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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및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위 그림은 65여 년 전 그러니까 1950년대 10여 년간 분강촌(분천동ㆍ부내) 윗마에 존재했던 전설의 물레방간 전경이다. 당시 물레방간의 정확한 명칭은 '물레방앗간 정미소' 혹은 '물레정미소'라고 불렀다. 실제 존재했던 물레방앗간 정미소는 1959년에 터진 대형 안전사고와 전국을 강타한 제14호 태풍 사라호로 인해 작동이 완전히 멈추면서 기능 또한 상실했다. 특히 애일당 아래에 놓여 있던 긴 수로의 파손은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물레방앗간의 형체는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물레방앗간 정미소가 있던 주변 일대를 발음하기 쉬운 "물레방간"이라고 그냥 불렀다.
농암 이현보의 고조부인 고려 말엽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낸 분강촌 입향시조入鄕始祖 이헌李軒 공이 670여 년 전에 정착한 부내는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인해 도산구곡의 절반과 함께 낙강 속으로 영원히 안치되었다. 도산골 선조들의 빛나는 문화 유산과 터전들이 강물 속으로 하루 아침에 사라진 것은 두고두고 참으로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위 그림은 도봉 이택 화가(79ㆍ교육자 및 전 화랑교육원 원장ㆍ선대인의 함자는 이학구이며 농암종택 16대 종손 이용구 선생의 조카)가 옛날 물레방간을 회상하며 그린 "부내 물레방간" 광경이다. 필자가 본 수필에 삽입하기 위하여 정중히 요청했더니 감사하게도 옛시절을 떠올리며 마치 진경산수화처럼 그려서 보내주었다.
아래 사진 또한 1964년 이택 화가가 물레방간 바로 아래 빨레터 위에서 친지들과 함께 한 추억의 풍경이다. 사진 왼편 강가에 작은 산처럼 하늘로 높이 솟아 있는 큰 왕버들나무가 그립게 다가오며 객향에서 떠도는 나그네의 심금을 울린다. 이택 형님과 수몰(1976) 전 고향 얘기를 종종 나누며 거친 세상을 무디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데에는 이제 내 삶이 청춘을 지나 수필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아~ 어디서 무엇이 되어 옛 부내를 다시 만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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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 선생이 시조 시를 쓰고 홍난파 선생이 음색을 고른 "옛동산에 올라"가 처연하게 들려온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서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은 다 옛 시인의 허사로다. 여기에 서 있던 그 큰 소나무는 베어지고 없구려. 지팡이 도로 짚고 산 기슭으로 돌아서니 어느해 바람과 비에선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는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려]
아 ~ 부내 !
분강과 들과 바위와 정령들은 유구히 흐르는 깊은 강물 속으로 영원히 안치되었다. 청고개, 비밑, 앞들(前坪), 수루미, 밀양대, 행암대, 구당나무, 천방, 솔밭, 새당나무, 성황당, 실거랑, 통소, 구여울, 분천바위, 감퇴바위, 쌍암, 강둔덕, 양수장, 물레방간, 빨래터, 우물터, 왕버들나무, 신작로, 미나리깡, 뒤웅굴, 큰웅굴, 배꼽마당, 분강서원(농암종택), 애일당, 강각, 농암바위, 사자바위, 자리바위, 코끼리바위 등은 전설 속의 풍경으로만 남았다. 이제는 옛사람들도 볼 길이 없다. 670여 년 전 우리 입향시조 소윤공 이헌(李軒)공이 분강촌에 터전을 잡기 이전에도 어쩌면 이 산천은 깊은 강물 속에서 지금처럼 깊이 잠들어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월이 강물처럼 다시 천 년을 흘러간 먼 훗날 분강 속에 깊이 잠들었던 정령들이 깨어날 때 우리 입향조 후손들이 다시 이 분강촌으로 흘러들어오리라.
♤그림 설명(caption) : 부내ㆍ분강촌汾江村ㆍ분천汾川은 모두 같은 지명이다. 이는 농암 시대에도 그대로 사용했던 전설적인 동네 이름이다. 이 세 개 명칭에서 나오는 "부" 또는 "분"은 클 "분汾" 자에서 유래된 말이다. 분천(汾川)은 부내의 한자식 표기이다. 클 분의 훈은 크고 넓고 많고 성하다는 뜻이다. 즉, 강이 크고 넓고 물이 많고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강汾江이 되었다.
위 그림은 분강촌을 실물처럼 옮겨 놓은 진경산수화로 2014년 유산 김영환 선생의 "분천마을도"이다. 1970년대 우리가 도산국민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의 분강촌을 그대로 재현한 아름다운 산수화이다. 분천마을도는 수몰 전 우리가 살던 분천동을 정밀하게 그려 놓은 사진과 다를 바 없는 실경산수화이다.
물레방간이 있던 위치는 그림 중앙 솔밭과 신작로가 만나는 지역 아래 물가 언덕에 자리했다. 그림에서 강가에 큰바위가 있고 한문으로 "농암"이라고 써져 있는 바로 아래 지역 강변 언덕에 물레방간이 있었다. 그림 속에는 왼편 상단에 분강 아래로 여울져서 부포로 흘러가는 구여울의 전경까지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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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강촌의 수많은 명물 지명 가운데 하나가 물레방간이다. 원래 물레방앗간이 표준어이지만 마을 사람들이 그냥 물레방간이라고 했다. 이 말 속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었던 주변 일대를 통칭해서 부르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물레방간을 빼고는 부내를 말할 수 없을 만큼 물레방간은 부내 동네의 전설적인 지명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분강촌에서 태어나서 12년 반 동안만 이곳에서 살았다. 다시말해 1975년 8월까지만 부내에서 보낸후 수몰환경으로 인해 5학년 2학기부터는 분천동 아이들이 단천으로 이건한 도산국민학교 대신 온혜국민학교로 강제 편입되면서 마당재 너머 온혜 중계 마을로 이사를 갔다.
난생 처음 타향살이에 접어든 것이다. 그때 이사를 간 곳은 온혜국민학교 왼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퇴계 선생 태실이 있는 노송정 종택 바로 앞에 위치한 큰 고택이었는데 이 집 마당에 수백 년 된 커다란 향나무가 편평하게 앉아 있어서 제법 운치가 있었다. 여기에서 분자 누님과 함께 작은 방을 얻어서 생활했는데 반갑게도 옆방에 새벽할배 손자인 재한이 아재도 도산중학교에 다니느라 풍천으로 이사를 간 본가에서 혼자 나와 자치를 하고 있었다. 그때 심정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고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의지했다. 나는 아재 방에서 잠을 잘 때도 많았다. 요즘도 그때 이야기를 가끔씩 나누곤 한다.
[온혜국민학교는 온계(온계촌ㆍ중리ㆍ중마ㆍ중계 모두 같은 지명) 마을에 위치해 있다. 온계는 상계(상촌)와 합강 중간 마을이다. 중계 가운데서도 지금 시장이 위치한 곳을 청계마을이라고 한다. 사철 맑은 냇물이 흐른다는 말이다. 도산면사무소 쪽으로 내려가면 운곡과 태자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개천물이 만나는 합강이 나온다. 온계마을은 약 550년 전 퇴계 선생의 조부인 이계양(노송정ㆍ1424~1488)공이 입향(입향시조)한 동네로 노송정 종택 안에는 퇴계의 태실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변에 고택이 많이 남아있는 온혜 문화의 중심 마실이다]
여하간 유년시절 수몰로 인해 받은 엄청난 상실감과 깊은 절망감은 나로 하여금 평생 동안 잠재의식과 정서 속에 향수를 달고 살게 만들었다. 아마 그때 부내를 떠나간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하리라. 모든 것이 어수선한 가운데 물은 점점 차오르고 조상 때부터 수백 년 동안 터전을 잡고 살아오던 고향 마을을 떠나 낯설고 힘겨운 타지에서 새로운 둥지를 틀어야 하는 막막하고도 절박한 처지에 있던 상황인지라 동네의 전체 분위기는 이루말할 수 없을 만큼 침울하고 무거웠다. 어린 안목으로 보고 생각했던 결코 변할 수 없는 산천초목들이 수몰로 인해 산산이 허물어지고 부서지는 아픈 현장을 지켜보면서 '영원한 것은 없다' 는 충격으로 인해 허탈한 트라우마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였지만 강물에 잠겨지는 부내 동네가 보고싶어 이따금씩 산을 넘어 넘티재까지 혼자가서 뒷산에 올라 턱을 괴고 앉아 물 속으로 들어가는 고향 산야를 한동안 지켜보고 오기도 했다.
결코 길지 않은 세월을 분강촌에서 살면서 이른 봄과 겨울의 일부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이 물레방간과 양수장 앞 강변 그리고 통소 주변이었으며 놀이공간과 약속장소로 많이 활용한 곳도 이곳 물레방간 근처였다.
《물레방간 이외 또 다른 놀이마당으로는 애일당과 분강서원, 천방둑 옆에 있는 솔밭 그리고 밀양대에 만든 축구장ㆍ야구장 ㆍ권투장에서 놀았다. 가끔씩은 고숫빠 큰 공글 밑에서 가재와 버들뭉치를 잡기도 했다. 밀양대는 우선 넓고 잔디가 좋았다. 어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편안함도 있었다. 우리들은 울퉁불퉁한 잔디밭에 있는 크고 작은 돌을 모두 들어내고 땅을 평평하게 고르게 만든 다음 미류나무를 베어와서 축구 골대를 만들었다. "당시 축구는 단연 최고의 놀이였다. 말레이시아가 주최하는 메르데카컵에서 버마(1989년 미얀마로 국호 변경) 국가대표와 치르는 결승전은 월드컵의 존재를 잘 몰랐던 어린시절이라 최고의 시합으로 여겨졌다. 이회택, 차범근, 김재한, 김진국, 이영무, 황재만 그리고 골기퍼 이세연, 변호영 등 기라성같은 전설적인 선수들이 아시아의 축구 맹주를 만든 주인공들이였다. 박정희 대통령도 워낙 축구를 좋아해서인지 이 때 말련에 뒤질세라 "박 대통령 컵(일명 박스컵)국제 축구대회"를 만들었는데 이 대회에 이따금씩 유럽 혹은 남미팀들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은 주최국의 이점을 살려 화랑과 충무 두 개 팀을 참가시켜 탈락의 리스크를 줄이는 가운데 국민들의 열띤 성원에 부합하고자 했다.
부내는 당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었다. 수몰지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랫마 억이(춘당 함자는 조태현)형 집에서 주기적으로 안동에 나가서 배터리를 충전해와서 금성사 미닫이 흑백 텔레비전을 가동시켰다. 축구 경기라도 있는 날에는 안방은 의례히 어른들 자리였고 마당은 청년들이 차지했으며 우리들은 마당 둘레에 서있는 복숭아나무나 살구나무 위에 올라가서 작은 키를 극복하곤 했다. 동네에서 TV가 하나 뿐이다보니 축구시합이 아니더라도 김일 프로레슬링이나 꽃피는 팔도강산, 에루야, 웃으면 복이와요 등과 같은 인기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이 집 마당의 지신들이 밟혀서 숨이 넘어갈 만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후 윗마(윗마을ㆍ신작로 윗쪽 마실)에 TV 한 대가 더 생겨서 신작로를 가운데 두고 위 아래 동네 간에 세력균형을 이루는가 싶더니 곧 수몰이 되는 바람에 TV에 대한 더 이상의 동화 같은 얘기들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우리는 밀양대에서 흡사 바이킹처럼 놀았다. 놀이는 격렬했고 이후 갖는 회식 또한 세레모니가 있는 멋진 식사였다. 축구나 야구 놀이를 한 후에는 반드시 미류나무 옆에 있는 아무 밭이나 들어가서 감자나 땅콩을 되는대로 서리한 후 감자꾸지를 하여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해먹었다. 감자꾸지는 기록없는 구전 매뉴얼로 무형 문화재처럼 용하게도 잘 전승되어 내려왔다.
전설적인 감자꾸지 레시피를 한 번 열거해보자. 적당히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걸치고 그 위에 동그랗고 작은 자갈을 수북이 올린다. 나무에 불을 지펴 이윽고 자갈이 벌겋게 달구어지면 감자를 올린후 쑥을 덮고 모래로 다시 봉한다. 쑥을 덮는 이유는 밀봉효과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향긋한 쑥냄새가 감자로 스며드는 맛난 훈제효과를 내기위해서다.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막대기로 작은 구멍을 내서 그 속으로 적당히 물을 부어 수분을 공급한 뒤 또 한바탕 한참 기마전을 하고 오면 멋진 감자꾸지 파티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먹기 전에 "고씨네"를 불러서 먼저 준 후 널찍한 큰 돌에 무작위로 고른 하나의 감자를 대따 쳐서 제대로 익었는지를 확인한 뒤에 식사를 시작한다. 이것이 야생의 조리 매뉴얼이자, 의식인 것이다.
아름다운 식사가 끝나면 통소나 감퇴바위 밑으로 가서 해질녘까지 목욕을 하면서 놀다보면 찬란한 하루가 행복하게 지나갔다. 특히 밀양대는 미류나무가 많았고 또 미류나무 사이에 부드러운 모래도 많았다. 우리는 미류나무가 정사각형으로 서 있는 장소에다가 권투장을 만들어 시합을 했다. 그때 대장은 오연이 할배와 해기 형님이었다. 당시 둘은 윗마와 아랫마(아랫마을ㆍ신작로 아랫쪽 마실) 아이들을 지배하는 양대파 두목으로 우리들의 보스였다. 1974년과 1975년은 홍수환, 유재두 등 걸출한 권투선수들이 연이어 세계챔피언이 되어서 당시 복싱의 인기가 종가 배꼽마당의 솟을대문보다도 더 높았다. 우리는 집에서 훔쳐낸 새끼줄을 밀양대 미류나무 밭으로 가지고 가서 정사각형으로 서있는 네 개의 미류나무 기둥에 동여매고 홍수환 선수 폼을 흉내내며 죽기살기로 사마귀처럼 붙어서 싸웠다.
어떤 놈이 하나 둘 셋 넷... 하고 육십까지 큰 소리로 헤아린 후 검둥고무신을 양손으로 죽자고 "딱딱" 치면 1회전이 끝나는 식이었다. 그러면 또 어떤 놈은 엎드려 있고 선수는 그 놈 등에 앉아서 조금 쉬다가 또 그 짓을 3회전까지 계속 했다. 여하간에 비슷하게나마 진짜 시합 마냥 흉내는 다 냈다. 권투 장갑은 방학 때 도회지에 나가사는 친척들 집에 놀러다녀올 때 빨간 돼지 저금통을 다 털어가서 장만해온 것이다. 요즘 넷플릭스 최고 흥행작인 오징어게임(부내에서는 삼년고개ㆍ팔자놀이ㆍ이까놀이ㆍ오징어놀이라고 했다)은 추수가 끝난 뒤 신작로 너머에 있는 큰 배추밭에서 하도 많이 해서 신물이 난 놀이기도 했다. 부내에 살 때 그 당시에도 우리가 즐겨했던 오징어놀이가 얼마나 거칠고 과격했는지 그 튼튼한 나이롱 옷이 다 찢어지고 우와끼(우와기ㆍ윗도리)옷도 다 타지고(꿰맨 데가 터짐)해서 분자 누님한테 종아리도 많이 맞았다. 늘 대장은 윗마 사는 영월할매 자제인 오연이 할배와 아랫마 성기형님 동생인 해기 형님이었다. 그 다음 보스를 이어받은 대장이 윗마 분강서원 사는 문희 형과 아랫마 중구 형이었다. 나는 아랫마, 윗마를 천하 통일(동네 통일)할 수 있었던 기회를 마을이 물 속에 잠기는 바람에 영원히 날려버렸다.
그 시절이 그립다. 밤낮없이 즐거웠고 아무 걱정도 없이 도산서당과 애일당에서 천자문 배우고 학교가기 싫으면 애일당 위 강각 빈터나 토째비골 안으로 올라가서 중간학교 하고 양수장 옆 강변 솔밭에서 한여름 휘영청한 밝은 달밤에 소나무에 남포등 걸어놓고 4H 형님들과 누님들에게 무용과 노래도 배우고 봄이면 뒷동산에 올라가서 참꽃 꺾고 다람쥐도 원수진 것처럼 쫓아다니고 오뉴월에 접어들면 물레방간과 통소, 구여울, 밀양대를 헤저으며 살다시피하고 가을 되면 우릉골 할매네 뒷산에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올라가서 갈비 끌고 청소깝 잘라서 겨울 땔감 준비하고 겨울이면 덕개할매네 집 옆에 있는 미나리깡이나 분강에 나가서 시겐또(시게또) 타고... 그것도 싫증나면 잘 익은 낙강 얼음을 굳이 뚫어 강물 속에서 겨울잠을 잘 자고 있는 애먼 고기들을 작살로 찌르면 난데없는 날벼락에 통소 고기들이 놀라서 날 살려라 소리치며 물레방간 쪽이나 구여울 쪽으로 줄행랑 치고... 아~ 무엇이 무상하고 서글프고 그리워져 눈물이 나오는가.
"아름답던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다시 올 수는 없지만 잊을 수는 없어라.
꿈이었다고 가버렸다고 안개 속이라해도.
꿈처럼 아름답던 그 시절은 눈물겹게 사라져.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그때 우리가 하굣길 애일당 앞에서 늘 떼창을 지어 부르던 가수 이용복 선생의 "어린시절"처럼 모든 것이 꿈결처럼 눈물겹게 다 사라졌다.
하지만 유년시절 함께 했던 부내가 내 인생에 미친 아름다운 정신과 맑은 삶의 궤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은혜와 축복받은 인생으로 나를 인도했다. 맑은 강과 청랭한 산과 유순한 들판은 모든 생명들의 원천이 되며 그들의 정서에 선한 영감을 준다. 나는 유년시절 분강촌에서 감사하게도 그 모든 것을 자연으로부터 선물처럼 고스란히 넘겨 받았다.》
♤그림 설명(caption) : 분강촌의 역사는 고려 말엽 입향시조인 군기시소윤을 지낸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 공 때부터 시작된다. 그림은 분천동 아랫마을에 살았던 조각 예술가 종친 재홍이 아재(75ㆍ2012년 대구운암중 교장 퇴직)가 2020년에 그린 수몰 전 1970년대의 분강촌 전경이다. 그림 하단에 보이는 무성한 강물은 분강이다. 그림 오른편 강가로 300여 미터 올라가면 물레방간이 있었다. 그림 왼편 강물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구여울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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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위에서 시작했던 부내 물레방간 얘기로 돌아가본다. 우리 세대(60세 이하)들은 실제로 물레방간을 보지는 못했다. 수몰 전 부내에 살 때만 해도 "정말 물레방간이 존재하기나 했는지" 있었으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활용되었으며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왜 사라졌는지" 이 모든 것이 궁금할 법도 했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냥 부모님과 구당나무와 애일당처럼 우리 곁에서 모든 것들이 영원히 그리고 당연히 있을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늘 옆에 있는 것들은 너무나 친숙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소중함을 잘 모른다. 없어져보아야 소중함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래서 "있을 때 잘 하라"는 명언이 나왔는가 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물레방간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친숙하고 자연스럽고 입과 귀에 무르익은 이름이었던가. 부내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마치 물레방간이 돌아가는 것을 직접 본 것처럼 그냥 자연스럽게 물레방간이라고 부르고 그 아래 강물에서 멱을 감고 빨래를 하고 낚시를 하고 강둑 위에서 잔디씨를 훑고 염소와 누렁소에게 풀을 뜯기고 유원지처럼 이곳에 소풍도 오고(도산국민학교 4학년 때 이곳에 소풍을 왔다. 온혜국민학교 학생들과 타지역 일반 사람들도 이곳에 자주 소풍을 왔다) 버들나무와 버들강아지를 꺾어서 버들피리도 불고 먹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물레방간이 우리들 곁에서 우리들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리라고 그냥 무념하게 믿었었다. 이러한 부내가 농암 선생 고조부인 분강촌 입향조(1350여 년경에 입향해서 1976년에 안동댐 준공으로 수몰됨) 이헌 공이 터전을 잡은 이래 626여 년 동안 쌓아온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분강 속에 묻는 데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참으로 애석하고 무상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우리들이 도산국민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흔적없이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부내의 행정구역 변천 역사는 구한말(1863~1910: 흥선대원군 시절부터 경술국치 이전까지)에는 예안군 의동면 지역에 속했으며 당시에도 부내, 분천(汾川), 분강촌(汾江村) 등으로 불렀다. 이후 일제 치하기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조치에 따라 분천동(리)으로 변경되면서 안동군 도산면으로 편입되었다. 부내는 지금 안동시에 속한다. 이는 지난 1995년 행정구역이 시ㆍ군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안동댐(1971년 착공~1976년 준공) 건설로 마을이 수몰된 후 19년이 지나서 안동시라는 도시 간판으로 갈아탄 셈이다. 부내의 입향시조는 이미 언급했듯이 지금으로부터 670여 년 전 고려 말엽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낸 이헌 공이다. 이 공은 고려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벼슬을 내려놓은 후 고향 영천(永川)을 떠나 산천과 풍광이 수려한 이곳 부내에 터전을 잡았다. 부내는 알다시피 영천이씨(永川李氏) 집성촌이다.
♤그림 설명(caption) : 분강촌 부내 분천 등은 모두 같은 지명이다. 이는 농암 시대에도 그대로 사용했던 전설적인 동네 이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세 개 명칭에서 나오는 "부" 또는 "분"은 클 "분" 자에서 유래된 말이다. 클 분의 훈은 크고 넓고 많고 성하다는 뜻이다. 즉, 강이 크고 넓고 물이 많고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강이 되었다. 그림은 1992년 종친 화가 이택 선생(79ㆍ교육자 및 전 화랑교육원 원장)이 수몰 전 1970년대의 분강촌 전경을 그린 "분강도"이다. 물레방간은 아래 솔밭 왼쪽 바로 옆에 자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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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내 물레방간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에 건립됐다. 물레방간을 개업한 소유주는 풍산 할배(함자는 이희원: 1912~1983, 조부는 독립운동가ㆍ 이삼현 선생: 1877~1954)였다.
일제 강점기때 조선총독부는 조선반도에서 식량확보를 위한 산미증식계획(1920~1934)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한 수탈작업의 일환으로 관개시설 정비차원에서 1927년 조선수리조합령(조선총독부제령제18호)을 발표하여 전국 지역에 조합창설과 함께 대대적인 수리시설 정비와 개량사업을 실시했다. 관계배수와 수해방지를 위해 조합을 설치하는 것이 효과적인 수리관리와 식량증식 및 확보에 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의인 번남 앞에 앤떼이(보)를 설치하고 부내까지 십 리 길 수로를 만들어서 앞들과 신작로 주변에 물을 공급한 것도 일제의 이런 내심과 맞물려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말해 국가 경제가 빈난했던 시대, 마을 앞 낙동강물은 넘쳐났지만 이 강물을 동네 논밭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시설과 장비가 없던 시절인지라 원시적인 방법으로 보와 수로를 설치한 후 지형상의 높낮이를 이용하여 사시사철 흘러내려온 강물을 농수로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알고보면 조선반도에서 쌀 증산(산미증식계획)을 위한 일제의 수탈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수리사업인 만큼 흑심이 깔려있는 조형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부내의 물레방앗간 또한 전적으로 이 수로의 물을 사용한 만큼 일제의 수리사업 이후 설치된 것은 명확한 일이다. 이는 물레방앗간의 기원을 추산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 풍산 할배의 출생년도를 감안해서 방앗간 개업의 연도를 역산해보면 부내 물레방앗간의 기원은 대충 해방 이후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풍산 할배의 자제 되는 유걸 할배(75세ㆍ"서래섬에 달이 뜨다" 저자)의 옛 기억을 고스란히 옮겨본다.
"물레방앗간을 건립한 연대는 나도 당시 유아시절이라 기억이 잘 안나고 또 기록도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3년 전쯤인 1952년 정도로 추정되네. 물레방앗간이 멈춘 계기가 된 사상사고 시점에 대한 기억은 더욱 희미하지만 아마 4, 5학년 때인 1959-1960년 경이 되지않을까 싶네. 이런 시기상의 정황들을 가지고 추측해보았을 때 아버님께서 방앗간을 운영하신 기간은 대략 6~7년 정도로 추산이 되고..."
태어난 산천으로 다시 돌아간 옛 사람들은 말이 없다. 수몰된 분강촌은 물 속에서 다시금 깨어날 세월을 기다리며 억겁의 깊은 전설을 만들고 있다. 강산이 여섯 번이 변하는 동안 옛 사람도 아니 보이고 물레방아도 아니 보이고 분강촌도 전설이 되었으니 그저 안타깝고 적막하고 처연할 뿐이다. 분강촌은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완전히 수몰되었다.
당시 부내 물레방앗간의 정확한 명칭은 '물레방앗간 정미소' 혹은 '물레정미소'라고 불렀다. 실제 존재했던 물레방앗간이 1950년대 말경에 대형 안전사고와 태풍으로 작동이 멈추고 그나마 남아있던 형체까지도 1960년대 초반에 사라지자 동네 사람들은 물레방앗간이 있던 주변 일대를 발음하기 쉬운 물레방간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레방앗간은 낙차가 크게 져서 떨어지는 많은 물을 이용하여 물레바퀴를 돌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동력을 활용하여 방아를 찧는 장소를 말한다. 부내의 물레방간은 우리가 TV문학관에서 보았던 낙차가 큰 물로 물레를 돌리는 그러한 외형적인 모습은 똑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얻은 동력으로 피댓줄을 원동기에 걸어서 정미소처럼 방아를 찧은 만큼 소설 문학 속에서 보았던 연자방아 혹은 디딜방아식의 그런 향토적인 방앗간은 아니었다. 물레바퀴를 통해 일어나는 동력으로 곡식을 찧고 빻는 일종의 기계식 방아였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전국에 걸쳐 대대적인 수리사업을 전개했으며 도산면에서도 큰 수로공사를 단행했다. 부내보다 지형이 훨씬 높은 의인 번남 앞 여울에 앤떼이(보 혹은 둑)를 설치해서 부내 전답으로 보내는 십 리 길 수로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관할 관서(도산면사무소)는 농사철에 의인 앞 앤떼이에 설치한 보를 열고 부내로 물을 보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부내는 농사철에 이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물레방간이 건립된 뒤에는 추수철에 방앗간을 돌리기 위해서도 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시말해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십 리 길 수로를 타고 부내까지 내려온 물은 농사철에는 넓은 앞들과 신작로 주변 밭에 물을 공급했지만 추수철에는 마을 초입에 위치한 물레방간 근처를 지나가는 수로를 막아서 물을 물레방간으로 끌어들여 방아를 찧는데 사용했다. 하지만 물레방간은 꼭 추수철이 아니어도 사용해야할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럴 때는 보를 관할하는 면사무소에 알려서 의인 앤떼이의 보를 열게 하고는 앞들로 가는 수로를 막은 다음 물레방간 쪽으로 물을 보내서 방아를 찧었다.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부내까지 물을 공급하는 십 리 길 수로를 만든 것도 알고보면 일제가 식량자원을 보다 많이 수탈하기 위한 복심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지대가 높은 의인 앞에서 지대가 낮은 부내까지 물을 보내려면 의인에서 앤떼이를 설치한 후에 강물을 십 리나 되는 부내까지 흘려보낼 수 있는 수로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1970년대 의인에서부터 분천동까지를 담고 있는 장대한 사진이다. 낙동강이 의인(의촌리)과 도산서원 앞을 지나 사진 왼쪽 산 아래에 자리잡은 분강촌까지 고적히 흘러드는 모습이다. 분강촌 논밭에 강물을 공급하는 수로는 사진 오른편 위쪽 1km 지점에 있는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시작되어 낙동강 강둑을 따라 부내까지 4km 정도 이어져 있었다. 강 건너 오른쪽 끄트머리에서부터 산 밑으로 계속 수로를 따라 흘러간 강물은 사진 왼쪽 분강촌 동네까지 가서야 끝이 났다. 분강촌에 다다른 강물은 논밭과 물레방앗간으로 강물을 보냈다. 수몰 전 분강촌은 강물이 넘쳐나는 배산임수 동네였지만 낙동강보다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서 마실 앞을 흐르는 강물을 당시의 기술로는 논밭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십 리 밖에 있는 지대가 높은 곳에 보를 설치하여 강가 옆으로 인공 수로를 만들어서 지대가 낮은 부내까지 물을 끌어왔던 것이다.
사진 왼쪽 상단에 새로 닦고 있는 길 아래로 파란 뱀처럼 굽이굽이 기어가는 낙동강이 희미하게나마 눈에 들어온다. 분강촌 수몰을 눈 앞에 두고 동네 뒷산 중턱을 깎아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진입로를 내는 광경이 하얀 띠 모양으로 가로로 길게 걸쳐져 있다.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의촌리 일부만 남기고 이 사진에서 보이는 산 아래 지역은 완전히 수몰되었다(사진 출처: 1970년대 의촌리에 살았던 도산국민학교 58회 이영순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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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에도 의인에 설치된 보는 면사무소가 관리했다. 부내는 추수철이 되었을 때 이 보를 열어주어야만 물레방간을 작동할 수 있었다. 이는 공공재인 보를 단지 부내 동네의 물레방간을 돌리기 위해서 열어준 만큼 면사무소의 큰 배려가 있었을 것이다. 물레방간은 이렇듯 당시 부내의 입지를 잘 설명해주는 인공물이었다. 또한 그 무렵 물레방간은 도산면에서 유일하게 부내에만 존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방앗간은 추수철만 돌리는 것은 아니다. 방아를 찧을 기회가 오면 수시로 돌려야 하는 만큼 보와 수로를 여닫는 경우도 허다했을 것이다. 이 또한 공공재인 보를 상시로 사용하기 위해 관서에 수시로 요청해야 하는 만큼 부내에 대한 면사무소의 배려 없이는 어렵다. 이러한 배려는 분강촌 사람들에게 적지않은 자부심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추수철을 포함하여 수시로 방아를 찧을 때마다 면사무소에 상시로 연락해서 의인의 보를 열게 한 후 마을 입구를 통과하여 앞들로 가는 수로를 차단시킨 다음 그 물길을 물레방간으로 보냈던 것이다.
방아는 본디 곡물을 찧는데 많이 사용한다. 부내는 주로 나락과 보리, 밀, 콩을 찧었을 것이다. 물론 부내 살 때 여러 집에서 디딜방아를 갖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부내 동네는 향촌 역사가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 마을 규모에 걸맞은 양이 많은 곡물을 찧을 경우가 빈번해서 물레방간 같이 동력을 가지고 운영하는 보다 큰 정미소가 필요했을 것이다. 부내는 강물이 넘쳐나는 동네이지만 지대가 강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 탓으로 역설적으로 농사에 필요한 물이 부족한 동네였다. 고숫빠에서 내려오는 실거랑 도랑물이 농수의 전부였다. 의인 앤떼이에서 십 리 길 수로를 타고 내려온 강물은 마을 앞들과 신작로 내외에 있는 밭으로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물을 공급했다.
우리가 도산국민학교를 다닐 때 신작로 길 옆을 보면 일부는 흙으로 만든 도랑 같은 수로도 있었지만 조동골 앞에서와 같이 큰 공글로 된 수로도 있었고 또한 도산서원 아래부터 샅골(살골 혹은 전골) 앞에 있는 하마비, 섬마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 삼바꼬(삼밭골), 토째비골, 배암골(병암), 애일당 앞까지는 강둑 위에 마치 둑방 같은 튼튼한 시멘로 수로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심지어 강물이 수로로 잘 흘러갈 수 있도록 짧은 간격을 두고 의도적으로 수로를 높였다가 낮췄다가 하는 토목 공법을 투입하는 치밀함까지 보여주고 있어서 그 당시 어린 나이에도 감탄을 자아냈다. 우리는 큰 공글이 있는 수로에서는 숨바꼭질 하듯 들락거리며 놀기도 했다.
♤사진 설명(caption) : 출처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다. 도산서원 아래 신작로 밑으로 고적히 흘러가는 무성한 낙동강이 보인다. 강가에 견고하게 놓여 있는 수로 옆에서 부내(분강촌) 사는 필자의 친척인 재춘이(중앙) 아재와 친구들이 함께 한 모습이다. 1975년1월에 촬영했다. 의인앤떼이에서 시작된 수로는 분강촌에 이르기까지 산 밑으로 만든 도랑으로 된 수로와 강가 쪽으로 만든 시멘트 수로가 지형에 맞게 조성되어 십 리 길에 걸쳐 이어져 있었다. 사진 앞쪽으로 50여 미터 내려가면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현재 도산서원 주차장 아래로 내려가면 선착장 끝부분 바로 왼편 강가 지대가 된다. 옛날 수몰 전 도산서원 아래 샅골(살골 혹은 전곡, 석간대) 입구에 있던 점방 오른쪽 신작로 아래 강가에 있던 시멘트 수로에서 촬영한 광경이다. 사진 왼쪽 위에 도산서원으로 가는 신작로 길에 있던 울창한 소나무 가로수가 보인다. 사진 뒷쪽 신작로를 따라 100여 미터 올라가면 아름다운 고목 왕버들 숲으로 이루어진 도산서원 정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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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번남 앞에 있었던 여울 속에 만든 앤떼이에 대해서 알아보자. 앤떼이라는 단어는 일본말이다. "둑"이나 "언덕", "보"를 의미한다. 우리는 여울 옆에 있는 가설극장이 열리던 그 지역을 뭉텅그러서 앤떼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실 앤떼이는 여울 속에 있는 시멘트 둑을 가르킨다. 실제로 부내로 가는 수로에 물을 대기 위해 의인 번남 앞 여울 속에 오십 여 미터 길이의 시멘트 둑을 만들어서 물을 고이게 한 후 수로를 통해 내려보냈던 흔적이 있었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 물 속에서 그것을 많이 보긴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 이 시멘트 둑을 통해 모여진 많은 물들이 보막이 장치를 통해 수로로 빠져나갔을 것이다. 물론 보를 항상 열어두지는 않았다. 농사철이나 추수철에 부내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면사무소에서 보를 열고 수로를 통해 물을 보냈을 것이다.
의인 앤떼이와 부내로 가는 긴 수로 그리고 물레방앗간 등은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조형물이다. 앤떼이가 설치되지 않으면 부내로 농수를 보낼 수 없고 농수가 수로를 통해 가지 않으면 부내 앞들에 농수 공급은 커녕 물레바퀴도 돌릴 수가 없기 때문에 물레방간 존재 자체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앤떼이라는 이 일본 단어는 보와 수로를 설치한 시대와 부내 물레방간의 출범 시기를 둘 다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용어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의인 앤떼이는 일제 치하기 때 대대적으로 감행한 수리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되어졌던 것이다. 의인의 보와 십리 길 수로는 부내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해방 이후 이 수로는 농수와 물레방간의 동력을 발생시키는데 함께 사용되어졌다. 물론 해방 이후 물레방간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수로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의 물레방간 사진이 한 장도 보존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레방간 자리는 분강서원에서 신작로를 가로질러 우리가 물레방간이라고 부른 위치로 내려가다보면 큰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 바로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선노 할배 밭 아래쪽 위치이다. 우물 밑으로 조금 내려가면 강섶에 널찍한 너럭바위가 물 속에 반 정도, 물 바깥에 반 정도 걸쳐져 있는 빨래터가 있었고 그 빨래터 아래는 물 속에 큰 웅덩이 같은 경사가 바로 져서 수심이 꽤 깊었다. 수심이 깊어서인지 납조래기와 같은 예쁜 물고기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빨래터는 빨래하기에도 좋은 지형이었지만 무엇보다 물이 따뜻해서 겨울에도 빨래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그래서 동네 부녀자들이 이곳에서 주로 빨래를 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어디든 정보가 오고가기 마련이다. 물레방간 빨래터는 동네의 모든 고급 정보를 알수 있는 복덕방이자, 커뮤니티 공간 역할을 했다. 빨래터에서 애일당 쪽으로 20여 미터 올라가면 물섶에 엄청나게 큰 왕버들나무가 있었는데 여름이면 수시로 올라가서 놀거나 물 속에 드리워져 있는 왕버들 잔가지를 호빗처럼 타고 내려가서 퐁당퐁당 물 속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부내에서 물레방간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은 아마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이 물레방앗간 정미소가 생긴 직후부터 그렇게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잠시 옛날 부내가 수몰되기 전에 물레방간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집이 있었던 한 종친이 기억하는 물레방간 주변 전경에 관한 이야기를 옮겨본다.
《강가 언덕배기와 애일당 가기 전에 빗집("농암선생 신도비"를 넣어둔 소각) 근처에서 피던 빨간 명자나무는 꽃은 예뻤지만 가시가 달려있어 찔릴까봐 항상 두려웠다. 그리고 범부채꽃이 많이 피었던 산기슭에서 해질녘까지 누렁이 황소에게 풀을 먹이던 생각도 난다. 수몰 전에는 신작로 바로 옆에 있던 기와집에서 살았는데 그 이전에 살았던 집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그곳에서 태어나서 유아시절을 보냈는데 우리집 밭 끝과 낙동강 사이에 시멘트로 만든 봇도랑 물이 흐르는 수로도 있었다.
물레방간에는 애일당 아래에서 수로를 타고 내려온 물이 이곳에 와서 요즘 쓰레받기 같은 모양으로 만든 크고 두꺼운 나무판자로 모여 흘러든 후 이것이 물레바퀴에 큰 낙차를 만들면서 떨어지면 이때 생겨나는 동력으로 방아를 찧었다. 그런데 어느 이른 봄에 겨울철에 물레에 꽁꽁 얼어붙어 있던 얼음을 깨던 방앗간 기사가 갑자기 물레바퀴가 돌아가는 바람에 큰 인명사고가 났다. 이후 고인의 이름을 딴 순태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혼자서 근처에 가는 것을 무서워하기도 했다. 그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름철에 비가 오면 강물이 자주 불어났고 강물에 휩쓸려서 떠내려온 모래자갈과 뒷산 기슭에서 도랑을 넘어 흘러내려온 흙탕물로 인하여 물레방아가 절반 이상이나 파묻혀서 자주 파내는 일도 생기고 그렇다보니 방앗간이 멈추었는지는 그저 추측만 할 따름이다.
물레방간이 멈춘 후에 그 밑에 있는 자리에서 샘물이 솟아났다. 몇 해가 지난 후에는 강물을 길어다가 먹던 것을 그만두고 그 샘물을 사용했다. 샘물이 솟아나서 흘러내려간 조금 아랫 쪽에는 강물과 접해있는 빨래터가 있었는데 이곳에 윗마 부녀자들이 빨래를 하기 위해 수시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곳 빨래터 물은 겨울에도 얼지않고 따뜻했다. 물레방간 아래에서 사람들이 자주 두드리던 빨래방망이 소리가 아련한 기억으로 지금도 들려오는 것 같다. 동네 부녀자들은 찰랑거리는 물에 반 정도 드러나 있던 널따랗고 평평한 너럭바위에서 다라이에 가득 담아온 삼베나 무명옷을 잿물에 삶아서 빨기도 하고 또 차가운 강물에 손이 시려워서 언 손을 호호 불기도 했다. 가냘픈 두 손으로 빨래 방망이를 두드려서 그 많던 빨래를 하며 지난한 세월을 묵묵히 살았던 우리 엄마들의 고달팠던 삶이 참 고맙고도 그립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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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강 (2020.3.10 이종구)
달빛 휘영청한 분강에 맑은 바람이 조각배 저어가네. 농암은 갈잎으로 어부가 짓고 퇴계는 뱃노래로 화답하네. 애일당에는 구로회가 수연을 열어 농춘화답하고 귀먹바위 강가에는 버들피리 부는 아이들로 가득하네. 물레방간 왕버들 무성한 강물에는 도화꽃 날리고 갈매기는 물안개 가르며 구여울너머 밀양대로 날아가네. 아~ 구당나무에 걸린 춘삼월 저녁 노을은 무지개보다도 곱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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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물레방앗간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특히 우리 근대문학을 읽어보면 소설 속에 물레방앗간이 토속적이고도 향토적인 소재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현대 문학으로 넘어와서도 초기 작품에는 물레방앗간을 소설 속에 넣어서 전개한 작품이 적지 않았다. 외국에도 마찬가지이다. 문학 속에도 음악 속에도 물레방앗간이 다양한 이야기 소재로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소재는 모두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묘사인 만큼 부내 물레방간도 마찬가지로 시대상을 잘 반영하는 동네의 명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부내 물레방간이 언제까지 존재했고 왜 사라지게 되었는지 직접적인 원인을 살펴보자. 부내 물레방간의 주인은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유서 할배(춘당 택호는 우릉골 할배ㆍ함자는 이희옥) 큰 집인 풍산 할배(필자의 친구인 권택윤의 외조부)가 소유주였다. 현재 육십대 중후반 세대들은 도산국민학교를 다니기 전인 어린시절에 실제로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것은 보지못했지만 형체는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랫마 재필이 아재(72세)는 "아주 어릴때 아부지(운호 할배ㆍ함자는 이유식)를 따라서 보리를 찧으러 간 적이 있다"고 회고 했다. 다시말해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1950년대 말경까지는 물레방아가 작동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물레방아는 어떤 연유로 멈추었을까. 이미 잠깐 언급했지만 그 이유는 한겨울에 물레바퀴에 얼어붙은 두꺼운 얼음을 이른 봄에 깨다가 갑자기 돌아가는 바람에 인명사고가 터진 것이 큰 원인이 되었다. 물론 외지에서 고용된 기사가 물레방아를 돌리고 관리를 했는데 그 기사인 이순태라는 사람이 그만 안전사고로 죽는 큰 일이 발생했다.
유걸 할배의 당시 기억은 이렇다. "그때 나도 매우 어린 나이이기는 했지만 워낙 큰 사고인지라 생각이 어렴풋이 떠오르긴 하네. 그때 물레방앗간 운영기술자는 사십대인 이순태라는 사람인데 기술도 좋고 사람도 매우 좋았어. 그는 물레방간 바로 위에서 살던 장종석씨 집에서 하숙을 하며 물레방앗간을 돌리고 관리를 했어. 일에 대한 의욕도 큰 사람이었는데 겨울 동안에 꽁꽁 얼어붙어 있던 물레를 이른 봄에 빨리 돌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물레바퀴 위에 올라가서 얼음을 깨다가 갑자기 돌아가는 바람에 현장에서 유명을 달리했다네"
대형 사고이자,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당시 아주 큰 사고여서 지금 칠십대 어르신들은 대부분 이 사고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으며 고인의 이름까지도 모두 동일하게 말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이와같은 대형 안전사고로 인해 물레방아는 결국 멈추게 되었다. 이 사고 이후로 동네아이들은 물레방간에서 순태 귀신이 나온다고 얼씬도 하지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물레방간이 기능을 상실하게 된 또 다른 원인도 있었다. 1959년 9월 11일, 한국 전역에 막대한 피해를 준 제14호 태풍 사라호가 전국 지역을 휩쓸었다. 부내 동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애일당 밑에서 물레방간 옆을 지나 앞들로 연결되던 수로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강둑도 무너지고 농암 각자 위에 까지 물이 차올라서 도로 자체가 크게 파손되었다. 애일당 아래 U자형 수로가 워낙 크게 파괴된지라 다시는 복구가 되지 않았다. 수로가 끊어지자 물레바퀴는 물론 물레방간도 멈췄다. 이때부터 기능은 사라지고 형체만 남게 되었다. 육십대 중후반 세대가 보았다던 물레방간의 형체는 이런 상태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술 방면으로 재능이 많았던 낙구네(필자의 친구이며 춘당 함자는 이재봉) 작은 아버지인 재협이 아재가 원동기를 사서 동력을 다시 공급하여 물레바퀴의 동력이 아닌 기계의 힘으로 작동시키는 방앗간 기능을 되살렸지만 동네와의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고 또 방앗간 공간이 협소하여 결국 아랫마(아랫마을)로 이전하는 바람에 그곳은 완전히 폐쇄하게 되었다. 재협이 아재는 이곳 방앗간에서 사용했던 원동기와 피댓줄 등 관련 기계와 장비를 아랫마로 옮겨가서 당시로 보았을 때는 신식인 기계식 정미소를 운영했다. 하지만 이때도 부내 사람들은 정미소 대신에 그냥 방앗간이라고 불렀다. 이 방앗간이 돌아가는 장면은 나도 아주 어릴 때 실제로 본 적이 있었다. 방앗간 장소는 용규네(필자의 친구이며 춘당 함자는 황대섭) 집 앞에 있었다. 방앗간은 어린 우리들의 눈에는 흥미진진한 대상이었다. 원동기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는 원동기의 코를 잡은 채 힘차게 돌리면 처음에는 "씰룩씰룩" 거리다가 점차 "탕탕탕" 소리를 내며 원동기가 힘차게 돌아갈 때 피댓줄을 재빨리 원동기 몸에 걸어주어야 비로소 방앗간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기계에 걸린 각각의 피댓줄이 함께 작동하면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때 생기는 동력으로 여러 분쇄기에서 곡물을 찧을 수 있다. 물레방간 보다 한층 더 발전된 방앗간의 모습이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첫번째 사진(안동 대륙사진관ㆍ월파 윤수암 선생이 1960년대 촬영)은 애일당과 강각의 전경이다. 수려한 경관이 감탄을 자아낸다. 사진 밑에 1959년 태풍 사라호로 파손된 시멘트 물길이 선명하게 보인다(첫번째 두번째 사진에서 수로가 파손되면서 물길 수로가 "U"자형
모양으로 변했다). 두번째 사진은 출처와 시대가 미상이다. 애일당과 강각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 옛날에도 여전하다. 일제 강점기 때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의인 앞 앤떼이에서부터 부내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완공한 후 관할 관서(도산면사무소)에서 관련 사진을 남기기 위해 섬마 쪽에서 촬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반도에서 더 많은 식량확보를 위한 산미증식계획(1920~1934)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수리시설 정비차원에서 1927년 조선수리조합령(조선총독부제령 제18호)을 발표하여 전국 지역에 수리시설 정비와 개량사업을 실시했다. 의인 번남 앞 낙동강 여울목에 앤떼이(보)를 설치해서 부내까지 십 리 길 수로를 만들어 마을 앞들과 신작로 주변 밭에 농수를 공급한 것도 알고보면 일제의 이런 내심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의인 앤떼이의 정확한 위치는 이황의 퇴계구곡(退溪九曲)이 시작되는 일곡 지점이었던 마치 고무신 형상에 가득히 낙강이 고여 있었던 사련진 바로 아래에 있었다. 즉, 여울목 바로 위가 사련진이다. 이곳에 고였던 강물이 넘쳐나서 번남 앞에서 넓다란 여울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곳 여울목에 보를 설치했다. 그 당시 도산골 사람들은 이 조형물이 있던 일대를 "의인 앤떼이(보)"라고 불렀다. 일본 말인 앤떼이를 붙인 이유는 그 시대가 일제 강점기였고 또 그것을 계획한 사람들도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앤떼이 왼쪽 강변에는 잔디밭이 있었는데 이곳에 이따금씩 가설극장이 설치되어 도산골 사람들에게 "영화"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분강촌 물레방간을 돌렸던 물도 의인앤떼이에서부터 수로를 타고 마을로 흘러온 그 강물이었다. 즉, 마을 앞들 논밭으로 흘러가던 수로를 막고 물길을 물레방간 쪽으로 돌려서 방앗간을 돌리는 동력을 발생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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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형체만 남아있던 물레방간은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윗마(윗마을)에 살았던 나이가 일흔을 넘은 종친들의 기억은 이렇다. "1960년대 초반 형체만 남아있던 물레방간은 큰 비가 내린 후에 강물에 휩쓸려내려온 모래자갈과 영지산 기슭에서 밭도랑을 넘어 흘러내려온 흙탕물로 인해 절반 정도가 묻혀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고 했다. 기능이 사라진 방앗간이 이후에 제대로 관리가 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결국 물레방간은 이런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되어있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그곳이 밭으로 변하자 자연히 흔적 조차 없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이후에도 여전히 그곳을 물레방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물레방간이 있던 바로 아래 자리에서 샘물이 솟아나서 우물이 생겨났고 근처에 사는 동네 사람들은 이곳의 물을 길어다 먹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필자) 세대가 알고 있는 물레방간 아래에 있는 우물의 기원이 된다. 우리들은 강가 언덕에서 놀다가 목이 마르면 이곳으로 몰려와서 엎드려서 소처럼 연신 우물을 꿀떡꿀떡 들이켜 마신 적이 많았다.
사라호 태풍으로 부내로 가는 수로가 여러 곳에서 완전히 끊어지고 파손된 이후에 앞들과 밭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대안으로 다시 만든 것이 신식 양수장이었다. 신식 양수장은 원동기의 힘을 빌려 강물을 퍼올려서 물을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앞들로 물을 보내던 수로는 기존에 사용하던 수로를 그대로 활용했다. 양수장은 종가에서 직선으로 내려와서 신작로를 건너 강가까지 오면 강 둔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릴 때 강섶에 설치한 직사각형을 세로로 세운 듯한 시멘트 수문 위에 양수장으로 들어가는 강물을 개폐하는데 사용하는 큰 쇠로 만든 녹이 쓴 핸들이 달려있는 것을 본 기억이 또렷하게 난다. 그리고 탕탕한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던 양수장 원동기 소리와 함께 수로를 통해 앞들로 시원스럽게 물이 나가던 전경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그때 시멘트로 만들어놓은 수로에다가 발을 담그고 통소 아래 구여울에서 잡아온 피래미를 풀어주며 놀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부내 청고개 앞까지 인공물로 만들어 놓은 물길 수로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를 소개한다. 대구 수성구에서 살고 계시는 모란할매(함자는 김대연ㆍ85세/ 모란 할배의 함자는 이유영ㆍ둘이 아지매의 춘부장)는 최근(2021.12.5) 통화에서 수로와 관련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모란할매는 알다시피 원촌할매의 며느님이 되신다.
"열아홉에 부내에 시집을 오니 신랑은 없고 군대를 갔어. 나하고 둘이(두이) 아부지 하고는 열 살 차이가 났어. 그때 군대는 7년이야. 할배가 서른 둘에 제대를 했어. 참 살기가 어려운 시절이었제. 제대 후 할배는 다행히도 의인에서 부내까지 이어져서 내려오는 수로관리 일을 하게 되었어. 그때는 "물관리" 라고 했단다. 그 일을 하고 면사무소에서 일 년에 나락 서 너 가마니를 받았는데 그 당시로는 살림살이에 엄청 큰 도움이 되었어. 할배는 물관리를 하느라 수로를 따라 의인에 '보'가 있는 곳까지 수시로 올라가면서 물길을 돌보고 또 부내 앞들과 청고개까지 수로 점검을 다니곤 했어. 나도 따라가봤는데 의인에 있는 보에서부터 수로가 시작되어 산 밑으로 큰 길을 따라 계속 내려와서 도산서원과 애일당 그리고 부내 동네 신작로 바깥 쪽에 있는 밭 속을 지나 실거랑 아래로 뚫은 공굴을 통과하여 솔밭에서 수로가 다시 밖으로 나와서 넓은 앞들과 수루미 일대 그리고 청고개까지 강물이 보내졌어. 나는 어릴 때 부내에 시집와서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부내가 그리 좋은 줄 몰라. 그런데 우리 둘이는 부내가 맨날 그립다며 전번에 구여울에 가서 돌을 많이 주워다가 집에 갖다놓았다고 하더라. 그런데 옛날 이런 얘기에 관심이 많노. 희한하데이~ 시집살이 하면서 그 시절 살아나오느라 옛날 일들은 기억에도 잘 없어... "
모란할배께서 제대를 하신 때가 6.25 전쟁(1950.6.25~1953.7.27)이 끝나고 대략 3년 정도가 지난 때였다고 하니 아마도 1956년 하반기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제대와 함께 물관리 일을 맡아서 1년 정도 했다고 하니 그때가 1957~1958년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수로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1959년 9월 11일에 있었던 태풍 사라호로 인해 중간 중간이 끊어지고 특히 애일당 아래 주변에서 크게 허물어지면서 분강촌 십 리 길 수로의 전설은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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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간 (2020.10.30 이종구)
왕버들 무성한 강둑 위에 물레방아 쿵더쿵 돌아가네. 이색암(耳塞巖)은 귀먹바위(聾巖)라서 구여울
소리도 듣지 못한다네. 애일당 둔덕에 피고지는 엉겅퀴, 산비장이, 범부채꽃 자태는 오뉴월 비 갠 뒤 통소에 뜬 무지개 보다도 더 곱구나. 뒷동산 솔낭구 위에 늙은 부엉이 적요히 울어들 때 분강촌 저녁 노을이 영지산을 붉게 물들였네. 아~ 옛사람은 다 어딜가고 분강에 물새만 구슬피 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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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세월들이 아름답게 빚어놓은 분강촌 산야는 지금 강물 속에서 고요히 깊은 잠을 자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물레바퀴는 우리들의 꿈 속에서 힘차게 물을 떨어트리며 쿵더쿵 쿵더쿵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면서 물레방아를 찧으며 정겹게 돌아가고 있다. 특히 잠의 길목에서 서성거릴 때나 가을 깊어 적요해질 때나 어제 밤처럼 가을비 뿌리고 소슬한 찬 바람이 일 때면 아련하지만 더욱 더 큰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분강촌 물레방간의 전경이 그립게 떠오른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첫번째 사진은 1980년대 이성원 박사(농암 17대 종손)가 촬영한 분강촌 사진이다. 마을이 수몰된 이후 전경이다. 날씨가 가물어서 안동댐 수량이 다소 줄어든 탓인지 옛날 분강 속에 있던 여러 숭대들이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수몰 전 부내는 농암 선생의 호가 귀먹바위 듯이 아름다운 산천과 더불어 분강 속에 자리한 신령스러운 여러 바위들이 마을의 풍광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진 오른편 옛날 애일당 자리 밑에 크게 보이는 농암바위[귀먹바위(聾巖)ㆍ耳塞巖(귀가 먹은 바위)]를 기준으로 해서 시계바늘 반대 방향으로 첫번째가 사자바위(사자석獅子石) 그 옆에는 꼬끼리바위(상암象巖) 등이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 옛날 통소 근방 끝에서 왼편으로 급히 구부러져서 부포와 다래 쪽으로 흘러가는 낙강이 흐리지만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동네가 강물에 잠겨서 유년시절처럼 구여울 지대가 가파르게 경사진 모습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 전경 속에서 구여울을 떠올릴 수 있는 여러 정황들이 보인다. 물레방간 지대는 완전히 적수되어 사라진 모습이다.
두번째 세번째 사진은 2023년 10월 21일 완전히 적수된 분강촌 전경을 옛 부내 동네에 살았던 족친 승철이 할배가 촬영해서 보내주었다. 고수빠 아래 길가 모퉁이에서 만수된 분강촌을 담은 전경이다.
아! 만경창파가 따로 없구나~ 만물은 분강 속에서 또 다른 전설을 만들고 내 알던 옛 사람들은 영원 속으로 훨훨 날아갔네. 석양이 내리는 저녁나절 강가에 앉아 구슬피 우는 물새 소리에 시름 깊어라~
첫댓글
사진은 전설의 물레방간을 고스란히 담아 놓은듯 하네~ 정말 정겨운 터전이었는데...
섬세한 글 잘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