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빙점] 유괴
“루리코가 왜 이렇게 안 오지요, 아주머니?”
감자를 고르고 있던 쓰기코가 일손을 멈추고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여느 때보다는 좀 늦네. 쓰기코, 그 일이 끝나면 데리려 가 봐. 요시코네 집에 가 있을 테니까.”
나쓰에는 루리코의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빠에게 이를 테야.”
하고 무라이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보여준 루리코가 조금이라도 늦게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루리코를 데리러 간 쓰기코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이 가까워싿. 그러나 7월이라서 그런지 밖은 아직 훤했다.
‘어떻게 된 걸까?’
나쓰에가 다 만든 마요네즈를 찬장에 넣었을 때쯤이야 쓰기코가 돌아왔다.
“아주머니, 루리코 왔어요?”
“아니, 아직 안 왔어. 요시코네 집에 없어?”
“네, 오늘은 두 시쯤에 돌아갔다고 하던데요.”
“두 시쯤에?”
나쓰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두 시라면 루리코가 응접실에 들어온 무렵이 아닌가. 그 이후 지금까지 세 살 난 루리코가 어디에 가 있단 말인가.
“선생님도 싫어! 엄마도 싫어! 아무도 나하고 놀아 주지 않아.”
이렇게 투정을 부리던 루리코의 말이 지금에 와서야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때 귀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쓰에는 겨우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건 루리코가 아니라 뺨이 붉은 요시코였다.
“이거 루리코가 잊어버리고 갔어요.”
불쑥 내민 것은 나쓰에가 루리코에게 만들어준 것으로, 50센티 정도 디는 안고 노는 인형이었다. 나쓰에는 그것을 보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주목(朱木) 울타리 옆에 한참 전에 쓰기코와 함께 루리코를 찾으러 갔던 도오루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엄마, 나 배고파. 루리코는 아무 데도 없어.”
“쓰기코 누나에게 밥 달래서 먹으렴.”
나쓰에는 요시코네 집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 아직도 못 찾았어요?”
초등학교 교사인 요시코의 엄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나왔다.
“시험림에도 가 보셨어요?”
“아뇨, 아직 가보지 않았어요. 그 앤 혼자서는 절대 숲속에 들어가지 않아요.”
“그래도 시험림은 아이들의 놀이터잖아요?”
요시코의 엄마가 앞장서서 루리코를 찾아 나섰다.
나쓰에는 게이조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 아이가 없어진 게 확실한 건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될 수 있으면 게이조에게 알리지 않고 루리코를 찾고 싶은 마음에 그냥 자기 집 주목 울타리 옆을 달음질쳐서 시험림 속으로 들어갔다.
시험림은 조용하였으며 언뜻 보기에 아이들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시험림은 아사히가와 영림국에서 관리하는 국유림이었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오래된 외국산 침엽수를 많이 심어 놓은 인공림으로, 총면적이 18.42헥타르쯤 되었다.
나무의 종류는 뱅크셔소나무, 독일 가문비, 유럽 적송 등 15,6종이나 되고, 그 종류에 따라 숲이 연이어 커다란 삼림을 이루고 있었다.
시험림 안에는 관리인이 거처하는 낡은 집과 빨간 지붕을 이은 창고와 외양간이 있었다.
쓰지구치 집의 뜰은 이 시험림의 입구에 있는 키 큰 스트로브소나무 숲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주목 울타리로 에워싸인 나직한 대문이 달려 있고, 빨간 함석 지붕의 이층 양옥과 푸른 함석 지붕의 단층집으로 구성된 견고한 저택이었다.
이 시험림을 3백 미터 가량 빠져나가면 이시카리(石狩) 강의 지류인 비에이(美映) 강에 이르게 된다.
얼음이 녹은 것 같은 맑은 강물이 저편으로는 겨울이면 스키장으로 사용되는 이노사와 산이 보이고, 멀리 동쪽으로는 다이세쓰(大雪) 산에 연결되는 도카치다케의 연봉(連峯)이 우뚝 솟아 아름답게 보였다.
아이들은 이 숲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다나 싫증이 나면 비에이 강에서 헤엄을 치거나 물고기를 잡으면서 즐겁게 놀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모두들 아사히가와의 여름 축제에 갔는지 숲속에는 사람의 모습이라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 숲속은 어두컴컴했다.
“루리코!”
“루리코!”
하고 불러 보았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쓰에는 겁이 더럭 났다.
관리인이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병원댁 아주머니, 왜 그러시는 거예요? 오늘은 웬일인지 아이들이 숲속에 들어오지 않았는데요.”
관리인은 아주 친절한 사람으로, 언제나 루리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하였다.
나쓰에와 요시코의 엄마는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요시코의 엄마는 초조한 나머지 독일가문비 숲속으로 달려갔다. 나쓰에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숲속에서는 산비둘기가 나직하게 울고 있었다.
“선생임 싫어! 엄마도 싫어! 아무도 나하고 놀아 주지 않아.”
루리코의 말이 또다시 생각났다.
나쓰에는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좀처럼 햇살이 닿지 않는 숲속 길은 부드럽고 축축했다. 그 부드러운 흙을 밟고 걸어가자니 발 밑에서부터 불안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움푹 팬 곳으로 들어서자 나쓰에의 발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까마귀의 시체였다. 까마귀의 날개가 부근에 흩어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숲속에는 저녁 햇살이 감돌고 있었다. 연기가 낀 듯한 희부연 빛이었다. 나무들 사이에 비스듬히 새어 드는 햇살은 군데군데 무늬를 이루고 있었으나, 나쓰에에게는 그 무늬조차 흐릿하게 보였다.
“루리코가 없어졌소?”
나직하지만 준엄한 게이조의 목소리였다. 나쓰에는 움찔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보이지 않는 거요?”
게이조의 목소리는 굳어 있었다. 나쓰에는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낯선 남편의 얼굴이었다. 나쓰에는 이런 남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이전의 나쓰에였다면 “그렇게 무서운 얼굴 하시는 거 싫어요.” 하고 말햇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무라이와의 일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고, 루리코의 행방을 알 수 없는 것 때문에 기가 죽어서 말을 더듬었다.
“두 시 지나서였을까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소?”
게이조의 말에 나쓰에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을 따라서 축제 구경이라도 간 게 아니오?”
나쓰에는 문득 짚이는 데가 있어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무라이가 루리코를 데리고 축제에 갔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루리코는 “선생님 싫어!”하고 말했지만, 어린아이라 그다지 깊은 이유가 있었을 리 없다. 루리코가 원래 붙임성이 있는 아이니까 아무와도 금방 친해졌다. 무라이가 오라고 손을 내밀면 기꺼이 따라갔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라이는 무엇 때문에 한 마디 말도 없이 그 애를 데리고 갔을까?
“무라이 씨는 너무해요.”
하고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는 나쓰에에게,
“무라이? 무리아가 어쨌다는 거요?”
하고 게이조가 물었다.
“실은 오늘 무라이 씨가 찾아와서……”
“무라이가 찾아왔었소? 왜 내게 한 마디도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소? 무엇 때문이었지?”
“무엇 때문이라니요…….?”
나쓰에는 탐색하는 듯한 게이조의 눈을 바라보자 반발심이 일어나 이렇게 되받았다.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무라이 씨 일 같은 건.”
“그래?”
게이조의 말이 끊어졌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나쓰에의 거짓말에 분노와 질투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나 게이조는 반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억제했다. 이것은 그의 성격이었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좋소. 그는 몇 시쯤에 돌아갔소?”
“당신이 돌아오시기 15분이나 20분쯤 전이에요. 틀림없이 루리코는 무라이 씨가 데리고 갔을 거예요.”
나쓰에는 무라이를 따라 축제에 갔을 루리코를 머리 속에 그려보면서 적이 마음을 놓았다. 무라이는 게이조가 내일 돌아올 예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나가 버리기는 했으나 밖에서 놀고 있는 루리코를 보자 축제에 데리고 갔다가 저녁때 다시 데려올 심산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아, 이젠 루리코와 아주 친해졌어요.”
하고 나쓰에를 놀라게 할 심산인지도 모른다. 나쓰에는 게이조를 따라 숲속을 나오면서 그래도 한 마디쯤은 건네고 나서 데리고 갔으면 이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정말 무라이가 데리고 갔을까?”
숲을 나오자 게이조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나쓰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됐어요?”
숲의 입구에서 게이조와 나쓰에를 향해 요시코의 엄마가 소나무 숲의 오솔길을 걸어나오면서 말했다.
“걱정을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해요. 아마 집에 왔던 손님이 축제에 데리고 간 것 같아요.”
“그래요? 그렇다면 걱정하실 것 없겠군요. 이렇게 찾아도 없는 걸 보면 아마 그런 모양이에요. 전 혹시나 유괴를 당한 게 아닌가 해서 무척 걱정했어요.”
“유괴라고요?”
게이조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듯이 약간 웃어 보였다. 그러자,
“왜, 거 있지 않았어요. 몇 명이나 유괴된 사건 말이에요.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흉측한 일만…..하지만 참 다행이에요, 루리코는.”
라고 말하며 요시코의 엄마가 가버리자 나쓰에는 왠지 또다시 불안에 사로잡혔다.
집에 돌아오니 식사를 마친 도오루가 피곤했던지 식탁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무라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집에 없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대요.”
혹시 집 근처까지 루리코를 업고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쓰에는 조바심이 나서 밖으로 나가 보았다. 여름의 낮은 길었다. 일곱 시가 지났지만 아직도 밖은 환했다. 키가 큰 옥수수 잎사귀가 바람에 나부껴 와삭와삭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무라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게이조가 초조한 표정으로 식탁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식사하시겠어요?”
“아니오, 생각 없소. 그보다는 경찰서에 전화부터 해야겠소.”
게이조는 나쓰에를 추궁하고 싶은 생각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화기를 들려고 하는 순간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틀럼없이 무라이 씨가 건 전화일 거예요.”
나쓰에의 말에 게이조는 잠시 아내를 돌아보고 나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쓰에 씨!”
무라이의 목소리였다.
‘나쓰에 씨라니! 뭐야, 언제부터 사모님이 나쓰에 씨로 변했지?’
게이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하셨었다고요? 화나지 않았어요? 오늘은 정말 제가 실례를 한 것 같아서…..”
무라이는 나쓰에가 수화기를 귀에 대고 말없이 듣고 있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상대방을 나쓰에로 믿어 의심치 않는 목소리였다.
“………………..”
“나쓰에 씨, 여보세요, 잘 들리세요? 역시 화가 나셨군요?”
게이조는 뒤에 와서 서 있는 나쓰에에게 잠자코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역시 화가 나 계시는군요.”
말없이 게이조가 듣고만 있던 전화의 내용이 ㅁㅜ엇이었는지를 알고 나쓰에는 숨을 죽였다.
“여보세요, 아까는 실례가 많았어요. 저……..무라이 선생님은 혹시 루리코가 어디있는지 모르세요?”
나쓰에는 애써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게이조를 의식하자 목소리가 더욱 딱딱해졌다.
“네? 루리코가 어떻게 되었나요?”
나쓰에의 얼굴색이 싹 변했다.
무라이는 루리코를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이다.
“루리코가 보이지 않아요.”
“언제부턴데요, 그게?”
무라이와 단둘이 있던 그 시간 이후 루리코는 응접실을 나간 채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저………”
나쓰에는 더듬거리다 게이조를 바라보고 나서 말했다.
“모르신다면 할 수 없군요. 실례했어요.”
무라이가 계속 뭐라고 말했으나 나쓰에는 잠자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라이도 모른다는 거요?”
게이조는 당황했다. 무라이도 모른다면 루리코는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게이조는 멍하니 서 있는 나쓰에를 밀치듯이 하고 수화기를 들어 경찰을 불렀다.
아이가 없어졌다는 말을 하자, 경찰은 그까짓 미아 건이냐며 태평스러운 어조로 응답했다.
“올해 축제에는 길을 잃은 아이가 작년의 갑절이나 돼요. 오늘은 정말 손들었어요.”
“아니, 우리 아이는 길을 잃은 게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게이조는 화가 나서 사정을 대충 설명했다.
“혼자서 시내 쪽으로 나간 게 아닐까요?”
“글쎄요, 평소에도 집 근처에서 멀리 간 적이 없었는데요.”
“보통 때와는 달리 오늘은 축제일이잖아요. 이웃집 아이를 따라 아장아장 쫓아갈 수도 있어요.”
축제 때문에 정신이 없는지 지칠 대로 지친 목소리였다.
“혹시 유괴라도 당한 게 아닌가 해서요.”
자신의 입에서 나온 유괴라는 말이 흉기가 되어 게이조를 위협했다.
“유괴라고요?”
경관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물었다.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것을 본 사람이라도 있나요?”
“아니, 그런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럼 전화로 무슨 협박이라도 받았나요?”
“아뇨.”
“그렇다면 아마도 길을 잃어버렸을 겁니다.”
일단 담당자에게 연락해 두겠다고 하면서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다.
“유괴라면 반드시 본 사람이 있을 거예요. 내낮이었으니까요.”
나쓰에도 힘없이 부정했다.
“하지만 숲을 빠져나가 제방을 따라 걸어가면 어떤 집 앞도 거치지 않고 시내로 나갈 수 있잖소?”
게이조는 암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게이조와 나쓰에는 더욱 불안에 휩싸일 뿐이었다. 경찰만을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이조는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당직 의사는 깜짝 놀라면서
“곧 사람을 보내 돕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게이조와 나쓰에도, 그리고 부엌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쓰기코도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깜짝 놀라 어깨를 떨며 벌떡 일어나는 나쓰에를 게이조는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게이조는 나쓰에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자신이 출장을 가 집을 비운 동안 나쓰에가 무라이를 만난 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게이조 자신뿐만 아니라 쓰기코와 도오루, 그리고 루리코도 집에 없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남자를 집에 끌어들여…..’라는 음탕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그 사이에 어린 루리코가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게이조는 입을 열기만 하면 고함을 쳐버릴 것만 같은 자신을 의식하고 간신히 침묵을 지켰다. 그는 고함 치는 것을 가장 부끄럽고 경멸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 후 병원에서 중년의 인부 두 사람과 젊은 외과의사 마쓰다, 그리고 무라이가 았다. 벌써 밖은 캄캄했다.
“이거…….미안합니다.”
게이조는 고개를 숙였으나 무라이를 사나운 시선으로 쏘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쓰에와 쓰기코를 집에 남겨 두고 일행은 회중 전등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속의 나무들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꿈틀거리기라도 할 듯이 무시무시해 보였다. 회중 전등을 어둠 속에 들이대면 그곳에 누군가가 우뚝서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간에 루리코가 숲속에 있을 리가 없어.’
게이조는 이렇게 생각하자 숲속을 찾아본다는 것이 헛수고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라이가 루리코의 행방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게이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윽고 강변에 이르렀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고 하늘에는 별들이 드넓게 퍼져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강물에 빠진 것이 아닐까?’
평소에는 숲속에 잘 들어가지 않는 루리코가 이 강변까지 혼자 왔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이조는 발길을 돌려 다시 숲속으로 돌아갔다. 전등을 비추자 키가 큰 사나이가 불쑥 나타났다. 게이조는 얼결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무라이였다. 무라이의 창백한 얼굴이 몹시 언짢은 듯 보여싿.
“깜짝 놀랐습니다.”
무라이도 놀란 모양이었다.
“미안하오.”
게이조는 자신의 놀라움을 감추고 태연스럽게 말하고 나서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오늘 집에 왔었다고요? 무슨 볼일이 있었죠?”
무라이는 말없이 회중 전등으로 자신의 발치를 비추고 있었다.
시험림 일대와 시내에 이르는 길가를 밤새껏 수색하느라 저마다 지칠대로 지쳐 한잠 자기 위해 쓰지구치 집으로 돌아온 때는 벌써 새벽 세 시가 지나 있었으며 여름밤은 이미 희끄무레하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나쓰에는 줄곧 어제 일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탓했다.
‘그때 내가 루리코를 무릎 위에 안아 올렸더라면 좋았을걸.’
조그마한 팔을 벌리며 엄마를 감싸듯이 달려오던 루리코의 애처로운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지끔쯤 루리코는 이 이불 속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그마한 빨간 꽃무늬가 새겨진 이불과 예쁜 베개가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며 쓸쓸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엄마도 싫어!”
하고 말하던 루리코의 쓸쓸한 모습을 생각하니 나쓰에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캄캄한 밤중에 어린 루리코가 어디서 어떻게 보냈을까 하고 생각하며 눈물이 넘쳐흐르는 눈으로 밝아 오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무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ㄷ. 그 소리를 듣자 나쓰에는 신혼 시절의 예감이 떠올랐다.
이 집에서 보낸 첫날밤. 그것은 6년 전의 일이었다. 게이조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이 집에는 게이조의 아버지와 여동생, 그리고 가정부만이 살고 있었다. 게이조는 대학의 연구실에 있었으므로 신접살림은 삿포로에서 차렸다. 소윤쿄로 신혼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집에 들렸었다.
그 날 밤은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숲속의 나무들은 마치 입이라도 가진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밤이 깊어 감에 따라 바람은 더욱 거세어져 갔다. 숲은 땅 속에서부터 뭔가 세차게 끓어오르는 듯한 사나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 나쓰에는 이 폭풍이 자신의 결혼 생활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얼결에 게이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었다.
지금 그때의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고 있는 것 같았다. 피아노 줄이 끊긴 것도 불길한 징조가 아니었나 싶어 그녀는 너무도 무서웠다.
나쓰엔느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쳐 왔지만 지금껏 한번도 줄이 끊어진 적은 없었다.
만일 루리코가 응접실에 들어왔던 그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미모나 재산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 던져도 좋다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그것은 겨우 열 시간 전의 일이었다. 이제 다시 한 번 루리코가,
“엄마, 왜 그래?”
하고 말하며 응접실에 들어왔던 그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가슴에 꼭 껴안고 절대로 루리코를 떼어놓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도 충분히 껴안아 줄 수 있었다. 그때도.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어째서,
“밖에 나가 놀다 와.”
하고 쌀쌀하게 말했을까. 그때는 루리코와 같이 있는 것보다 무라이와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란 여자야 하고 생각하며 나쓰에는 자기 자신을 경멸했다.
나쓰에는 천벌을 받는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다. 남편 이외의 남자에게 마음을 기울이자마자 재빨리 벌이 내린 것이다. 이것이 천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때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까?’
어떤 책에선가 “지나간 시간만은 신도 되돌릴 수 없다”고 씌어 있던 것을 나쓰에는 생각해 내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무라이에게로 눈길을 돌리자 멍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얼굴이 이상하게 음탕하고 칠칠치 못한 느낌이 들었다.
‘루리코를 밖으로 내보낸 것이 기껏 저 남자와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인가.’
나쓰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뼈아프게 후회했다.
게이조와 나쓰에, 그리고 무라이 세 사람은 한잠도 자지 못했다. 시계가 다섯 시를 쳤다. 이미 해는 떠올라 있었다. 쓰기코가 일어나 부엌에서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 현관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이조와 나쓰에, 무라이는 벌떡 일어났다. 게이조가 제일 먼저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문을 여니 장화를 신은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근처에 사는 특정 우체국장이었다.
“댁의 루리코가 죽어 있어요.”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가 딱딱 마주칠 만큼 몸을 떨었다.
“죽었다고요? 어디서요?”
“강변에서요. 방금 낚시질을 하러 갔다가……”
게이조는 간밤에 마루 한켠에 놓아 둔 왕진 가방을 들고 집을 뛰쳐나갔다. 나쓰에는 게이조보다 앞질러 달려갔다. 무라이는 잠들어 잇는 마쓰다와 두 명의 인부를 흔들어 깨웠다.
게이조는 숲속을 정신없이 달려갔다. 강변까지 몇백 미터밖에 되지 않는 길이 왜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 지 알 수 없었다.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다행이야. 죽지는 않아어. 그냥 기절했을 뿐이야.”
하고 루리코를 안고 돌아오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뛰어갔다. 죽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만일 믿는다면 지금 간신히 붙어 있을지도 모를 루리코의 목숨의 불기운이 정말로 꺼져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어디서 나쓰에를 앞질렀는지도 알지 못했다. 숲을 빠져나가 강가의 좁은 길을 줄달음질쳤다. 얕은 시내를 날 듯이 건너고 강변의 반들거리는 조약돌에 걸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강변 저쪽에 희끄무레한 것이 나부끼고 있었다.
‘저기야.’
게이조는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헝겊을 향해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리면서 마냥 달려갔다. 꿈속에서 무언엔가 쫓길 때처럼 안타까울 정도로 발길이 꾸물거렸다.
가까이 가 보니 하얗게 반짝이던 헝겊은 루리코의 앞치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