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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김범우 순교자 성지
도로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사기점길 50-100
한국 천주교의 첫 증거자 또는 첫 순교자로 불리는 김범우 토마스(1751-1786/1787년)의 묘가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김범우의 유배지는 달레가 쓴 “한국 천주교회사”에 근거하여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후손 김동환이 나타나면서, 가족에게서 전해지는 이야기와 호구단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범우의 유배지가 단양이 아니라 밀양 단장(丹場)임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 후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의 송기인 신부와 김범우의 후손들, 그리고 영남 지방 교회사 연구에 몸 바친 마백락 씨 등은 몇 년에 걸쳐 밀양과 삼랑진 지역을 답사하고 수소문한 끝에 1989년 극적으로 김범우의 외손(손임덕, 당시 78세, 집안 대대로 묘지를 관리)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산102번지 만어산 중턱에서 묘를 찾았다.
그 해 5월에 본격적인 묘 발굴을 시작하여 파묘한 결과 관 자리 위에 십자가 모양으로 놓인 돌 3개와 치아가 발견되었다. 이 돌은 순교자 황사영의 묘소 발굴 때와 같은 경우로 성물이 귀했던 박해시대에는 성물 대신 십자가, 나무묵주, 돌 등을 관 속에 넣어두는 경우가 많았다. 출토된 유물과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이곳을 김범우의 묘로 단정했고, 김범우의 신앙과 생애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김범우의 묘가 있는 밀양시는 중부 경남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넓고 기름진 평야와 높은 산, 깊은 계곡이 많은 아름다운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사명대사, 휴정 등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특히 재약산(858m)의 표충사와 만어산(670m)의 만어사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고찰(古刹)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 대한 천주교의 전래는 바로 김범우의 귀양살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김범우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해 가을 수표교(水標橋)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그러다가 입교자가 늘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벽의 집에서 모임을 갖기 어려워지자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 성당 인근)에 있던 자신의 집을 제공함으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5년, 명례방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개최하다가 추조(형조) 관리들에게 발각되었다. 이것이 바로 일명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형조에 끌려가 많은 매를 맞고 옥에 갇혔으나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와 함께 끌려간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은 모두 소위 양반계층에 속한 인물들인지라 즉시 풀려 나왔지만 김범우는 교회 집회 장소의 집주인일 뿐 아니라 중인(中人) 신분이었기 때문에 멀리 밀양으로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처연한 신세가 되어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만어산의 금장굴 부근에서 2년간 귀양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신봉할 것을 설득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고 샤를 달레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형조에서 받은 혹독한 형벌의 여독으로 2년 정도 고생하다가 1786년 가을(혹은 1787년 초) 세상을 떠났다. 김범우가 죽은 뒤 후손들은 만어산을 중심으로 삼랑진읍 굴암리(掘岩里, 현 용전리), 단장면 등에 살면서 신앙을 전파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조정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는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순교한 윤지충이다. 그러나 비록 관아에서 사형선고를 받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그보다 앞서 박해와 형벌 속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그 형벌의 여독이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된 김범우는 ‘장하치명’(杖下致命)한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울의 명동 성당은 한국교회 창설의 기점이 된 명례방 집회가 이루어졌던 김범우의 집을 역사적으로 기념하여 건립된 성당이기도 하다.
1989년 김범우의 묘를 발굴한 이후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주변의 땅을 매입하여 순교자 묘역 조성사업을 진행하였다. 묘역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제대와 1천여 평의 잔디밭을 조성하고, 도로변 주차장에서 묘역에 이르는 산길에는 대형 원석에 그림을 새긴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웠다. 그리고 묘역 주차장에서 묘역에 이르는 길목에는 20개의 돌에 한국 천주교회의 기념비적인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수년간의 노력을 통해 묘역을 말끔히 단장한 후 2005년 9월 14일 정명조 주교의 주례로 묘역 준공미사를 봉헌했다.
성모동굴성당 위에 교육관 및 피정의 집이 건립되어 2017년 9월 축복식을 가졌다.
이어 2010년 11월 순례객들을 위한 김범우 순교자 기념 성모동굴성당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착수하여 2011년 9월 20일 교구장 황철수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김범우 순교자 성지 주차장 부지 한편에 세워진 성모동굴성당과 사제관의 완공으로 순례객들은 날씨와 상관없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김범우 토마스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추진하여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의 제2차 시복 추진 대상자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었다. 부산교구는 장독(杖毒)으로 사망한 김범우의 시복시성을 위해 관련 사료를 수집하는 등 시복시성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17년 9월 14일 김범우 토마스 순교자 순교 230주년을 맞아 김범우 순교자 성지 내에 교육관 및 피정의 집을 건립해 축복식을 거행했다. 이어서 성령의 길을 완공하며 순례자들에 대한 순교 정신 교육과 체험의 장이 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4월 24일)]
한국의 첫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
김범우(1751-1787년)는 경주 김씨 충의공파 62세손으로 역관 가문의 출신이다. 그는 조선조 영조 27년(1751년) 음력 4월 23일 서울 명례방에서 부사맹 벼슬을 하던 김의서와 남양 홍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정지’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여 중국어에 능통하였다.
김범우는 스물두 살 때인 영조 49년(1773년)에 국가의 통역관 시험인 역과 증광시에 2등급으로 합격하여 역관이 되었고, 학문을 좋아하여 당대를 풍미하던 학자들, 그 가운데서도 서학이란 신학문을 하던 양반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양반 선비들 가운데서 특별히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추종을 받고 있던 이벽의 인품에 끌려 스승으로 모시며 따랐다. 김범우는 이렇게 한국교회 창설 공로자인 이벽을 따르면서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심취하여 신봉하게 되었다.
정조 8년(1784년)에 김범우는 초기 한국교회의 입교 절차가 행해졌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토마스로 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김범우 토마스는 당시 남인계 실학자인 정약전 · 약용 형제와 권일신 부자 등과 함께 이벽의 집에 드나들며 교리를 배우고 교회 예절에도 참례하였다. 그러다가 입교자가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집에서 모임을 갖기가 어려워져 안타까워하는 이벽의 근심을 알아차리고 김범우 토마스는 곧 자신의 집을 임시 성당으로 내놓고 모임 장소로 사용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벽은 이 청을 받아들여 정기 집회의 장소를 수표동 자신의 집에서 명례방 김범우의 집으로 옮겼다. 이렇게 1784년부터 김범우의 집에서 갖게 된 정기 집회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기점이 되었다. 이 모임을 기점으로 보고 1984년에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했던 것이다.
이들은 주일이 7일째에 온다는 것을 생각하여 1784년 늦가을부터 매월 1일, 7일, 14일, 21일, 28일에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교리를 공부하며 첨례와 기도를 바쳤다. 수표동 이벽의 집이, 이벽과 정약전 · 약용 형제, 권일신, 최창현, 김범우 등이 이승훈으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았던 곳으로 한국교회의 최초의 천주교 입교 절차가 행해진 장소라고 한다면, 명례방 김범우의 집은 초기 신자들이 모여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가졌던 곳이라는 점에서 천주교의 창립과 확산, 김범우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수용은 양반 선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천주교의 학문적 연구와 수용 과정에 중인들의 참여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신분제도 아래의 조선 사회에서 양반가에 서민이 드나드는 것은 제한되어 있었고, 서로 쉽게 통교하는 처지도 못되었다. 이러한 제약은 양반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천주교의 포교와 확장에 한계가 되었다. 그런데 김범우의 집은 비교적 통교와 출입이 자유로운 중인의 집이었기에 천주교 확장과 서민에 대한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실제로 김범우의 집에는 "천주실의", "칠극" 등 천주교 서적이 비치되어 있었고, 서학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이 신분을 초월하여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초기 한국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순교자 최인길, 최필공, 김종교 등 중인 출신의 인재들이 모두 김범우를 따라서 입교한 사람들이었다.
홍익만, 변덕중, 윤지충 등의 양반들이 중인인 김범우의 집에 드나들며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입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입교한 역관 출신 중인과 특히 그뒤에 의관 출신 중인들이 활동과 출입이 자유로웠던 이점을 활용해 남긴 복음 선교의 업적과 열의가 모두 김범우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가족도 신앙생활로 이끌었는데 그의 동생인 김이우 · 현우가 모두 1801년 신유박해 때 장렬히 순교하였다. 그리고 명례방의 그의 집이 중국 사신들이 거처하던 장례원에 가까이 있었고, 또 그 자신이 역관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오던 천주교 관계 서적을 입수하고 중국 사신들한테서 중국 천주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도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785년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정기집회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형조의 순라군에게 발각되었고 집주인인 김범우가 투옥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이만채가 천주교 박해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벽위편"에 이렇게 적혀있다.
"을사년(1785년) 봄에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등이 장례원 앞 중인 김범우 집에서 설법을 하였다. 거기에는 이벽이라는 자가 있었다(이는 지퇴당 이정형의 후손이요 병사 이격의 동생이며, 동시에 병사 이석의 형이다). 이벽은 푸른 수건으로 머리를 덮어쓰고 바람벽을 의지하여 앉아있었다. 이승훈과 정약전 · 약종 · 약용 삼 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스스로 이벽의 제자라고 칭하며 책을 들고 둘러앉아 있었다. 이벽이 설법하고 가르치며 꾸짖곤 하는데, 우리 유교에서 사제지간에 갖추는 예의보다 훨씬 더 엄하였다.
날짜를 정하여 함께 모이기를 이미 수개월 동안이나 하였으며 양반, 중인 등 여러 선비들이 수십 명씩이나 되었다. 그런데 추조금리가 그 모임을 술 마시고 도박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들어가보니 거의 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쓰고 손가락으로 이상한 손놀림을 하므로 그 예수 그림과 책과 물건들을 압수하여 추조에 가져왔다. 추조판서 김화진은 양반집 자제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게 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잘 타일러서 내보내고 다만 김범우를 가두었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김범우가 양반들과 함께 교회 예절을 거행했는데 양반들은 돌려보내고 김범우만 옥에 가두고 배교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배교를 거부하자 여러 가지 고문이 가해졌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앞서 풀려났던 권일신 등이 다른 여러 신자들과 함께 “우리도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니 같이 처벌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고 김범우에게만 계속해서 배교할 것을 강요하며 형벌을 가했다. 이 사건을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가 받은 최초의 박해이다.
중인이었기에 혼자만 문초를 받게 된 김범우는 형조판서 앞에 불려가서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배교를 끈기있게 거부했다. 여러 가지 고문이 계속되었지만 그는 잠시도 굽히지 않았다. 김범우 토마스의 행적과 옥중 형벌의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형조에서는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하며 배교를 재촉했으나 그의 불굴의 의지와 굳은 신앙을 꺾을 수 없자 매질하여 귀양보냈다. 그는 귀양지에서도 큰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가르쳤다. 그의 강인한 용기와 인내심은 조금도 변함없었다. 그러나 모진 형벌에서 얻은 깊은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귀양지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최근 김범우 토마스의 귀양지가 경남 밀양의 단장임이 밝혀졌다. 우리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조정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는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윤지충이다. 그러나 비록 관아에서 사형선고를 받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그보다 앞서 박해와 형벌 속에서 신앙을 증거했으며, 그 형벌의 상처로 죽은 김범우는 한국의 첫 순교자이다. 그리고 서울의 명동성당은 한국교회 창설의 기점이 된 집회가 이루어졌던 명례방 김범우의 집을 역사적으로 기념하는 성당이기도 하다. [출처 : 김길수 요한,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3월호]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을사년(1785년) 봄 추조(秋曹), 즉 형조(刑曹)의 금리(禁吏)들이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明洞)에서 모임을 갖던 천주교인들을 적발 체포한 사건. 1785년 봄 이승훈(李承薰), 이벽(李檗), 정약전(丁若銓) ·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丁若鏞) 형제, 권일신(權日身) 부자(父子) 등이 명례방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종교적 모임을 갖고 이승훈이 천주교 교리에 관해 강론을 하고 있을 때 형조의 관리들이 우연히 이를 적발, 모임에 참가한 이들을 체포하고 천주교 서적과 성화상(聖畵像)들을 압수하였다. 이때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체포된 이들이 모두 사대부(士大夫)이므로 중인 출신의 집주인 김범우만을 가두고 나머지 사람들을 훈방했으나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李閏夏), 이총억(李寵億), 정섭(鄭涉) 등과 함께 형조로 가서 김범우의 석방과 성화상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이들을 돌려보내고 김범우를 간단히 문초한 다음 충청도 단양(丹陽, 또는 경상도 밀양의 丹場)으로 유배시켰다. 이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이 사건이 유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짐으로써 이해 3월(음) 태학생(太學生) 이용서(李龍舒), 정숙(鄭淑) 등은 척사위정의 통문(通文)을 돌려 이 사건과 관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뿐 아니라 친구 친척에게까지 천주교를 물리치라고 강요했고, 안정복(安鼎福)은 직접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반향으로 인해 이벽, 이승훈 등은 배교하게 되고, 김범우는 유배생활 1년 만에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여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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