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1. 우경. 일제강점기.
우경의 의존도가 높았던 조선시대 도살금지령이 수시로 내려졌지만 우리 조상들은 쇠고기에 열광해 하루에도 수백마리의 소를 잡았다. 사진 수원광교박물관.
"밥을 먹은 뒤 집리(서리) 집에 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종로에 내려 와서 민상순에게서 돈 닷 냥을 갖고 와서 두 냥을 주고 천유와 함께 냉면을 사 먹었다."
요즘 냉면의 대명사는 평양냉면이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북한 출신자들이 대거 월남하면서 그곳의 냉면 문화가 남한에도 보편화된 것으로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고전은 1800년대 말 한양에서도 냉면은 여름철 인기 메뉴였다고 말하고 있다.
1891~1911년 쓰여진 <하재일기>의 저자 지규식은 오늘날 서울 사람들처럼 냉면 마니아였다. 지규식은 중인신분으로 궁중에 쓰는 그릇을 납품하는 공인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여름철에 냉면 먹은 일이 자주 소개된다.
"장동 신상인 집으로 돌아왔다. 두 냥 오 전을 주고 참외를 사다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선물했다. (아주머니가) 냉면 한 그릇을 또 내어와 배불리 먹고 이야기 하였다."
삼국지의 제갈령 고사에도 있듯 중국에서 기원하는 만두는 설날이나 제사 때만 접할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대제학을 지낸 이식(1584~1647)의 <택당집>은 "설날에 각 자리마다 만두탕을 한그릇씩 놓는다"고 적었고, 조선 최고의 예학자 김장생(1548~1631)은 상례예서인 <상례비요>에서 만두를 주요 제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하재일기>에는 "청나라 다사(茶肆·다방)에 들어가 이영균과 함께 만두 한주발을 먹었다"고 나온다. 조선말에 오면 만두가 서민들이 외식으로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사진2. 조선풍속사진 식사. 일제강점기.
집안의 어른으로 보이는 인물 앞에 밥상이 놓여져 있고 양쪽의 아이들은 배가 고픈지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어 대조된다. 고전에서는 우리가 몰랐던 음식문화도 전한다. 사진 부산시립박물관.
고전은 식문화에 대한 고정관념도 여지없이 깨뜨려 버린다. 세계인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한국인의 쌈은 독창적이면서도 건강에도 좋은 식품이다. 우리의 쌈 문화는 사실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상추는 쌈 문화의 대표주자이다. 상추라는 말은 채소를 날 것으로 먹는다는 뜻의 '생채(生菜)'에서 유래한다. 고구려인들이 이 상추를 즐겨 먹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는 고구려의 상추씨가 중국에서 인기 절정이었다고 서술한다. "고려국 사신이 오면 수나라 사람들이 채소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후하게 쳐 줘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했는데 지금의 상치다. … (중략) … 고구려 사람들은 생채로 밥을 싸 먹는다."
고구려 사신들이 중국에 갈때 상추 종자를 갖고 가서 거래를 했던 모양이다. 이미 1500년전에 중국인들이 상추를 귀하게 여기면서 먹었는데도 지금은 왜 중국에 쌈문화가 없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밥과 각종 야채를 고추장으로 버무려 먹는 비빔밥도 쌈 만큼이나 인기가 높다. 비빔밥 역시 역사가 오래돼 이미 조선 전기부터 먹기 시작했다. 계유정란의 핵심 공신 홍윤성(1425∼1475)은 세조의 신임을 배경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 그의 집에 도둑이 들 뻔한 일이 있었다.
도둑들은 포도청조차 홍윤성의 집 근처에 얼씬 거리지 못하는 헛점을 노렸다. 마침 홍윤성 집 근처를 순찰하던 포도부장 전임이 이들을 체포해 홍윤성에게 넘겼다. 그러자 홍윤성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은 선조 때 문신인 박동량(1569~1635)이 쓴 <기재잡기>의 내용이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뜰에 내려와 그의 손을 붙잡아 끌어올리면서 '이런 좋은 사람을 어찌 이제야 알게 되었는가. 자네 술은 얼마나 마시며 밥은 얼마나 먹는가'라고 물었다. 전임이 대답하기를 '오직 공께서 명하시는 대로 먹겠습니다' 하니 곧 밥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혼돈반(混沌飯) 같이 만들고 술 세 병들이나 되는 한 잔을 대접하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우고 단숨에 그 술을 들이켰다."
여기서 혼돈반이 바로 비빔밥이다. 채소와 생선을 밥에 섞어 먹은 것을 박동량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 유행하던 혼돈반에 비교했던 것이다.
사진3.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중 점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듯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늘날 무더위가 절정인 복날이면 삼계탕이나 보신탕 등 보양식을 흔히 먹는다. 조선시대에는 그냥 술과 함께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다. 지규식의 <하재일기>는 우리 민족이 조선 말까지는 한여름에도 특별한 보양식을 먹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초복이다. 일을 마치고 모두 본청에 모여서 술과 고기를 차려 놓고 취하도록 마시고 실컷 먹었다. 석양에 함경빈과 못에 가서 목욕하고 돌아왔다." 말복도 다르지 않다.
"말복이다. 공소(천주교 교회)에 모두 모여서 술과 고기를 차려 놓고 취하도록 마시고 실컷 먹었다."
신성한 교회당에서 술판을 벌였다는게 무척 낯설다.
우경(牛耕)의 의존도가 높았던 조선에서 소고기 먹기를 꺼렸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 조상들은 쇠고기에 열광했다. 조선은 소의 도축이 엄격히 금지됐고 소도살금지령도 수시로 내려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매일 많은 수의 소를 잡았다.
조선후기 개혁사상가 박제가(1750~1805)의 <북학의>는
"성균관과 한양 5부 안에 푸줏간이 24개이고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었다. 혼사, 연회, 장례, 활쏘기를 할 때 처럼 법에서 (일시적으로) 허용해서 잡는 것과 법을 어기고 도축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전국에서 날마다 500두의 소를 도살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소는 임신 기간이 다른 가축에 비해 길고 한꺼번에 낳는 새끼 수도 한 마리에 불과하다. 돼지고기와 양고기는 식성에 맞지 않았고 혹시라도 잘못 먹었다가 병에나 걸리지 않을까 우려해 기피했다.
소가 날로 품귀를 겪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박제가는 "중국처럼 돼지와 양을 키워 소고기를 대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44.조선말 인기메뉴 한양냉면은 어디로 갔나?[식문화1] / 매일경제신문, 2020. 5.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