
또 무속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손바닥에 왕 자를 쓰고 다니던 대통령 후보와 스스로 점쟁이를 점쳐주는 왕무당이라고 자위하는 그의 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이런 무속에는 윤리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종 된 딸아이를 친척 집 남자 아이의 방에서 찾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정신이상 아이를 둔 사람이 그 병을 낫기 위한 무당의 처방을 들은 것입니다.
제 아들을 제 또래의 여자아이와 한 방에 합숙시키면 그 병이 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 제 집을 찾아온 친척 여자 아이를 아들 방에 가둔 것입니다.
무당의 말을 주목하면 그들은 이런 식입니다.
“화가 동쪽에 있으면 서쪽으로 가라”
그들에게 윤리라는 전제가 없습니다.
물리적인 재앙을 피해서 잘 도망 다니는 것이 그들의 주제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복적인 세속의 보장인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그랬지만 무속에 젖은 이들이 이 나라를 이끌었을 때 이 나라가 당하게 될 위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에게 헷갈리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무속신앙인의 머리에 안수를 한 목사들의 무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중요한 주제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대는 거짓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과제는 그들을 잘 구분하고 그들을 부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오해를 하는데 무조건 머리 조아리고 목사에 머리 조아리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적인 예리한 비판력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11.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결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행17:11)
그들을 분별하고 거부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따지고 보면 그 신앙 내부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력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당신은 거룩한 성전을 뒤집어 놓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편에서 진보적인 예수님을 공격하겠습니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또한 예수님도 주장의 근거가 같은 성경이다 보니 그 판단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막상 사랑과 정의라는 윤리가 없었습니다.
실은 그들은 하나님을 목 터지라고 부르다가도 세상의 실리가 있으면 무당 굿을 해도 그들을 용납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독재자들을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독재자들을 친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윤리의 문제를 중시하는 성경은 그 처음부터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의 본문도 유다를 통해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도 바로 그 윤리의 문제를 다루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노인 유치원 잘 굴리고 카페 잘 굴리고 교회에 피트니스장을 지어서 사람 끌게 하고 그런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윤리 문제를 이렇게 비중 있게 다루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지적을 주의해서 살피시면 금방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윤리와 우리가 알고 있는 윤리에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창세기가 다루는 죄의 문제를 본다면 그것은 먼저 사탄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말하면서 먼저 사탄을 이르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관과 전혀 다른 인간관을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악을 분별해내고 그를 따라서 행위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르는 죄란 영적 개입이 전제 된 것입니다.
인간은 대단히 미약해서 죄조차 스스로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신앙의 삶을 두고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치명적인 죄는 사탄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기독인이 이르는 죄란 내 악한 의지의 사건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자신을 허락한 일을 두고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정의하는 그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화과인지 사과인지 배인지 아니면 그것이 포도인지 그 과일이 무엇인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일 먹은 것이 모든 인류를 죽음으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사람 죽인 것도 아니고.......
믿는 우리가 이르는 죄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기준입니다.
이 말씀을 무시하는 일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실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재앙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말씀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지구 온도가 오르고 빙산은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야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거기에 사람들의 편의 시설을 확대하는 것을 문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박쥐는 어디로 갑니까?
그래서 박쥐들을 통해 코로나가 발생한 것입니다.
팬데믹으로 미국의 죽은 사람 90만 인도 50만 브라질 63만에 이릅니다.
바울은 엄중하게 이런 말을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7.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8.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딤전6:7,8)
그런데 교회들은 이 바울의 말씀을 간단하게 무시하는 것입니다.
식구마다 자가용 한 대씩을 타고 다니는 장로님을 복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십 채의 집을 가진 사람을 복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인류의 위기는 말씀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8.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사5:8)
소비와 소유의 확대가 이런 재앙을 낳은 것입니다.
섬세하게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일반적인 종교 상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엉뚱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2. 그들이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한다."(사58:2)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알기 좋아하고, 공의로운 판단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 즐거워서 금식합니다.
여기에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완전히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7.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5-7)
그들은 금식이 아닌 굶식을 한 것입니다.
진정한 금식은 정의의 회복과 사랑의 실천에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예를 들겠습니다.
유다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경우들이 허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한 번 그가 뚜렷하게 예수님께 반론을 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4.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장차 예수를 넘겨 줄 가룟 사람 유다가 말하였다.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요12:4,5)
그는 값나가는 향유를 무모하게 낭비한 여인을 향해 윤리적 문제 제기를 한 것입니다.
실은 고급 향우를 뒤집어쓰신 예수님을 향해 한 것입니다.
“지금도 저녁을 굶고 있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 돈으로 그들의 끼니를 해결해라!”
얼마나 선한 제안인가!
유다는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의 제안에 틀린 구석이 없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은 옳은 일을 했으며 그 녀의 일이 영원히 기념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하고 대제사장을 찾아간 것입니다.
생각 내키는 대로 소나무를 잡고 뿌리를 뽑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내 신념을 절대시하며 한 발짝 물러섬이 없이 하나님께 내 뜻을 강요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정교하게 말씀을 이해하고 그에 일치시키느냐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실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18. 그러나 주의 천사는 어찌하여 그렇게 자기의 이름을 묻느냐고 나무라면서 자기의 이름은 비밀이라고 하였다.(사13:18)
18 He replied, “Why do you ask my name? It is beyond understanding.”(NIV)
하나님의 이름은 이해를 뛰어넘기(beyond understanding) 때문입니다.
똑똑했던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윤리 봉사와 혼돈한 것입니다.
경제적인 고려가 치명적이었습니다.
17.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가셨다.
17 When it was evening, Jesus came with the twelve disciples.
*열두 제자와 함께
예수님은 유다가 앞으로 할 일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그 유다를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 앉혀두신 것입니다.
그를 그 자리에서 쫓아내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주님은 유다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신 것일까요?
17.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할 때에, 네가 그 악인을 깨우쳐 주지 않거나, 그 악인에게 말로 타일러서 그가 악한 길을 버리고 떠나 생명을 구원 받도록 경고해 주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실 때문에 죽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
19. 그러나 네가 악인을 깨우쳐 주었는데도, 그 악인이 그의 악한 행실과 그릇된 길을 버리고 돌아서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악행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네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20. 또 만약 의인이 지금까지 걸어온 올바른 길에서 떠나서 악한 일을 할 때에는, 내가 그 앞에 올무를 놓아, 그 의인 역시 죽게 할 것이다. 네가 그를 깨우쳐 주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지은 그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미 행한 의로운 행실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내가 너에게 묻겠다.
21. 그러나 의인이 범죄하지 않도록 네가 깨우쳐 주어서, 그 의인이 범죄하지 않았으면, 그는 경고를 달게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살게 되고, 너도 네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겔3:17-21)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겔3:18)
하나님은 이미 그의 미래를 선악 간에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언이 그 사람에게 변화의 기회를 닫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현재가 주어진 이상 그 현재에서 언제나 변화의 기회가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예언의 미래와 과거 사이에 사람이 끼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래는 정해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코웃음을 칠 것이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우리 눈에 하나님의 예언은 이미 정해진 닫힌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변화의 가능성으로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이런 모순을 고백하는 것은 내가 시간에 철저히 구속된 유한한 자의 논리를 가지고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유다는 그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까지 변화의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열 받친다면서 그 일을 못하지만 죄인으로 하여금 그 기회의 현재 앞에 서도록 죄인을 그 자리에 가만 놔두는 것이 죄인들에게 베풀어야하는 최상의 덕목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 인내는 피를 뽑으려다가 옆에서 잘 자라고 있는 벼를 뽑지 않게 할 것입니다.
27.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28.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29.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그것과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30. 거둘 때가 될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내버려 두어라. 거둘 때에, 내가 일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마13:27-30)
저는 목사와 장로의 싸움으로 교회가 두 패로 나누어지더니 엉뚱하게 집사님이 그 싸움판에 끼어든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정의파가 등장해서 교회 안에서 마구 피를 뽑다가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교회에 정 떨어진다고 말하는 경우를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처리하시도록 믿고 가만 놔두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18.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
18 While they were at the table eating, Jesus said, “I tell you that one of you will betray me—one who is eating with me.”
*유월절 절기
그들이 유월절을 맞아서 자리를 잡고 앉아 먹을 때였습니다.
주님께서 한 마디를 하셨는데 그 말씀이 즐거운 명절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의 비극은 유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에 의해 일어날 것입니다.
살인은 친근한 교제와 뒤섞여있었습니다.
가장 성스러운 주님과의 식탁은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와 뒤섞여 있었습니다.
명절이 빛과 어두움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날이 된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성스러운 날입니다.
헤롯의 군대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갓난 아들 딸 혹은 손자의 손녀의 목을 자른 것입니다.
주께서 나신 그 축하의 장소에 잔인한 피가 흘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간신히 그 난을 피해 애급으로 도망을 한 것입니다.
그 구원의 날은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날로 비쳐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의 절기들에는 그 역사성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성탄절에 예루살렘의 아이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기독교 신앙 본질의 주변부를 맴돌다가 성탄절을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주려고 굴뚝 타고 내려온 날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하늘의 축제가 땅의 축제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 날 사람들은 엄청나게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대지만 실은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날이 되고 만 것입니다.
주님은 유월절을 맞아서 해방의 즐거운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신앙이란 관계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도 그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마누라 치마끈을 잡고 천국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일정 옳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잡고 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의 관계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있어서 예수님만이 유일의 관계로 남아야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외에 모든 다른 관계들이 부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단순히 너는 나를 믿느냐 내가 말하는 곳으로 가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 관계를 부정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 외에 모든 관계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창12:1)
예수님도 그 문제를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21.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 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또한 그렇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서 부모를 죽일 것이다.(마10:21)
신앙은 오직 주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만 남기고 다른 관계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관계의 부정 의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믿는 사람들은 관계의 치명적 부정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 동료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배신할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과 같은 동료라고 여긴 적이 없던 한 강도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입니다.
누구도 그 강도를 구원의 대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42. "예수님, 예수님께서 그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4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23:42,43)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그 동료는 배신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강도는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
더욱이 예수님을 결정적으로 반역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지금 식사를 나누는 바로 그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찬을 나눈 사람인 것입니다.
그 성찬 자체가 성스러운 능력을 가져서 그 사람을 구원에 합당한 사람으로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지적인 판단과 의지적인 결단과 정적 동의가 문제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역할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나눈 사람이었습니다.
천국에 목사 한 사람이 입장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맨발로 뛰어가서 그를 환영하더라는 것입니다.
누구인가 “나도 목사할 걸.......” 했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목사가 얼마 만이냐! 천국 온 목사가 없었는데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랬다.” 하셨답니다.
교회들이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생명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화려한 카페 차리고 피트니스장 수영장 넓은 파킹랏을 늘리는 호객행위를 하니 고객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교회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규모 경제의 자본주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막상 맘몬에게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유대 성전도 주님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거둬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요2:16)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지적을 두고 당시의 제사장들과 상인들 사이에 부정적인 뒷거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생각입니다.
이 성전을 운영하는 데에 어떤 논리를 적용되었느냐가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서로 뒷돈을 챙긴 것은 윤리적인 문제라면 그들이 성전을 운영하는데 적용하는 논리는 신앙적인 문제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장논리를 성전에 적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십자가의 희생의 정신을 적용하느냐 경제 논리를 적용하느냐 그것이 교회의 내용을 더 결정으로 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헤롯이 부른 사람들은 신앙의 전문가들 즉 하나님과 늘 함께 밥 먹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주소를 정확하게 헤롯에게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4. 왕은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 놓고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그들에게 물어 보았다.
5. 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6. '너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통치자들 가운데서 가장 작지 않다. 네게서 통치자가 나올 것이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일 것이다.'"(마2:4-6)
그들은 헤롯과 주고받는 거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그들의 생계를 보장해주고 그들은 예수님의 정보를 독재자에게 제공한 것입니다.
그들은 장사를 했던 것입니다.
19. 그들은 근심에 싸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예수께 말하기 시작하였다.
19 The disciples were upset and began to ask him, one after the other, “Surely you don't mean me, do you?”
*나는 아니지요?
그들은 유월절을 맞아 음식을 먹으려다가 주님의 이 심각한 지적 앞에서 당황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뽑힌 12명은 엄청난 경쟁을 뚫고 주님에 의해서 뽑힌 사람들입니다.
12 명의 제자들은 차례로 서로를 훑어보았을 것입니다.
그 12 명 다 일가견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적이 있자 그 중에 나만큼은 보장할 수 있다고 나를 두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차례로 (one after the other) 주님께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두고 물은 것입니다.
“나는 아니지요?”
많은 경우 신앙인들이 성경을 보면서 혹은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2,000년 전에 유다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 사람이 12 제자 중 한 명으로 뽑혔다더라.
그 사람은 애초부터 아주 못 되먹었는데 결국 그가 나쁜 마음을 먹고 예수님을 은돈 몇 잎에 팔아먹었다더라.
그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성경의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나를 두고 “나는 유다가 아니지요?” 하고 하나님께 물어보라는 의미에서 유다를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은 먼저 나의 구원의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2,000년 전 유다에 대한 흥미 있는 기록이 아닙니다.
성경은 유다라고 불리는 나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입니다.
그 때에 저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도무지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 이상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수시로 주님 제가 혹시 유다 아니지요 묻고는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들수록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제대로 아시고 또 나를 책임지실 수 있는 신뢰의 대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덤으로 알게 된 사실은 가장 어려운 전도의 대상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를 알기가 어렵고 또 알더라도 나를 통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 것입니다.
실은 바울조차 그 자신을 두고 이 고백을 한 것입니다.
23.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7:23,24)
나로 인한 한계의 상황에서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한 것입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롬7:25)
그리고 나라는 영역에서 우리라는 영역으로 그 영역을 넓혀야하는 것입니다.
즉 이제는 우리라는 영역을 그리스도 안에서 의심해 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며 죄에 주저앉아 안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8.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눅3:8)
무속의 동기에서 손바닥에 왕 자를 쓰고 나왔어도 상관이 없는 우리 교회 원로목사님!
나는 점쟁이를 점 주어주는 용한 점쟁이라고 자칭해도 그 머리엔 안수해주는 더 용한 그 원로목사님!
그 우리 무리들이 지금 귀신 장난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이들이 존재하는 것은 여러분 신앙인들의 책임입니다.
전두환이를 여호수아라고 하는 사람을 존경한다는 여러분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가지고 알박기를 해서 파렴치한 경제 행위를 해도 그를 존경한다고 하고, 강단에서 빤쓰 내리라는 성희롱을 해도 헬렐레 라멘 하는 여러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전도의 대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입니다.
남을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우리입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그 복음을 들고 선교의 과제를 감당할 일입니다.
자신을 의심하라니 자기 분열에 빠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신앙이란 대단히 위험한 작업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은 그 위기의 낭떠러지에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바울조차 분열의 자기 한계를 경험하고 오직 성령을 의탁하는 그를 신뢰하는 것이 유일의 길이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23.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롬7:23-25)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사람이다.
20 Jesus answered, “It will be one of you twelve, one who dips his bread in the dish with me.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예수님과 같은 접시에 빵을 적신 자는 위선자였습니다.
그처럼 친한 척 쑈에 능한 사람입니다.
그는 방금 전에 대제사장을 찾아갔던 사람입니다.
11. 그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서 기뻐하여, 그에게 은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넘겨 줄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막14:11)
그는 대제사장들과 미리 약속을 한 다음에 다시 예수님과 식탁을 같이 한 것입니다.
그는 악한 마음을 감추고 같은 접시에 빵을 적시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범죄자는 더 태연한 척 할 것입니다.
자신을 모르는 채하면서 내가 그 사람이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11명도 그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유다를 잘 아시면서도 이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를 표현하시는가?
그에게 또 다시 최후의 기회를 주시는 것인가?
21.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 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21 The Son of Man will die as the Scriptures say he will; but how terrible for that man who will betray the Son of Man! It would have been better for that man if he had never been born!”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정해진 일입니다.
그 일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정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것이 정해지지 않은 것처럼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그 일이 예수님 안에서는 정해진 일이 아니기에 주님은 그 일을 두고 심각하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14:36)
주님은 이미 기록되어 있는 것과 기록된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자신의 나약한 의지 사이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 일은 정해졌으나 주님께서 말씀을 부정할 수 있도록 열려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대의 두 상황이 주님께 공존한 것입니다.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가 대제사장과 약속을 미리 했더라도 그 일이 그렇게 진행되는 듯이 보여도 그에게 다른 변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언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놀랍게도 그것은 닫힌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미래를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현재가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변화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을 인간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제한을 받고 있고 하나님은 시간의 제한을 뛰어넘어 계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끝없는 기회를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
주님은 마지막으로 두 불행한 사람을 이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피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고 돈을 챙긴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누가 더 불행한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유다가 불행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영광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승리는 비참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차라리 낳지 않은 것이 나을 뻔한 것입니다.
그는 유다서의 기록처럼 악을 통해서 주님의 사역을 위한 인정받을 역할을 감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책임져야 했던 것입니다.
탄생 자체가 저주스러운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