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8 사순2주간 금 – 133위 092° 이제현 마르티노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1; 시편 118,22-23).
133위 092° ‘하느님의 종’ 이제현 마르티노
이름 : 이제현 마르티노
출생 : 1811년, 서부 양동(서울 중구 남대문로 5가)
순교 : 1867년 11월 23일, 군문효수, 서울
이제현(李濟鉉) 마르티노(또는 빈첸시오)[1]는 서울 서부 양동(陽洞, 현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5가)에서 태어났으며, 두 살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11세(1822년) 때부터 형에게 교리를 배웠고, 이후 모친과 형과 함께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였다.
이제현 마르티노의 가족은 1824년에 홍주 북면 마수리(馬首里)[1.1]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장성한 뒤에는 홍주 신리(현 충남 당진시 합덕읍 신리)에 살던 ‘하느님의 종’ 손경서(孫景瑞, 안드레아)[1.2]와 교류하게 되었고, 서울에 사는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세례도 받았다. 또 1834년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았으며, 얼마 뒤에는 견진성사까지 받았다.
1859~1860년 무렵에 이제현은 내포 지역을 순방하던 다블뤼 주교를 만나 자주 성사를 받으면서 가까워지게 되었으며, 서울에 사는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과도 교류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 프랑스 선교사와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였고, 이제현도 이듬해 길에서 공문을 가지고 상경하던 홍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제현 마르티노는 포도청의 문초와 형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엄한 문초 가운데서도 교우들을 한 명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배교하라.’는 명령에는 “45년 동안 믿어 온 천주교를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하였다. 그런 다음 “저는 지금 죽는다고 하더라도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지금 죽는다면 천당의 영광스러운 부귀가 눈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그 결과 그는 1867년 11월 23일(음력 10월 28일)에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56세였다.[2]
[註]__________
[1] 『우포도청등록』, 정묘(1867년) 10월 25일. 여기에는 이제현의 세례명이 ‘말증’(末增)으로 나오는데, 이는 ‘마르티노’의 옛 표기인 ‘말징’[瑪爾定]이나 빈첸시오의 옛 표기인 ‘원선시오’[未增爵 또는 文增爵] 중의 하나일 것이다. 포도청에서 한글 발음을 한자로 받아 적은 세례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앞의 세례명이 ‘말증’에 더 가깝다.
[1.1] 마수리(馬首里) : 선말(鮮末)에 수로를 이용해 홍주에서 서울로 가던 길 중에, ①대조기(사리, 음력 2∼4일과 17∼19일) : 덕산읍내 - 예산꿈빛학교(덕산중고등학교 2019년에 내포신도시로 이전) 앞길 - 예산군 고덕면 ‘말머리’(용리 1131-1 일원) - 구만포 - 삽교천을 이용 상경, ② 구만포에 조수가 부족한 중조기(음력 5~7일과 20~22일) : 홍주 - 덕산 - 말머리 - '하느님의 종' 황심 토마스 고향 용리 - 구만리 - 고덕면 용머리(지곡리 76-11일원) - 양촌(옛 합덕성당) - 합덕방죽(현 합덕성당) - 범근내포(우강포구) - 삽교천을 이용 상경,. ③소조기(조금, 음력 8~10일과 23~25일) : 홍주 - 덕산 - 고덕 - 황무실 - 버그내(합덕읍내) - 남원포 - 삽교천을 이용 상경하는 방법이 있었다. 범근내포로 가는 길로 상경하였다.
예산군 고덕면 용리 1131-1 일원 ‘말머리’는 본래 덕산군 도용면의 지역으로서 ‘사리(원사리)’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일리, 이리, 삼리, 저산리와 대조지면 하룡리 일부를 병합하여 그대로 ‘사리’라 해서 예산군 고덕면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사 1,2리로 되어 있으며 자연마을은 계명리(鷄鳴里), 군모루, 말머리(마두, 말뫼리) 세빗들, 정동, 죽말(죽동) 등이 있다.
[1.2] 손경서(孫景瑞, 안드레아, 1799~1839) : 하느님의 종.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신리성지 첫 순교자이다. 손경서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교를 배웠으며 집이 부유하고 친척이 번성하였다. 사업에 능숙한 그는 교회의 일을 맡아 잘 보살폈으며,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 때부터 교회를 위하여 많은 봉사를 하였다. 그는 1838년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홍주 감옥에 갇혔으나 돈을 바라는 수령에게 속량금을 많이 내고 함께 붙잡혔던 사람들과 함께 입으로만 배교하고 풀려났다. 집에 돌아와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그는 1939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바닷가의 안전한 곳에 집을 한 채 마련하여 앵베르 주교를 피신시킴으로써 입으로 배교한 잘못을 보속하고자 하였다. 앵베르 주교가 붙잡힌 뒤 그는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포졸들이 대신 그의 가족들을 붙잡아 고문함에 따라 자수하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은 그는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생에 대한 애착에 유혹되어 배교하였으나, 나중에 배교를 취소하고 죄를 뉘우친 뒤 12월 21일 서울에서 교수형을 받고 4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 『우포도청등록』, 1867년 10월 25일; 『일성록』과 『승정원일기』, 고종 4년(1867년) 10월 28일. 이제현이 군문효수형을 받은 장소는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