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 온도가 영하 20도로 떨어진, 1월의 어느 아침, 나는 뜨거운 녹차를 함께 마실 친구를 찾았다. 그녀는 너무 소란스러워서도 들떠 있어서도 안 된다. 티백에서 우러나는 밝은 녹색의 물처럼 우아하게, 평화롭게 시간과 친숙해온… 7년의 시간 동안 자연 숙성된 여인. 귀엽고 동그란 하트형 얼굴, 부드러운 미소, 웃고 있는 눈… 김희애가 하얀 레이스가 달린 미용실 망토를 두르고 말간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다들 '주름이 하나도 없네. 예전과 달라진 게 없어'라고 해서 깜빡 속았어요. 어제 TV 보니까 아니에요. 주름이 왜 없겠어요?" TV 드라마 <아내(기억상실증 환자 유동근을 사이에 두고 전처인 아내 김희애와 후처인 아내 엄정화의 은근한 갈등이 이어질)>가 첫 방송을 탔을 때, 그녀의 두 아들 기현이(5세), 기훈이(3세)는 곤하게 잠이 들었고, 남편(이찬진, 드림위즈 대표)은 어색한지 슬그머니 컴퓨터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김희애는 혼자 거실에 앉아 살구 빛 메이크업이 반짝이는 브라운관의 낯선 '아내'를 지켜본다. 벌써, 7년이다. 아! 옛날이여! "옛날 배우라는 느낌… 화장도 옛날 그대로 평범하게 하면 어떨까, 생각하지만 다들 내게 얘기합니다. 달라졌어요. 옛날처럼 해서는 안 돼요. 요즘은 트렌드가 빠르게 변해요,라구요. 그건 예물용 롤렉스 시계를 차고 백화점을 활보하는 건 쿨하지 않다,라는 그런 말일까요?"
나는 이런 종류의 목소리를 알고 있다. 명확한 발음, 분명하고 위엄 있지만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지 않는 그런 목소리, <아들과 딸>의 후남이의 목소리, 예언적인 그 제목, '나를 잊지 말아요'라고 노래한 깊은 밤의 라디오 DJ의 목소리. 토끼같고, 여우 같은 딸, 여자, 아내로 드라마에 감성적인 잔무늬를 더해주었던 여배우의 목소리. 그리고 7년 전, 돌연 노메이크업에 은테 안경을 낀 채, 한국의 빌 게이츠와 결혼한다고 선언했던 그 여자의 목소리. "우리집에 처음 오던 날, 그때 장마였는데… 해진 신발 밑창 때문에 거실에 젖은 발자국을 남기는 그런 남자였지요. 이찬진 씨, 샤프한 맛이라고는 없는 그와 왜 결혼했을까. '평생 그를 존경할 수 있겠다'라는 믿음 때문이었죠." 날 때부터 관능보단 모성이 앞선 것 같던 김희애의 변함없이 의고적인 뉘앙스. 소란스럽지 않았지만, 그녀는 항상 모던한 행보를 보였다.
고등학교 때 데뷔한 하이틴 스타였고(그러나 김희애는 청소년 드라마가 아닌 주말 드라마 <여심>에서 가난한 학교 선생님과 결혼한 제자 역으로 데뷔했다. 그때까지 "배내옷은 새 것보다 헌 것이 아기 몸에 좋데요"라고 사려 깊게 말하던 열 아홉 살짜리 TV 연기자가 있었던가), 그 세대 여자 연기자 중에 드물게 대학원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당시 '한글과 컴퓨터'로 한국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 받던 남자와 결혼했고, 7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녀 인생에 카니발이 있었던가. 오히려 김희애는 흐르는 강물처럼 관습적인 인생을 살았다. 본능적인 자연주의자… 그리고 자연스러움은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그 사람의 지성만큼이나 중요한 자질이다. "나는 뭐든 몸에 착 맞아야 해요. 수원대에서 교수로 연기를 가르칠 때도 그냥 자연스럽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그 뒤에 유인촌 선배가 중앙대 교수 제의를 했을 때도 고사했고. 만약 <고독>의 이미숙 씨 같은 연기를 내가 할 수 있을까… 힘들 것 같아요. 난 아주 현실적인 연기… 아기 엄마니까, 아기와 엄마 이야기, 나와 윗 세대 부모님의 이야기 그런 거 하면 정말 잘할 거예요. 정물 그림처럼 내가 움직여서 가상의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거, 난 그런 건 힘들어요. 그래서 <폭풍의 계절>이, 영화 <백 한번째 프로포즈>가 힘들었나 봐요."
김희애가 원하는 건 어쩌면 풍경화 같은 드라마. 그녀의 사상대로 사람만한 풍경화가 어디 있으랴. "혼자서 옷방에 숨어들어가 몰래 대본을 외고 있으면 아이들은 어느새 알고는 "엄마, 여기 있어?"하고 문을 두드리죠. 난 항상 그런 현재가 좋아요." 남편과 아이들… 연기자 김희애가 아닌 그들의 보호자, 한 채의 따뜻한 이불처럼 살던 몇 년 동안 그녀는 자신의 연기 세계에 어떤 뚜렷한 비전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마지막 작품이었던 <까레이스키>는 정말 대단했죠. 영하 40도가 넘는 중앙 아시아, 러시아를 돌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어요. 연기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선뜻 하고 싶은 엄두가 안 났던 건 바로 그 추위 때문이었나 봐요. 게다가 아기… 난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얘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나, 그게 마냥 아직도 기적처럼만 느껴져요." 휴일날 햇볕을 쬐고 있는 가족들, 그리고 그들이 더 많은 햇볕을 받기 위해 도와주는 존재, 그것만으로도 시간은 장화를 신고 큰 걸음으로 지나갔다. "씻기고 먹이고 입히다가 이제는 어느새 구르고 넘어뜨리고… 레슬링을 하죠. 아이들이 그만큼 자랐어요." "집에서는 어떤 옷을 입나요?" "값싸고! 질기고! 낡고! 구멍 난! 추리닝!" 그녀가 각각의 형용사에 스타카토처럼 힘을 주는 바람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인어아가씨>의 한혜숙 선배님처럼 정장을 하고 레슬링을 할 거라고 상상하나요? 한때 포대기에 아기를 업고 나가면 남편이 어이가 없는 얼굴로 얘기했죠. "이봐, 당신 옛날에 배우였잖아?"라구요." 그런데 그 배우는 옛날에도 '연기라는 걸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나만의 연기 방법이라면… 그건 연기를, 연기하지 않는 거죠."
그녀가 웃었다. 그녀가 참수당한 '1000일의 앤'같은 연기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 자신, 그 공간 속에 존재하도록 지탱해주지 못하는 캐릭터라면 그 역할은 먼지와 같다고 생각한다. 가족에게 김희애가 그렇듯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한 선택, 그건 연기자가 된 것, 그리고 결혼을 한 것이죠." 김희애는 이제 '배우'라는 직업적인 재정의와 부모와 배우자로서의 의무를 자연스럽게 조화시키고 싶어한다. "남편은 어제 체크 울 남방에 구멍이 숭숭 뚫린 여름 재킷을 입고 나가더라구요. 엔지니어의 엉터리 컨셉이죠. 큰애 기훈이는 어젯밤 일하는 이모와 자면서 "엄마가 보고 싶어요"라고 울었대요. 내가 없으면 안 돼,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곧 그들 스타일대로 독립해 나갈 테니까요. 나도 그래요. 혼자가 아니라 엄마이고 아내이기 때문에, 더 지혜롭고 당당해져야 한다고 기도하거든요."
나는 그녀의 현학적이지 않은 아주 일상적인 표현들이 마음에 들었다. 김희애는 스스로 '나, 촌스럽잖아요?'라고 얘기하지만, 돌체 앤 가바나 코듀로이 코트와 딸기 무늬 레스포색 가방을 들고 있는 이 늘씬한 여자는 '난 쿨해요'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시크해 보인다. 교수로 재직할 때엔 30대 전용 고급 화장품 회사가 그녀를 찾았고, 아기를 낳고 난 후엔 분유 회사와 가전 제품 회사가 그녀를 찾았다. 황신혜처럼 오래도록 '여배우'라는 이름으로 살지는 못했다. "내겐 그게 자연스러운 삶이지요. 그런 말 있죠? '열흘 동안 붉은 꽃?'" 꽃이 피었다 지면 그 자리에 열매가 영근다는 김희애에게, 마흔 살이 가까워 온다는 건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 반면 자신의 메이크업이나 룩이 좀더 세련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늘 똑같으면 보는 사람이 지루할 테니까요. 노력하고 있어요. 전문 스타일리스트를 집으로 초대해서 열심히 상의해요." 그녀는 앞으로 아주 바빠지고 싶다. "다시 전문적으로 일을 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내가 니콜 키드만을 보고 행복해하고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처럼, 사람들이 김희애를 보고 울고 웃고 신뢰감을 느끼고 그랬으면 하죠. 그러니까 다들 날 바쁘게 해줘야 해요."
이른 아침에 함께 녹차를 마시고, 사진 촬영을 끝내고 그리고 김희애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비빔밥을 앞에 두고 캐주얼하게 성호를 긋는 그녀가 '산다는 게 좋아 죽겠다는' 얼굴, 잠깐 헌신의 미소를 지닌 수녀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내 카드를 저지하고, 모든 스태프들의 점심 값을 직접 치뤘다. "더 멋진 점심을 사줬어야 하는데…." 맙소사, 연예인에게 얻어먹다니! 난 정말 운이 좋은 기자다. 완벽하고 교과서적이고 냉철한 사람이 아니라 우아하고 불완전하고 친절한 여자에게 '접대'를 받았으니. 한번도 신비로웠던 적 없고 한번도 도도한 적 없었던, 모성의 본능을 타고난 그런 여자 말이다.
에디터 / 김지수
스타일리스트 / 정윤기
액세서리 / 테크노마린
의상 / 강희숙 부티크
첫댓글 꺅 이게 그거네요 2011 보그랑 이어지는 ㅠ 궁금했는데 ㅠㅜㅠ 감사해욧
아 이런글 읽으면 제가 더 흥분되고 뿌듯하고 그러네요. ㅎㅎ
이러기에.........언니의 열렬한 팬이 될 수밖에 없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