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 시인
한국의 명시를 찾아서
박제천/ 정인보·이병기·이은상 시인
정인보·이병기·이은상 시인
시조는 고려 말에서 시작하여 조선 영정조에 전성기를 맞은 우리 고유의 문학 장르이다. 개화기의 초기 시인들은 서구식 신시를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자유시의 산만함에 거부감이 없지 않았으므로, 육당이나 춘원과 같은 시인은 시의 정형율을 시조에서 찾으려 했다. 따라서 개화 시조의 첫 출발은 시보다 몇 년 앞섰으니, 1907년에 발표된 육당의 「국풍 4수」를 그 시초로 잡는 게 통설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1906년 7월에 발표된 대구여사(大丘女史)의 「혈죽가(血竹歌)」(朴乙洙)나 1906년 봄에 발표된 남궁억(南宮億)의 「무제」(徐伐)를 들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으로서의 시조에 관심을 보이고 그 창작에 힘쓴 시인들로는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를 선두로 꼽을 수 있고, 주요한, 변영로, 정인보, 이병기, 이은상 등이 뒤를 잇는다. 시조가 이들 시인들에 의해 우리 문학의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민요에 관심을 보이던 김소월과 같은 시인들도 그 정형율에 주목했으며, 아울러 민족운동과 연결됨으로써 당대 지식인들의 교양으로 자리잡았다. 김제현(金濟鉉)에 의하면 고시조가 노래하는 시조라면, 개화 시조는 읽는 시조로 바뀌었고, 신시조는 창작의식의 유무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러한 창작의식이 구현된 최초의 시조집이 1926년에 발간된 육당의 『백팔번뇌』이다. 그러나 초기 시조의 경우 육당은 연작시조, 춘원은 연시조의 형태를 즐겼으나 주요한은 서정적인 단시(短詩)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시조의 현대화 운동에 또하나의 기틀을 마련한 이는 안자산(安自山:安廓)으로서 그의 『시조시학(時調詩學)』은 시조의 자수율과 삼장체를 확립하는데 이론적 틀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조시학』에는 시어로서 사용해야 할 상투어의 규범을 수록하고 있어, 그 뒤의 시조작가들에게 적잖은 폐해를 남기고 있다.
육당의 박달나무, 담원의 인절미떡, 난초가 가람인가?
봄구름, 무명옷, 암고란은 누구누구?
여러 체(體) 다 갖은 노산을 늠실바다라 하리라.
―양주동 「우정록」
현대 한국 시조를 말하기에 양주동의 위에 보인 시조는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다. 육당에 이어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담원시조집』을 간행하여 시조의 위풍을 살렸다. 정인보는 1892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 담원 등이다. 13살때부터 양명학자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고, 국권 박탈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박은식·신채호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동포 계몽 운동과 조국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연희전문, 이화여전, 불교전문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며, 동아일보,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 정기를 되살리는 데 앞장섰다. 저서로는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 『담원국학산고』 등이 있다. 광복 후 국학대학장,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하다가 6·25 때 납북되어 그해 11월 작고하였다 한다. 시조와 함께 한시, 서예에 능통하였다.
그의 시조는 육당이나 춘원과 달리 주요한이 말하는 단시 형태로서 서정성을 그 내용으로 삼음으로써 현대시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의 작품이 전통 시조의 작법대로 상투어를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어 약점이 되고 있다.
그럴싸 그러한지 솔빛 벌써 더 푸르다.
산골에 남은 눈이 다산듯이 보이고녀.
토담집 고치는 소리 볕발 아래 들려라.
나는 듯 숨은 소리 못 듣는다 없을쏜가.
돋으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이리.
나비야 하마 알련만 날기 어이 더딘고.
이른 봄 고운 자취 어디 아니 미치리까?
내 생각 엉기울 젠 가던 구름 머무나니,
든 붓대 무능ㅎ다 말고 헤쳐 본들 어떠리.
―정인보 「조춘(早春)」
신시(神市)로 내린 우로(雨露)꽃점 진들 없을쏘냐?
왕검성 첫 봄빛에 피라시니 무궁화를
지금도 너곧 대하면 그제런 듯하여라.
저 메는 높고 높고 저 가람은 예고 예고,
피고 또 피오시니 번으로써 세오리까?
천만 년 무궁한 빛을 길이 뵐까 하노라.
담우숙 유한(幽閑)코나, 모여 핀 양 의초롭다.
태평연월이 동두렷이 돋아올 제,
옛 향기 일시에 도니 강산 화려하여라.
―정인보 「근화사 삼첩」
정인보에 비해 가람 이병기(李秉岐)는 1925년 「봉천행 9장」과 같은 본격 문학으로서의 시조를 예고하고 있다. 가람은 1891년 전북 익산 출생으로 한성사범을 졸업했다. 국민학파의 일원으로 시조 부흥운동에 헌신하였다. 「난초」는 그의 대표작이다. 시조를 통해 한국적 서정세계를 빼어나게 묘사함으로써 시조문학의 미학을 확립하였다. 서울대, 전북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68년 작고하였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며,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이병기 「난초」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 개 소리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이병기 「오동꽃」
맑은 시내 따라 그늘 짙은 소나무 숲
높은 가지들은 비껴드는 볕을 받아
가는 잎은 비늘처럼 어지러이 반짝인다
청기와 두어 장을 법당에 이어 두고
앞 뒤 비인 뜰엔 새도 날아 아니 오고
흠으로 내리는 물이 저나 저를 울린다
헝기고 또 헝기어 알알이 닦인 모래
고운 옥과 같이 갈리고 갈린 바위
그려도 더럽힐까봐 물이 씻어 흐른다
폭포소리 듣다 귀를 막아도 보고
돌을 베개삼아 모래도 누워도 보고
한 손에 해를 가리고 푸른 허공 바라본다
바위 바위 위로 바위를 업고 안고
또는 넓다 좁다 이리 저리 도는 골을
시름도 피로도 모르고 물을 밟아 오른다
얼마나 엄하다 하리 오르면 오르는 이 길
물소리 끊어지고 흰 구름 일어나고
우러러 보이던 봉우리 발 아래로 놓인다
―이병기 「계곡」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1903년 경남 마산 출생으로 연희전문과 일본 조도전대에서 수학했다. 1933년 『노산시조집』을 발간했다. 그는 이 시조집에 300편의 작품을 싣고 있는데 서정적 작품에서부터 역사의식에 이르기까지 시조의 지평을 확대하고 있다. 그의 시조는 특히 음률성이 두드러져 가요로 많이 작곡돼 애창되고 있다. 이화여전, 동국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조선일보 편집고문, 호남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1980년 작고하였다.
보라, 저 울멍줄멍 높고 낮은 산줄기들
저마다 제자리에 조용히 엎드렸다
산과 물 어느 것 한 가지도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황금 방울같이 노오란 저녁해가
홍비단 무늬 속에 수를 놓고 있다.
저기 저 구름 한 장도 함부로 건 것 아니로구나.
지금 저 들밖에 깔려 오는 고요한 황혼!
오늘 밤도 온 하늘에 보석별들이 반짝이리
그렇다! 천지 자연이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이은상 「천지송(天池頌)」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핏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이은상 「고지가 바로 저긴데」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뎅그렁 울릴 제면 또 울릴까 맘 졸이고
끊일 젠 또 들릴까 소리나기 기다려져
새도록 풍경 소리 데리고 잠 못 이뤄 하노라.
―이은상 「성불사의 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이은상 「가고파」(내 마음 가 있는 그 벗에게)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