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자: 2025.04.27 주일 낮 예배
-말씀: 눅9:23/찬송 301장
-제목: 자기를 부인하라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담임 이덕휴목사
-말씀 봉독 - 다 함께
눅: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참고 : 리차드 벡스터 : Self (loc.gov) - self denial-
찬송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 찬양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 by Anvely (youtube.com)
- 본문의 상황
열두 제자의 전도(막 6:7-13; 눅 9:1-6)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열두 사도로도 불린다.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기원하였으며, 완전한 공동체를 뜻한다. 예수님을 따라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열두 제자를 불러 사도로 칭하시고, 복음 전도 사역을 집중적으로 위탁하셨다. 열두 명의 사도들은 후에 초대교회를 세워 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마태, 시몬, 도마, 나다나엘, 작은 야고보, 가룟유다이다. 후에 가룟유다는 자살하고, 맛디아가 추가 된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파송되기 전에 스스로에게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오직 주님의 뜻에 맞는 마음가짐을 당부하신 내용이다.
1.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되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본문 말씀에는 조건부적인 대상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으로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셋째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는 것은 뭔가를 부정하고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 이게 아닌데 ???
주님은 아무나 따라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주님께서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하는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 성경의 언어는 '조건절'과 '결과절'(조건부와 결과부라고도 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오직 주님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자기를 부정하는 자가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가면 하나님을 사랑하되 내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합니다.(마22:37-39) 그 다음의 조건도 마찬가지다.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의 내용을 나의 본연의 자세로 갖는 것이다.
2.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self denial- 자기부정
자기 부인이란 지금껏 살아왔던 나의 존재감 또는 나의 현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계란이 병아리가 되기 위해서는 계란이라는 알의 상태를 쪼아내고 밖으로 나오는 상태, 즉 알에서 부화하여 움직이는 닭이 되는 것입니다. 닭이 되어야 또 알을 낳고 그 알이 병아리가 되어 원래의 나를 지키기 위한 궁극적 목적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헤겔(G.W.F Hegel)은 정. 반. 합이라고 했습니다. 정반합(正反合, : These, Antithese, Synthese,: thesis, antithesis, synthesis)은 철학용어로 논리적인 전개 방식인데, 주님의 탄생, 수난 그리고 부활 승천은 이러한 논리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뜻이 무엇인가? (막 8:34-35) 그것은 세상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나 중심으로 살아가던 삶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향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던 예수님의 삶을 따르기 위해 무던히 노력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편한 자리를 찾고 섬김을 받으려 하며 노를 쉽게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죄의 종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함입니다.
‘옛 사람’이란 거듭나기 전에 이 세상을 따르고 자기 욕심을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해 살았던 자아를 말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한번은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돌이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
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 27)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육신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자아를 가리킵니다.
그동안 자신을 위해 살았던 자아를 버릴 각오로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적 회개의 정점은 어디입니까? 복음적 회개는 옛 사람이 죽는 데서 끝납니다. 십자가는 바로 자아의 죽음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자기를 부인한 사람입니다.
3. 자기의 정욕을 포기하는 자가 승리하는 삶을 산다. - 소경이 눈을 뜨다
인간은 물질만능 및 인식의 척도가 인격주의에 머물기 때문에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모든 교만해진 생각, 즉 이성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인간의 지식으로 인격을 가름하고 재산으로 그 사람의 위상을 세워왔던 지금까지의 자기 중심주의를 모두 내려 놓는 일이 자기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나는 00교회 목사이며 교회의 모든 수입은 내가 목회를 잘 이끌어 가고 교인들을 풍부한 삶에 놓이게 했고 그들의 영혼에 단비를 내리게 했으므로 나는 그 정도의 댓가(수임료/봉사료/급여/생계주지비 등)세속적인 대차관계를 생각하면서 목회자의 급여를 챙기는 무리들이 우리나라에는 무려 99.99%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자비량 선교를 했습니다. 천막짖기가 그 생계수단이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 10:4, 5).
여리고성의 디메오의 아들, '맹인 바디메오' (막10:46-52) 가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봤던 분이 은혜와 사랑의 예수님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보기를 원하는 분이 예수님이기를 원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맹인이 눈을 뜨듯이 아침에 우리의 눈을 처음 떴을 때 내가 오늘 무엇을 해야되지? 내가 무엇을 처리해야 되지? 그 생각이 아니라
내가 가장 원하는 예수님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바디메오는 소리쳐 말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47절).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여리고 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의 첫 점령지로서 여호수아 정복하고 또 선한 사마리아아 여인의 이야기(눅10:30)가 등장하는 유명한 곳입니다.
성경에서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은 많이 나옵니다. 긍휼히 여기소서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자신의 뜻을 추구하던 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뜻, 즉 자기의 육신적인 생각을 버리고(딛 2:12)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결론 - 사람의 생각을 버리는 자가 구원받는 삶을 산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귀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제자들을 통해 주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고, 사탄의 방법으로 십자가를 지게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막는 일을 했고 (마16:22), 유다는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한 베드로에 대해 주님은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내게 실족거리니라. 네가 [하나님]에게서 난 일들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서 난 일들을 좋아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마16:23).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며 말렸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정반대일 때가 많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생각은 본래 세상적이고, 육신적입니다
(엡 2:1-3)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러한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38-40) 라고 하셨습니다. 택자들이 구원과 성화를 온전히 이루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요 17:9-23).
옛 사람이 죽어야 거듭남이 옵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우리 옛 사람이 장사될 때,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요 신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라고 감격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자아가 죽음으로써 다시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
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
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 10).
우리가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고통스러워하거나 힘들어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자아가 사라지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심령 속에 하늘의 기쁨과 진정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아멘
오늘도 우리 만나인에게 주신 말씀은 살전5:16-18입니다. 함께 봉독하시면서 말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