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8:15~27)
붙잡히신 예수님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오늘 본문은 대제사장의 심문이다.
체포도 불법이고
심문의 방법도 올바르지 않다.
대제사장이 심문하고
예수님의 답변이 그들의 원하는 방식이 아니자
아랫사람 누군가가 손으로 예수님을 때린다.
예수님의 합리적인 변론에 다짜고짜 폭력 행사를 한 것이다.
올바른 접근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고,
대제사장에 대한 예의 등의 주변적인 것,
그리고 예수라는 메신저 자체를 악마화하는 것을
폭력의 정당성으로 삼는 것,
슬프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악의 속성은 그렇다.
나의 부족함을 알아서 진리를 받기 위해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이 아니라
이미 편견, 보다 본질적으로는 죄로 결정된
사안을 꿰맞추기 위해 상대방을 강압한다.
나에게 부여된 이름표가
'신앙인'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봤자
위에 적은 식의 행동을 하고 있다면
이름 뿐인 신앙인이다.
진리를 듣고, 깨닫고, 내재화 되고, 행동까지 가도록
분투, 처절한 투쟁을 해야 비로소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된다.
그러던 와중에 한 구석에서는,
그리고 의기양양, 호언장담하던 베드로가
3번 부인하는 장면이 설명된다.
씁쓸하면서도 탓하지 못하는 것은,
나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마침 닭이 우는 것은 기막히다.
잠시 잊었던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는 연결점이 된다.
닭의 울음 소리는 아마도 베드로를 통곡케 했을 것이다.
진리를 알고 올바른 것을 아는대로
잠시 미친 것처럼 전혀 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
어찌보면 그것이 인간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얼토당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내 회복할 수 있는 양심이 살아있느냐는 것.
그래도 베드로는 선한 양심이 잠에서 깨어났으므로
통곡하며 돌이킨다.
저렇게 환원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것이 희망의 시작이다.
다만 가장 두려운 것은,
그렇지 못한 것. 즉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이
양식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모습이다.
그것이 무감각해질 때 소망도 사그러지는 것이 된다.
<오늘의 명언>
생명을 잃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제자의 사명을 결코
완수할 수 없다. -옥한흠
"하나님, 어제 오늘 학교에서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박 2일의 패턴에 대해서 지혜와 순전함을 허락하소서.
좋은 루틴을 만들게 하소서.
1박 2일의 생활 패턴이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귀한 영혼들을 제게 주셨는데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게 해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