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4년 제작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는 "나는 어이해 원자폭탄을 두려워하기보다 사랑하게 되었는가"라는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감독이 워낙에 유명한 사람인지라, 썬더도 "시계태엽 오렌지(맞는 번역인지 아직도 모르겠음)", "풀 메탈 재킷",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 "아이즈 와이드 셧" 같은 영화를 일부러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보기 전까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가 크게 인상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닥터 스트레이지러브"를 보기로 마음먹고도, 실제로 감상하기까진 5년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네요. 그런데 말이예요, 이 영화는 정말 별 50개 짜리입니다. 현대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구닥다리인 화면들 - 그것도 흑백 - 과 연극을 보는 것 처럼 영화의 대부분이 단 3개의 장소에서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구성과 아리스토파네스의 재림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풍자가 그 엉성한 화면마저도 빛나게 해줍니다.

특히나 이 장면... 소름이 돋습니다.
일명 냉전시대라 불리던 60년대, 미국과 소련간의 핵무기 경쟁이 극에 달하던 그 시기에, 도대체 핵무기를 통한 전쟁억지력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를 관객에게 묻는 영화죠.
편집광적인 애국심에 사로잡힌 미국의 한 야전 사령관 잭 리퍼가 어느날 독자적으로, 핵폭탄을 탑재한 B-52 전폭기들에게 소련 공격을 명령합니다. 원래 소련에 대한 핵공격 명령은 대통령만의 권한이었는데, 소련의 불시공격에 대응한다는 차원에서 보복공격 명령권한이 야전사령관에게도 주어지는 법안이 통과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미군 지휘관들의 건전한 이성을 신뢰했기에 가능한 입법이었죠. 하지만 야전 사령관 잭 리퍼는 미국의 60년대에 제기된 각종 자유주의적 사조를 "공산당원"들의 음모에 기인한 것으로 확신하는 망상에서, 더이상 병들기 전에 악의 근원인 소련에 한방 먹여야 겠다는 신념에서 중대 결단을 내린 거예요.
이때부터 화면은 3개의 장소를 교대로 비춥니다. 핵공격 명령을 받은 한 전폭기 내부, 어이없는 상황에 혼란을 거듭하는 미 정부의 전시작전통제소, 그리고 잭 리퍼의 집무실 말이죠. 잭 리퍼를 설득하여 공격취소암호를 알아내려고 분투하는 잭 리퍼의 부관 맨드레이크 대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잭 리퍼는 자살하므로써, 공격취소암호를 지옥까지 가져가 버립니다.
워룸(전시작전통제소)에서는 자다가 따귀를 맞은 느낌의 대통령과 어차피 이렇게 된거 전쟁한판 벌여보자라는 총 사령관 터지슨 장군간의 설전이 벌어집니다. 대통령은 소련 서기장과 통화를 원하지만, 서기장은 만취상태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의무를 다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합니다. 황급히 불려온 소련 대사의 등장에 터지슨 장군은 적의 첩자를 워룸까지 불러온 것에 대해 경악해마지 않고, 그와중에 워룸의 모습을 몰래 촬영하고 있는 대사와 멱살잡이를 하죠.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소련에서 신무기를 하나 개발한 사실을 늦게서야 알게된 것입니다. 미국과의 군비경쟁에 지친 소련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무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름하여 "둠스데이 디바이스(마지막 심판의 날에 떨어진다는 불기둥?)". 미국의 소련을 공격했을 때 자동으로 작동하는 이 무기는 지구표면을 방사능으로 덮어서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게 하지 못하는 것이었죠. 워룸에 있던 미국 비밀무기전문가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그 존재를 확인해줍니다.
터지슨 장군 : 그런 걸 만들었으면 만들었다고 말을 해야지!
소련 대사 : 월요일날 발표예정이었소.
긴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워룸의 분위기는 하찮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마치 골치아픈 일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다른 생각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전폭기 내부의 분위기는 엄숙합니다. 국가와 가족의 기대를 언급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훈련받은 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려는 모습이 참으로 가상합니다. 이런 상황의 디테일한 묘사에 그렇게 신경을 썼다는 큐브릭 감독의 꼼꼼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맨드레이크 대령은 잭 리퍼의 메모를 검토해서 마침내 공격취소명령을 알아내지만, 이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것이 또 쉽지가 않습니다. 부대내 전화선이 다 끊겨있어 공중전화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데 동전이 없어요. 코카콜라 자판기를 부셔서 동전을 꺼내려고 해도, 사유재산 보호를 운운하는 다른 군인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고 말이죠. 사실 영화에서 맨드레이크 대령은 영국 공군 소속으로 장교교환 프로그램에 의해 미공군에서 잠시 근무하는 설정이라, 완전 이방인이예요.
우여곡절끝에 공격명령은 취소되고, 전폭기들은 귀환합니다. 상황이 일단락되는 듯 싶었지만, 1대의 전폭기, 주인공 전폭기는 소련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교신불능상태가 된 덕분에 공격취소 명령을 받지 못합니다. 줄줄새는 연료탱크, 열리지 않는 폭탄 해치에도 불구하고 성실한 군인들은 임무를 완수할 것인가... 주인공들의 노력이 실패하기를 그렇게도 염원하면서 영화를 본 기억이 썬더는 없습니다.
전직 나치였던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통제되지 않는 왼손 - 숨기고 싶은 속마음을 바로 드러내는 - 을 가진 사람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다수희생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는 최후의 사태에 대해서도 '플랜'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 지하에서 한 100년쯤 살다 나오자"
즉흥적인 제안이 아니었던 것이 이미 남자와 여자의 구성비까지 정해놨단 말이예요. 남자 1명당 여자 10명! 이 소리에 눈이 번쩍 뜨이는 터지슨 장군의 표정이 가관입니다.
영화를 다 본 후에도 경악은 끝나지 않으니, 이 영화에 출연한 피터 셀러스는 1인 3역을 했습니다. 썬더는 그렇게나 재미있게 영화를 봤음에도 몰랐습니다. 원래 계획은 1인 4역을 할 예정이었다는군요. 하지만 각 배역을 개성있게 연출하기에는 너무 부담이 컸던지라 1인 3역으로 축소했답니다.
CG가 영화인 것처럼 인식되는 시대에, 헐리우드 감독들에게 전해주고 싶어요.
"이 영화를 보라..."
첫댓글 영화에 대하여 해박하시군요.^^
그렇죠? ㅎㅎㅎㅎ 제가 아시는 썬더라는 분의 글이예요. 대단한 감각을 가지신 분이예요. 아날로그 영화가 그립군요. 저가 영화광이어서 이 글을 모시고 왔씁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