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편 53:1-6)
<설교> 53편을 읽어 보면 14편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14편의 5,6절과 53편의 5절의 내용이 조금 다를 뿐 나머지는 거의 같은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14편과 53편이 같은 내용이니까 같은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53편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같은 내용이고 같은 의미라면 14편이나 53편 둘 중에 하나는 삭제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같은 내용이니까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면 복음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서에도 중복된 동일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이기 때문에 동일한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면 복음서 역시 따로 분류할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더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면 14편과 53편은 각각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14편과 53편을 보면 같은 내용 속에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름입니다. 14편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반면에 53편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름에 담아서 나타내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시면서 여호와로서의 일을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시면 하나님으로서의 일을 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은 창세기의 천지창조의 내용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의 기사를 보면 모두 하나님으로만 등장합니다. 그런데 2장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일을 다시 반복해서 언급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것은 1장에서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등장을 하는 것이고, 2장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범죄하고 그로 인해 죽음에 처하게 되며 그러한 인간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란 이름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여호와는 범죄하여 사망에 처한 인간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이름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14편의 내용과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53편의 내용은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14:2,3절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는 말씀에서 여호와가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핀다는 것은 과연 누가 여호와가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을 찾는지를 살피신다는 뜻입니다. 언약을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사람은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자신을 살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처럼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이 세상의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자가 되었다는 것도 여호와의 언약을 의지하고 언약을 성취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바라보고 높이면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53:2,3절에서도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인생을 살폈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창조주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면 인생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온통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53편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형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선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항복한 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마음 깊이 자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감사하는 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선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이것을 두고 1절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며 살아갈 뿐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불신자들의 악으로만 여기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나는 신자다’는 자기 함정과 자기 착각에 빠져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착각과 함정에 항상 주의를 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알며, 교회 일에 봉사하는 자신을 볼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지 못하고 ‘나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은 ‘하나님이 없다’고 일컫는 어리석은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고 있는 신자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라고 고백하고 다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입술로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있는 믿음을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분명 그 삶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다면, 또한 자신을 세상에 존재하게 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신자는 세상을 자신의 욕심과 뜻과 계획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현재의 형편이 자신의 욕망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인도하신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항상 불평과 불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이 어리석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는 자란 곧 우리 자신을 향한 선언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주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나의 주가 되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더 높이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보다는 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2,3절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누가 하나님을 찾는지 살피시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찾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없어도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있음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용할 양식 정도는 자신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 세상의 형편은 떡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면서도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4절).
이처럼 은혜가 아닌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 안에 사는 신자는 두려워 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약자가 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무시 받고 조롱 받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버리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 있는 우리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더욱 기도하여 세상의 힘을 얻는 것입니까? 세상에 우뚝 설 수 있는 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는 버림 받을 자리에 머물고 있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6절을 보면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흩으시고 버리신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세상의 힘을 구하고 있으며,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상에서 진심으로 구할 것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여전히 자식의 성공이고 돈이어야 합니까? 자식이 성공하고 돈을 벌어봐야 결국 하나님이 흩으시고 버리실 인생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바라보고 구할 것은 부패한 나를 구원하실 구원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버림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복과 은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크신 복과 은혜를 알고자 한다면 부패하고 악을 행하는 우리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왜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높이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처럼 선을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서 그러한 선이 보여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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