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言論人 베델先生 景慕대회!
(사)대한언론인연맹 명예회장
코리아 이슈저널 발행인 최계식
2024년 5월 1일 오전 11시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공원‘에서 영국 언론인 베델 서거 115주년 경모대회가 엄숙히 진행됐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과 植民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알린 베델 기자는 1968년 건국훈장(대통령장)추서, 명예의 전당에 첫 번째 헌정자이다.
언론인 베델 : 1904년 3월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의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 통신원으로 임명받아 4월 14일 저녁 일제의 방화로 불타버린 경운궁 화재사건(폐허가 된 대한제국 황궁)을 다룬 뒤에 4월 16일 해고되면서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이었던 ‘우강 양기탁,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등과 신문창간을 계획하고 1904년 7월 18일 베델선생이 사장으로 취임하고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창간 당시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제작 국문 2면, 영문 4면 한영 합판이었다.
※ 대한매일신보와 일제와의 투쟁 보도 내용 ※
1. 황무지 개간권 비난 - 창간호 사설에서 위반을 지적
2. 한일협약 비난 - 1904년 8월 일제 강제 체결
3. 국채보상운동의 총집합소 신민회 비밀애국 결사체 결성
4. 을사늑약 체결 - 일제비난
5. 고종황제의 밀사 사건보도
6. 베델 사장에 대한 일제의 직접적인 탄압
7. 베델의 명예회복 그리고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
신문창간은 일제의 간섭으로 영국인을 내세운 이유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불법주둔하면서 전쟁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민간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을 강행하였는데 이러한 일제의 검열망을 뚫을 수 있는 길은 당시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인 명의로 신문을 발행하는 길 뿐이었다.
일제탄압에 1908년 7월 12일 ‘우강 양기탁’선생이 구속되었다. 5차 공판 끝에 무죄 석방되었다. 베델 사장이 물러나고 비서였던 영국인 만함(A. W. Marnham)이 사장이 되면서 1910년 6월 19일 갑자기 판권을 사원이었던 ‘이장훈’에게 一金4만원에 판권 및 명의 일체를 넘겨주고 우리나라를 떠났다.
경술국치 다음날부터 대한의 두 글자를 떼어내고 「매일신보」가 되어 총독부 기관지로 바뀌었다. 매일신보는 1945년 11월 10일 정간처분이 내려졌다.
언론인 베델의 죽음과 유언 : 베델(Ernest Thomas Bethel)은 상해에서 금고형을 받고 끊임없는 일제의 위협과 박해를 받고 영국정부의 압력까지 받고 신문사 간부들의 구속수사로 이에 대한 분개심과 신문발행의 방해 및 자금난으로 건강을 크게 해쳐 심장병으로 1909년 5월 1일 37세로 순국했다.
그의 유언은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하여 대한의 동포를 구하라’
고종황제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태극기를 하사했고 이 태극기와 영국 국기로 관을 감싸안았다. 고종이 지어준 이름이 배설(裵說)이다.
이번 경모대회는 裵說선생 기념사업회 會長인 배영기 교수가 주최했으며 대회장인 홍문표 국회의원은 오늘 11월 세계포럼대회를 개최하여 배설 선생의 동상 및 유족에게 올바른 보훈정책 마련과 문화 확장을 위해 희생을 감수할 것을 약속하고 새로운 각오를 밝혔다.
최계식
2024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