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거울'이란 말이 남아 있듯이 수면에 자태를 비추어 본 것이 거울의 기원이다. 후에 원형의 금속면을 갈아 광을 낸 거울이 생겼는데, 동양의 거울은 끈을 매는 손잡이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무늬를 나타낸 원판형금속거울[圓板型金屬鏡]이고, 서구식과 같이 자루가 달린 것은 시대가 흐른 뒤에 나타났다. 뒷면의 무늬는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요소로서 고고학적으로 중요하다.
*동양
중국에서는 이미 은(殷) ·주(周) 때부터 거울이 있었는데, ‘경(鏡)’이라는 글자를 쓰게 된 것은 주(週)나라 말 BC 3세기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금속 바리때에 물을 담은 것을 ‘감(鑑)’이라고 하였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반리문(蟠촬紋) ·산자문(山字紋) 등 자잘한 무늬를 나타낸 백동제(白銅製)거울이 나왔다. 한(漢)나라 때에는 ‘정백(精白)’이나 ‘일광(日光)’ 등 글자를 넣은 명(銘)을 주출(鑄出)하거나 내행화문(內行花紋)을 나타낸 거울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궁정용으로서 우수한 거울이 상방(尙方:천자의 御物을 담당하는 곳) 관공(官工)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이어서 신수경(神獸鏡)과 화상경(畵像鏡) 등이 생겨났으며, 수(隋) ·당(唐) 때에는 더욱 더 발전하여 해수포도경(海獸葡萄鏡)을 비롯한 백아탄금경(白牙彈琴鏡)과 서도경(瑞圖鏡) 등 독특한 무늬가 있는 것, 외형을 팔화형(八花形)이나 팔릉형(八稜形)으로 한 새로운 모양의 거울도 나타났다. 그리고 금 ·은 도금이나 상감(象嵌)을 하고, 또 칠보(七寶)를 넣거나 나전세공(螺鈿細工)을 하는 등 새로운 기법으로 거울 뒤에 화려한 장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唐)나라 말 이후 수요가 많아져서 거울이 많이 제조되자 점차 조잡해지고, 고대경(古代鏡)의 유사품이나 소문(素紋)의 호주경(胡洲鏡) 같은 거울이 양산되기에 이르러 퇴폐일로를 걸었다.
*서양
서양에서도 고대의 거울은 구리[銅]나 청동 등의 두꺼운 판을 매끈하게 갈아서 반사경으로 한 금속거울로서, 용도는 주로 화장용이었다. 형식상 손잡이거울 ·경대(鏡臺)거울 ·뚜껑 달린 거울 등으로 대별되는데, 유리거울과 달라 매우 무거워서 일반적으로 휴대하기는 곤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거울의 기원에 대하여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금속기시대의 개시와 거의 같은 무렵에 오리엔트 지역에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를테면 이집트에서는 고왕국(古王國)시대의 한 분묘에서 이미 완전한 모양을 갖춘 거울이 발굴된 바 있다. 이집트의 거울은 왕조시대 전기를 통하여 발달하였으며, 특히 신왕국시대 ·그레코로만시대에는 뛰어난 작품이 많다. 약간 편평하면서 대개는 거울의 면이 원형인 손잡이거울인데, 손잡이 부분은 금속 ·단단한 나무 ·상아 ·사기 등으로 되어 있고, 신상(神像) ·인상(人像) ·파피루스나 로터스를 본뜬 것이 보통이다. 서아시아의 거울도 이집트의 것과 모양이 비슷한데,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극히 적다.
그리스에서는 미케네시대에 정교한 선각(線刻)으로 장식된 상아의 자루가 달린 둥근 거울이 만들어졌으며, 주동기술(鑄銅技術)의 발달로 여러 가지 복잡한 디자인의 거울이 나오게 되었다. 특히 여성의 입상(立像)이 머리 위에 원형의 거울을 받치고 있는 모양의 경대, 정교한 부조(浮彫)나 은으로 상감을 한 뚜껑이 달린 거울 등은 뛰어난 작품이다. 이들 장식은 화장도구라는 성격에서 섬세한 여성적 표현을 한 경우가 많고, 또 관능적인 장식주제(裝飾主題)가 선택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 경향은 헬레니즘기(期)에 들어오면서 점점 더 짙어진다.
에트루리아의 거울은 손잡이거울이 많으며, 장식은 그리스와 공통되지만 특히 유려한 선을 활용한 은상감(銀象嵌)의 기술이 뛰어났다. 로마시대의 거울은 그리스 ·에트루리아의 형식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의 사치한 풍조를 반영하여 호화로운 장식을 한 거울이 나타났고, 특히 상류계급에서는 은제의 거울도 사용되었다. 이들이 얼굴을 비춘다는 기능 이외에도 미술품이나 재보(財寶)로 간주되기도 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중세에는 일부 귀족계급의 용품을 제외하고는 거울이 소형으로 바뀌고 검소하게 되었다. 갈아서 광을 낸 금속 조각을 나무나 상아의 작은 곽, 또는 빗의 일부에 끼운 것 등 휴대하기 편리한 것이 나타났으며, 특히 표면에 기사(騎士)이야기의 장면 등을 부조한 상아제의 뚜껑 달린 거울을 귀부인들이 애용하였다.
유리거울도 12~13세기경부터 점차 보급되어 1373년에는 뉘른베르크에서 유리거울직공조합이 결성될 정도가 되었다. 르네상스기에 유리제작의 중심이었던 베네치아에서는 유리판의 뒷면에 주석박(朱錫箔)을 붙이는 방법이 발명되어 이런 종류의 제품이 16~17세기를 통하여 금속거울 대신 전유럽에 보급되었다.
루이 14세는 자국의 미술진흥을 위하여 이탈리아에서 많은 기술자를 초청하였는데, 베네치아에서 프랑스로 옮겨간 유리공들에 의하여 거울의 제법도 전해졌다. 한편,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는 평평한 대형 유리판 제조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대형거울이 생산되게 되었다. 바로크 및 로코코시대를 통하여 궁전이나 성관(城館)의 내벽에 거울을 붙이는 풍습이 유행함에 따라서 프랑스의 거울은 질과 양 모두 이탈리아 제품을 압도하게 되었다.
예컨대, 베르사유 궁전의 유명한 ‘거울의 방’의 유리거울은 프랑스제이다. 특히 로코코 시대의 장식미술의 발달은 가구로서의 거울을 재인식시키는 결과가 되어 뛰어난 금 ·은 기술자나 가구기술자가 거울의 테두리장식 디자인에 관여하는 경향이 생겼다. 예를 들면 영국의 가구 디자이너 티펜데일도 많은 거울을 디자인하였다. 19세기에 이르자 평평하고 투명한 유리판이 양산(量産)된 데다가 은도금의 새로운 기법이 발명되어, 거울은 일반에게 보급되었으나 미적으로 뛰어난 것은 나오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