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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기적을 만들죠. 노력하면 언젠가는 고통도 감동이 됩니다."
록밴드 ‘부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김태원, 그의 음악, 그리고 예능을 말하다 “평생을 공부해도 알까 말까 한 것이 삶이듯 음악 또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26년간 록그룹 부활을 이끌어온 기타리스트 김태원(46), 그에게 삶은 곧 음악이었다. 사랑의 아픔도 외로움도, 고통도, 사람들의 무관심도, 그가 겪는 모든 것은 음악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불현듯 예능인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 또한 음악을 위해서였다. 부활을 알리기 위해, 부활의 음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내놓으며 기꺼이 ‘국민할매’가 된 음악인 김태원, 그의 삶과 음악 그리고 예능 이야기. 글 이권자, 사진 김혜균 ‘부활’에서 기타 치는 사람, 김태원입니다
“예능에 욕심이 있거나 꼭 웃겨야 한다는 집착이 없어요. 웃기려고 대본을 짜지도 않아요. 그냥 그 순간에 할 얘기가 생각나면 하고, 없으면 안 하는 거죠.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을 사랑해주신 것 같아요. 덕분에 부활이 알려져서 감사할 뿐이지요.” 시청자들에게 더욱 신선한 충격이 되었던 것은 그가 바로 록그룹 ‘부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라는 사실이었다. 80년대 ‘시나위’ ‘백두산’과 함께 인기를 끌었던 실력파 록밴드 ‘부활’, 김태원은 몰라도 ‘부활’은 알았고, ‘부활’을 모르는 사람도 그들의 노래에는 익숙했다. 가슴 아픈 사랑 한번 안해본 사람이라도, ‘비와 당신의 이야기’나 ‘사랑할수록’을 들었고, ‘네버 엔딩 스토리’의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루어져 가기를~’ 따라 부른 적이 있을 것이다. 절절한 가사와 심금을 울리는 서정적인 멜로디. 그 아름다운 노래들을 작사 작곡한 사람이 바로 ‘저 웃기는 사람’ 김태원이었다. 그 관심은 예능 출연을 결심한 음악가 김태원의 바람이기도 했다. “40대 음악가가 나올 수 있는 음악프로가 거의 사라졌잖아요. 게다가 부활 앨범 세 장이 연속 잘 안되면서 우리를 알릴 수 있는 통로가 없었어요. 예능에 나가서라도 부활이 존재한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2008년 가을, MBC-TV ‘황금어장’의 ‘라디오스타’부터 출연하게 되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친근한 ‘국민할매’가 기타를 치는 부활의 콘서트는 매회 매진되었다. 1985년 결성한 ‘부활’의 전신은 ‘디엔드(The End)’라는 언더그라운드 밴드. 기타 김태원, 베이스이자 보컬 이태윤, 드러머 황태순으로 구성된 그들은 뛰어난 가창력의 보컬 김종서를 영입하며 이름을 ‘부활’이라 바꾸었다. 자작곡 없는 카피밴드였지만, ‘딥 퍼플’이나 ‘레드 제플린’이 내한 공연을 하는 듯 똑같이 연주하는 부활의 인기는 상당했다. 공연장마다 좌석은 꽉 찼고 관객들은 열광했다. 음반을 내자는 제의도 들어왔다. 하지만 앨범을 내기 직전 김종서가 탈퇴했고, 김태원은 동네 후배였던 이승철을 새 보컬로 영입했다. 그렇게 1986년 부활 1집을 내며 발표한 곡이 바로 ‘희야’다. “많은 분들이 ‘희야’가 제 곡인 줄 아는데, 그건 다른 분 곡을 받아 편곡한 거예요. 제가 만들어 놓은 곡은 타이틀곡으로는 너무 길고 어려웠어요. 좋은 기회가 왔는데 제 욕심만 차릴 수가 없어서 곡을 찾으러 다니다 잘 만났던 거죠.” 부활 1집은 30만 장 이상이 나가며 속칭 ‘대박’이 터진다. 하지만 ‘희야’의 인기는 곧 이승철의 인기였다. 보컬 뒤에서 기타를 치고 베이스를 치고 드럼을 치는 이들에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상처였다. “저를 몰라보기 때문이 아니라, 팀에서 차지한 음악적 비중을 인정해 주지 않는 데 대한 상처가 있었어요. 또 그때는 제 나이가 어렸잖아요. 감당할 수 없었던 거죠.” 주체할 수 없이 떠오르던 멜로디 그는 80년대 가요계를 뒤흔들었던 대마초 파동의 소용돌이에도 휘말리게 된다. 연습 벌레였던 김태원은 대마초를 접한 후 늘 위태위태했으며, 만드는 노래 역시 마치 유작(遺作)처럼 암울하기만 했다. 1987년 2집 발표 후 그는 결국 구속이 된다. 그리고 출소 후 다시 재기를 위해 노력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음악가가 아니라 마약 환자로만 취급했다. 한편 솔로로 독립한 이승철은 어마어마한 스타가 되었고, 동료들도 다 떠났다. 그 외로움과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는 다시 마약에 손을 댄다. 하지만 1991년 두 번째 구속 후, 그는 목숨을 걸고 한 번에 끊었다고 했다. 죽도록 음악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멜로디를 주체할 수 없었어요. 음악을 그만두면 난 정말 죽는구나….” 그는 금단현상을 겪으면서도 보컬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만난 사람이 ‘소름 끼치도록 노래를 잘했던’ 보컬 김재기였다. 가난한 무명 가수와 몰락한 기타리스트는 수없이 음반사를 찾아다닌 끝에 겨우 음반을 내기로 한다. 하지만 ‘사랑할수록’의 데모음반을 녹음한 다음 날 보컬 김재기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천재 보컬이자 친구가 하루아침에 떠나자 그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래는 세상에 나왔다. 고(故)김재기의 동생 김재희가 형을 대신해 공연했고, 부활의 3집 앨범은 120만 장을 넘기며 큰 인기를 끌게 된다. 그의 표현대로 “부활의 완전히 부활이라는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후 지금의 정동하까지 모두 9명의 보컬을 만나며 부활은 계속되어 왔다. 침체기도 많았고, 해체의 위기도 있었다. 다른 멤버들 또한 숱하게 바뀌어왔다. 하지만 김태원은 언제나 리더로서 자리를 지켜왔고, 2010년 열두 번째의 앨범을 발표하며 꾸준히 활동을 하는, 26년 역사의 록그룹 부활을 있게 한 것이다. 첫 번째가 가정, 두 번째가 음악 “경험하지 않은 건 쓰지 못해요. 거짓말을 해도 티가 나고 없는 걸 지어내도 티가 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 팔자는 곡을 쓰려면 겪어야 하나 보다 하죠.” 김태원은 1965년 서울 용산에서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창의력이 뛰어난 아버지는 발명가셨고, 영화배우 못지않은 뛰어난 미모의 어머니는 재미있고 활달한 분이었다. 부유하진 않지만 열심히 사시는 부모님과 평범한 형제들, 하지만 모 방송에서 “부모님이 늙으신 것은 모두 자신 탓”이라 했을 만큼 그는 어린 시절부터 걱정을 많이 끼치는 자식이었다 한다.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를 잘 안 갔어요. 학교에 가면 숨이 막혀서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아예 적응을 못 하는 거죠. 뭔가 그쪽으로 장애가 있었던 거 같애요.” 하지만 부모님이 힘들어할까봐 어린 태원은 그 사실을 숨겼다. 그러던 그가 기타를 처음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 공부도 못하고 장기도 없고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까지 있던 사춘기 소년이 사촌 형의 기타 치는 모습에 반하게 된 것이다. “도레미 쳐가면서 독학으로 배웠어요. 그러다 LP판을 틀어놓고 레드 제플린이나 딥 퍼플 음악을 똑같이 흉내 냈죠. 한 곡을 카피하는 데 6개월 정도 걸렸어요.” 그러던 고2 때였다. 그가 ‘치명적인 사랑’이라 말하는 첫사랑을 하게 된다. “그 아이는 너무 정상적이었고, 저는 이미 평범한 학생이 아니었어요. 목숨을 걸 정도로 사랑했는데 강제로 헤어져야 했을 때의 충격이 컸어요. 그때부터 가사를 쓰기 시작하죠. 그 아이를 못 만났다면 아마 작곡가는 되어도 작사가는 못 됐을 거예요.” 고2 소년은 첫사랑과 헤어진 아픔을 ‘비와 당신의 이야기’라는 노래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지방 카바레에서 일당 1,000원을 받는 밤무대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술에 취한 이들이 시비를 걸어도 여관방을 전전해도,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큰 희열이었던 시절,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 이현주씨를 만난다. “1984년에 만나 1993년에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옆에서 나를 지켜본 사람이에요. 제가 감옥살이할 때도 정신병원에 갔을 때도. 교도소에 있을 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면회를 왔었어요. 마약을 이겨내는 데에는 아내의 사랑에 감동해서인 것도 큽니다.” 그는 아내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런 아내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 중 하나가 ‘회상Ⅲ’-훗날 이승철이 ‘마지막 콘서트’라는 제목으로 다시 부른 히트 곡-, 그리고 ‘네버 엔딩 스토리’다. 어떤 경우에도 잔소리 한 번 안 하시고 묵묵히 지켜봐주신 아버지, 아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시던 어머니, 그리고 아내…. 그 깊은 사랑을 죽을 때까지 못 갚을 것 같다는 김태원, 그에게 가족은 무엇보다 우선한다. “저에게 가장 첫 번째는 두 아이의 아버지인 것이고, 그 다음이 음악이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 가정을 소홀히 하는 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모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번이 가정, 그리고 2번이 음악.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예요.” 늘 노력했던 사람으로 남고파 가정과 음악에 이어 그가 세 번째로 소중히 여기게 된 것이 있다면 바로 ‘예능’이 아닐까. “예능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전에는 늘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너무 외로운데 그조차도 남들도 다 그러고 사는 줄 알았던 거죠.” 그런 그에게 연예인 친구가 생기게 해준 것이 바로 예능이었다. 특히 7명의 남자들이 주어진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KBS-2TV ‘남자의 자격’은 그에게 가족 같은 친구들을 만들어주었다. “경규 형은 강하지만 굉장히 여린 분이에요. 제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는 존재고, 국진이는 진짜 친구로서 조언을 많이 해줘요, 윤석이는 제가 아는 연예인 중에서 음악에 가장 미쳐 있는 친구고, 성민이는 진짜 천진난만해요, 정진이는 아주 든든하고, 형빈이는 막내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죠. 아름다운 칠 형제 아닙니까.” 부활의 팬 중에는 카리스마 넘치던 기타리스트가 ‘국민할매’가 된 것에 속상해하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김태원은 “괜찮다”고 말한다. 오히려 아무에게나 ‘국민’자가 붙느냐며 웃는다. 음악을 통해 감동을 주었듯이, 웃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라는 것.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한 번도 음악인이 아닌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자신감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베이스 서재혁, 드럼 채제민, 보컬 정동하, 지난 수년간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멤버들이 든든히 버텨주고 있는 것이다. “나를 부축해주고 견뎌준 멤버들에게 감사해요. 함께 부활의 음악을 찾아 나갈 겁니다. ‘오늘은 부활 음악이 듣고 싶은걸?’ 하게 되는, 그런 색깔 있는 음악요.” 김태원은 훗날 사람들에게 늘 노력하던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자기의 아집으로 인생을 살지 않고 자기를 뜯어고쳐 가면서 무언가를 추구했던 사람. 그리고 변화했던 사람으로 말이다. 그는 또 살아왔던 날들의 단 한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때는 그런 일들을 겪어야만 했다고 생각했으며, 고통 또한 변화하려는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라 믿었다는 것. 록그룹 ‘부활’의 리더이며 기타리스트이자 작사 작곡가인 김 태 원님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중2 때 독학으로 기타를 배운 님은 1985년 ‘부활’을 결성한 후, ‘비와 당신의 이야기’ ‘사랑할수록’ ‘네버 엔딩 스토리’ 등 주옥같은 멜로디와 아름다운 가사로 심금을 울리는 곡들을 발표해왔습니다. 2009 Mnet 아시안 뮤직 어워드 록음악상, 2009 제17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가요 부문 10대 가수상, 2003 KBS 음악대상 작사작곡상, 1994 골든디스크 본상, 1994 서울가요대상 본상을 수상한 바 있는 님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가이고자 합니다.
출처 : 월간<마음수련> 2010년 6월호 webzine.maum.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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