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관성묘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7길 35
(우) 03071(지번) 명륜3가 51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관성묘 (關聖廟)
지정(등록)일 1972.08.30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7길 35 (명륜3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이***
해제일 1991.12.03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관성묘 (關聖廟)
수량/면적 건물 1棟, 토지 31.6㎡
지정(등록)일 1974.01.15
소 재 지 서울 중구 동호로30길 2 (장충동2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장충동 관성묘 무신도 (奬忠洞關聖廟巫神圖)
수량/면적 4점
지정(등록)일 2017.04.13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서울역사박물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관성묘 (關聖廟)
지정(등록)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2가 613번지
관성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3가 (구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호)
관성묘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186-140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6호)
관성묘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2가 613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5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남원 관왕묘 (南原 關王廟)
지정(등록)일 1973.06.23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왕정동 51번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안동관왕묘 (安東關王廟)
수량/면적 5동
지정(등록)일 1982.02.24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악길 67-6 (태화동)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완도 고금도 관왕묘비 (莞島 古今島 關王廟碑)
수량/면적 높이 253cm, 너비 93cm
지정(등록)일 2018.04.19
소 재 지 전라남도 완도군 충무사길 86-31 (고금면)
- 내 용 : 관왕묘비(關王廟碑)는 이이명(李頣命)이 비문을 짓고, 이우항(李宇恒)이 글씨를 썼다. 비는 관왕묘의 건립 시기와 배경·유지 관리 과정 등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정유재란을 승전으로 이끌었던 이순신과 진린 장군의 행적을 담은 기록물로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사적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莞島 廟堂島 李忠武公 遺蹟)
수량/면적 4,959㎡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전남 완도군 고금면 세동84번길 86-31 (덕동리)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사단법인이충무공유적 고금도충무사보존위원회
관리자(관리단체) 완도군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의 군사들이 힘을 합해 왜군을 물리쳤던 장소이다.
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노량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1598)에 이순신이 약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을 쳤고, 그 해 7월에 명나라 장수 진린이 약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하였다. 가까이에 있던 이곳 묘당도에 진을 치면서 두 나라의 군사가 힘을 합하게 되었는데, 이후 7개월간 이곳은 조선과 명나라의 해군 본부가 되었다.
지금 이곳에는 이충무공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충무사가 있고, 보호하는 절의 의미를 띤 옥천사가 나란히 있다. 충무사는 진린이 꿈에 나타난 관운장을 제사지내어 장병들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 관왕묘에서 유래한다. 옥천사는 현종 7년(1666)에 처음 지어졌는데, 관왕묘를 보수공사하면서 그 옆에 수호와 제사를 맡게 하기 위해 암자 하나를 지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관왕상과 위패·각종 유물들이 바다에 던져졌고,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에 옮겨져 보관되었다. 광복 후에는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충무사를 짓고 이충무공을 모시게 되었다.
종합안내판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莞島 廟堂島 李忠武公 遺蹟
사적 제114호
유적은 관왕묘(關王廟) -> 탄보묘(誕報廟) -> 충무사(忠武祠)의 변천 과정을 지니고 있다. 1598년(선조 31)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관왕묘를 세웠다. 이후 1791년(정조 15) 탄보묘라 하였으며 사액묘우로 지정되었다. 1953년 관왕묘(탄보묘)의 옛 자리를 '충무사'라 개칭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적은 사당 · 동무 · 서무 · 동재 · 서재 · 관왕묘비 · 내삼문 · 중삼문 · 외삼문 · 홍살문 · 하마비 · 월송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 . 사당(祠堂)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관왕묘가 건립될 때에는 사당의 중심에 관우가 모셔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되었다.
1953년 충무사라 개칭되면서 충무공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979년 충무공의 영정을 아산 현충사와 같은 규격과 모습으로 제작하여 봉안한 후 관리하고 있다.
2. 동무(東廡)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리포진 56대 첨사였으며,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순국한 이영남(李英男)을 1959년 추배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완도 고금도 관왕묘비(關王廟碑)
서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비는 1713년(숙종 39) 건립되었으며, 이이명(李頤命)이 비문을 짓고, 이우항(李宇恒)이 글씨를 썼다. 관왕묘의 건립 시기와 배경 · 유지 관리 과정 등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정유 재란을 승전으로 이끌었던 이순신과 진린 장군의 행적을 담은 기록물로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 253cm, 너비 93cm이다.
4. 우수영 전진도첩(右水營 戰陣圖帖)
동재에 소장되어 있다. 전진도첩은 전라우수영의 군사조직과 운영실태, 어떤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본 자료는 실제 조선후기 우수영이 어떤 조직과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크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5. 하마비(下馬碑)
충무사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건립년대는 병오년에 중건하였다고만 새겨져 있어 정확히 어느 시기인지 알 수 없다. 높이는 120cm이다.
6. 월송대(月松臺)
충무사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순신의 유해가 임시로 안장되었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성제묘 (聖帝廟) 편액 顯聖殿
수량/면적 건물 1棟, 토지 21.4㎡
지정(등록)일 1972.05.25
소 재 지 서울 중구 동호로 385-1 (방산동)
중국 삼국시대의 이름난 장군인 관우 운장의 영정을 모신 관왕묘로 서울의 옛성 동·서·남·북 4곳에 있던 관왕묘 중 하나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4쪽 여닫이문을 달았고 안쪽에 관우 부부상을 모시고 있다.
성제묘는 조선시대의 민속신앙과 의식구조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성제묘는 삼국지에 나오는 關雲長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서울의 옛성 안 동서남북 4곳에 있던 關王廟 중 하나이다. 이것은 조선왕조에서 세운 관왕묘와는 다른 것이다. 정면 3間 맞배지붕의 목조 건물로 낮고 긴 臺石壇 위에 사방 2.7m의 단층으로 앞에는 4쪽의 분합을 달았고 맞은편 벽에는 小寶蓋가 있는 龕室 속에 관우 부부상이 걸려 있다. 방산시장 안에 있는 이 건물은 관제 東廟와는 규모를 비교할 수 없지만 조선 시대 민속 신앙 및 의식 구조를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보물
서울 동관왕묘 (서울 東關王廟)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난계로27길 84 (숭인동) / (지번)서울 종로구 숭인2동 238-1
시 대 조선 선조 34년(1601)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서울 흥인지문(보물) 밖에 있는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중국 촉한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에게 제사지내는 묘이다. 동관왕묘를 짓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인데,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다.
동관왕묘는 선조 32년(1599)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601년에 완성되었다.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친족인 관평, 주창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6칸이고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지붕 무게를 받치는 장식은 새의 부리처럼 뻗어 나오는 익공계 양식이다.
평면상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데, 이와 같은 특징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관성묘 (關聖廟)
수량/면적 건물 1棟, 토지 31.6㎡
지정(등록)일 1974.01.15
소 재 지 서울 중구 동호로30길 2 (장충동2가)
관성묘는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신당의 일종으로, 관왕묘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왜구를 물리친 것이 관우 장군신의 도움이라 여기던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우리나라 관성묘의 효시인 ‘남묘’가 서울에 처음 건립되었고, 이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왕의 명을 받들어 전국적으로 건립하여 수호신당으로 섬기에 되었다고 한다.
당은 16평 넓이의 기와 건물로, 내부로 들어가면 정면에 18세기 화풍으로 그려 놓은 관우장군과 그 부인의 그림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고, 그 왼쪽에 또 다른 무신도가 걸려있다. 한때는 굿당으로 섬겨 무당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나 요즘은 거의 굿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주택이 들어서면서 예전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 후기 군사주둔지인 군영을 통치하던 남영(南營)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영에서 관할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조말 고종의 후궁이었던 엄비(嚴妃)가 세웠다고 전하고 있으며, 호국신앙과 더불어 불교·유교 등 다양한 성격이 혼합된 관제신앙이 민간신앙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