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봄이 오는 길목 꽃눈과 잎눈이 돋을 무렵 법정스님이 떠났다. 나는 스님의 법문을 직접 들은 바는 없지만 그분 문장에서 맑은 영혼으로 와 닿은 큰 울림을 받았다. 법정스님에게 영향을 끼쳤던 인물은 이외로 150여 년 전 세상을 뜬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였다. 소로는 뛰어난 자연 관찰자요, 사회 문제에도 관여한 자연주의 사상가로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서 킹에도 영향을 주었다.
소로는 1817년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법률가나 교수와 같은 안정된 직업 대신 측량 일, 목수 같은 정직한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나이 스물여덟 살 되던 해인 1845년 윌든 호숫가에다 손수 통나무집을 짓고 2년 남짓 자급자족의 원시채집 생활을 보냈다. ‘월든’은 소로가 자연 묻혀 생활하고 사색한 경험을 담은 생태에 관한 보고서다.
윌든은 소로에게 문학적 가치로서의 의미 있는 저술이기도 했지만 자연과 삶에 대한 경건함과 인간의 본성을 일깨워준 기념비적인 역작이다. 자연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생각과 인문학적 향기는 대단하지만 다소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접근이 부족했다는 평도 있다. 이런 일부 지적에도 불구하고 윌든은 자연에 대한 예찬과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아 금세기 생태주의에 한 획을 그었다.
내가 윌든에서 주목한 것은 소로가 살았던 숲속의 생태였다. 그 숲은 호숫가에 있었다. 나도 평소 산이나 물가를 즐겨 찾아갔다. 소로는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면서 얼마든지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철저하게 외면하고 거절했다. 소로가 살았던 미국 북동부 윌든 호숫가는 지구 북반구 중위도로 계절의 변화도 우리나라와 엇비슷했다. 가을이면 낙엽이 지고 겨울이면 호수가 얼어붙었다.
소로는 윌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지을 때 들었던 비용을 자세한 항목까지 밝혀두었다. 자신이 살 집을 지었기에 그가 들인 품삯은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살 집터 주위에서 그저 가져온 목재와 돌과 모래 값도 뺐다고 했다. 그 당시 기준으로 판자를 비롯한 열세 항목 경비는 28달러 12센트였다. 그러면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비용이 많이 드는 주거문화를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책 곳곳에는 윌든 호숫가 식생이 언급되었다. 역자가 고심 끝에 찾아낸 이름이겠지만 여러 나무는 내가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과 달랐다. 몇몇 물고기나 동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나는 하나도 낯설지 않고 내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해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었다. 호젓한 숲 속에서 새소리를 듣고 맑은 공기를 쐬며 산 생활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축복이리라. 곁에는 맑은 호수까지 있었으니.
그가 직접 지은 농사도 요즘 말로하면 친환경적인 자연농법에 의한 경작이었다. 그는 사람이 가축의 주인이 아니라 가축이 사람의 주인이며, 가축이 사람보다 훨씬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일은 그것을 사 먹는 사람이나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하여 재배하는 사람에게는 참다운 맛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했다. 산딸기의 참 맛을 제대로 알려거든 소를 모는 소년이나 들꿩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는 새로운 것을 얻으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 했다. 헌 옷은 뒤집어 다시 짓고 옛 친구들에게 돌아가라면서 변하지 않는 것은 사물이고 변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 대목에서 인용된 한 철학자의 말이 바로 공자다. “삼군으로 된 큰 군대라도 그 우두머리를 사로잡으면 무너뜨릴 수 있으나, 필부일지라도 그 지조는 빼앗을 수 없다.” 삼군가탈수야 필부불가탈지야(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소로는 19세기 본토박이 미국인이었지만 동양고전에도 정통했다. 윌든 군데군데 논어와 맹자, 그리고 대학이나 중용 구절이 나온다. 단순히 명구를 소개하는 정도가 아니라 소로의 정신세계에 녹여진 동양문화의 진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동지가 지나고 임진년 새해가 밝았다. 나는 새해 첫날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소로가 남긴 ‘윌든’을 다시 펼쳐보면서 우리의 산과 들과 강과 바다를 생각했다.1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