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모든 시조 : 임채성 시인 ♣
-2019년 3월 23일 토요일-
달력을 새로 걸며
등 돌린 애인에겐
눈길조차 주지 마라
삼백예순다섯 여인이 줄을 서 기다리는데
설렘도 기대도 없다면
너,
사내도 아니다
낚시론
1.
도다리 사투를 본다, 팽팽한 줄 끝에서
한 생의 물음이 꿰인 미늘을 벗기 전엔
입술에 피가 흘러도 헤어날 길은 없다
2.
둘러보면 이 세상은 하릴없는 낚시터다
오가는 길목마다 미끼 슬쩍 던져놓고
눈이 먼 월척 한 마리 끈질기게 기다리는,
3.
햇발도 찌를 내린 무의도 갯바위 언덕
구름 몇 점 허우적대는 불혹의 수면 위로
낚는지 낚이는지 모를 또 하루가 흐른다
카피, 라이터
광고회사 신입 시절 광고주 인사 갔죠
갓 찍은 명함 주며 카피라이터라 했어요
남의 글 베껴 쓰는 일?
복사기냐며 웃대요
식은 커피 다시 끓어도 웃으며 대답하길
코피를 쏟을 때까지 문안 뽑는 일이라고,
오늘도 문안 여쭈러
잠시잠깐 들렀다고
살다보니 복사기가 도처에 있더군요
TV에도 신문에도 서점과 인터넷에도
거리엔 같은 얼굴에
같은 옷의 사람들
생각까지 복제하는 디지털 카피시대
내 시는 그 무엇을 베껴 쓴 판박일까
붕어 살 한 점도 없는
붕어빵도 그러거니
바람의 기사
-돈키호테가 둘시네아에게
미치게 보고 싶소, 뼛속 시린 새벽이면
풍차거인 마주하던 대관령 등마루에서
하나 된 우리의 입술, 그 밤 잊지 못하오
풋잠 깬 공주 눈엔 태백성이 반짝였소
서로의 몸 비비는 양 떼들 울음 뒤로
하늘도 산을 안은 듯 대기가 뜨거웠소
한데 이젠 겨울이오, 인적 끊긴 산정에는
로시난테 갈기 같은 마른 풀만 듬성하오
나는 또 그 말에 올라 북녘으로 길을 잡소
백두대간 어디쯤에 그대 앉아 계실까
폭설이 지운 국도 철조망이 막아서도
숫눈길 달려가겠소, 한라에서 백두까지
♠ 나누기 ♠
임채성 시인은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조집『세렝게티를 꿈꾸며』와 현대시조 100인 선집『지 에이 피』및『왼바라기』등이 있습니다.『왼바라기』에서 네 편을 보내드립니다.
「달력을 새로 걸며」를 읽습니다. 새 달력을 보면 무작정 가는 세월이 안타깝고 아쉽지요.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등 돌린 애인에겐/ 눈길조차 주지 마라’라고 일러줍니다. 이미 떠난 이에게 미련을 가지는 일은 부질없다는 뜻이지요. 왜냐고요? ‘삼백예순다섯 여인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중히 살아갈 ‘삼백예순다섯’날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지난 시간을, 떠나버린 애인을 두고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설렘도 기대도 없다면/
너,/ 사내도 아니다‘라는 결구가 그 까닭을 잘 말해주고 있군요.
「낚시론」은 한 편의 인생론입니다. ‘도다리 사투를 본다, 팽팽한 줄 끝에서’라는 첫줄부터 긴장감이 고조됩니다. 미세한 감각의 더듬이로 형용하고 있는 ‘한 생의 물음이 꿰인 미늘을 벗기 전엔/ 입술에 피가 흘러도 헤어날 길은 없다’라는 진술에서 삶의 가파르고도 저린 순간과 맞닥뜨립니다. 화자는 또한‘둘러보면 이 세상은 하릴없는 낚시터’여서 ‘오가는 길목마다 미끼 슬쩍 던져놓고/ 눈이 먼 월척 한 마리 끈질기게 기다’린다라고 말합니다. 끝수에서‘햇발도 찌를 내린 무의도 갯바위 언덕/ 구름 몇 점 허우적대는 불혹의 수면’을 바라보면서 ‘낚는지 낚이는지 모를 또 하루가 흐’르는 것을 관조하고 있군요. 때로 이런 여유로운 시간을 통해 재충전한다면 삶의 활력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겠지요.
「카피, 라이터」는 특유의 화술을 보입니다. ‘광고회사 신입 시절 광고주 인사 ’가서‘갓 찍은 명함 주며 카피라이터라 했’더니 ‘남의 글 베껴 쓰는 일?/ 복사기냐며 웃’는 광고주와 대면합니다. 그때 화자는 기지를 발휘해 ‘식은 커피 다시 끓어도 웃으며 대답하길/ 코피를 쏟을 때까지 문안 뽑는 일이라’면서 ‘오늘도 문안 여쭈러/ 잠시잠깐 들렀다고’고 답합니다. 여기서 ‘문안’이라는 시어가 묘하게 쓰였군요. 그러면서 혼잣말을 이어갑니다. ‘살다보니 복사기가 도처에 있더군요/ TV에도 신문에도 서점과 인터넷에도/ 거리엔 같은 얼굴에/ 같은 옷의 사람들’이라고요. 또한 ‘생각까지 복제하는 디지털 카피시대’에 자신이 쓰는 시를 생각합니다. ‘내 시는 그 무엇을 베껴 쓴 판박일까’라고 되뇌다가‘붕어 살 한 점도 없는/ 붕어빵도 그러거니’라고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을 보입니다.
「바람의 기사」에는‘돈키호테가 둘시네아에게’라는 부제가 있습니다. 이 작품의 특징은 배경이 혼재해 있고, 서사구조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점이 이 시편을 더욱 흥미롭게 합니다. 돈키호테가 둘시네아에게 하는 말이면서 결국 통일에의 염원을 담고 있기에 이채롭군요. ‘미치게 보고 싶소, 뼛속 시린 새벽이면/ 풍차거인 마주하던 대관령 등마루에서/ 하나 된 우리의 입술, 그 밤 잊지 못하오’라는 고백이 실감실정입니다. 그렇기에‘풋잠 깬 공주 눈엔 태백성이 반짝였소/ 서로의 몸 비비는 양 떼들 울음 뒤로/ 하늘도 산을 안은 듯 대기가 뜨거웠소’라는 대목도 울림이 큽니다. 그리고 ‘한데 이젠 겨울이오, 인적 끊긴 산정에는/ 로시난테 갈기 같은 마른 풀만 듬성하오’라면서 ‘나는 또 그 말에 올라 북녘으로 길을 잡’겠다고 말합니다. 돈키호테는 둘시네아를 생각하면서 ‘백두대간 어디쯤에 그대 앉아 계실까’어림짐작하며‘폭설이 지운 국도 철조망이 막아서’더라도 한라에서 백두까지‘숫눈길 달려가겠’다고 말합니다. 실로 남북이 하나 되는 일은‘미치게 보고 싶은 일’인만큼 뜨거운 열망이 평화로이 이루어질 날을 고대해봅니다.
임채성 시인의 감각과 개성은 남다른 데가 있지요. 우리를 둘러싼 삶과 세계를 직시하고 한 편의 시조로 형상화하는 일에 공을 들입니다. 스케일이 엿보이는 만큼 더욱 활달한 보법과 치열한 쟁투로 ‘또 다른 목소리’를 부단히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2019년 3월 23일 <세모시> 이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