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원이라고 알고 있던 창덕궁을 처음으로 들어갈수 있던 때는 제작년의 가을이다.
2006년도 이맘때쯤 창덕궁을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하며 규장각이 있던 부영지 뿐만아니라
창덕궁의 가장 깊숙하고 아름다운 옥류천이 있는 곳까지 열어주며 가을의 아름다운 풍광을 볼수 있는 기회일것이라는 신문의 홍보를 보고 찾아갔다.
그렇게 돌아볼 수 있었던 창덕궁을 2년만에 다시 찾아 그때의 감격을 누릴수 있는 기회를 갖기위해 스케쥴을 잡아본다.
몇가지의 일정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목요일은 자유관람이고 특별관람으로 옥류천과 낙선재 코스가 있으며 일반 관람으로 매시간대 15분 45분이 진행된다.
지난번에는 처음이라서인지 모두 공개하고 자유롭게 관람할수 있었으며 홍보가 많이 되지 않아서인지 관람객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여유있는 관람을 할 수 있었다.
2시의 특별관람으로 옥류천 코스를 택하기로 하였으나 사전 예약이 있는것을 모르고 일반관람으로 아쉽게 돌아보게 되었다.
창덕궁은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궁궐 건축사에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배치가 탁월한 궁이라 한다.
조선의 궁궐중에 창덕궁, 창경궁, 경복궁, 경운궁,경희궁을 5대 궁궐이라 한다.
그중 경운궁은 고종황제가 아관파천 이후 순종에게 양위하고 덕수라는 궁호를 받고 경운궁에 칩거하면서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조선3대 태종이 세운 조선의 정궁중에 임진왜란때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졌지만 창덕궁은 광해군때 재건되어 이후 순종때 까지 가장 오래된 정궁으로 실질적인 조선의 으뜸 궁궐로 사용된 창덕궁은 그동안 일부만 개방이 되다가 2006년도에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전체가 개방되어 그 아름다운 실체가 들어나게 되었다.
창덕궁의 첫 관문인 돈화문은 종로 3가 사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거리에는 전주이씨종약원 건물과 윤숙자님이 운영하는 한국전통음식연구원과 떡박물관이 있으며 단성사와 피카디리 영화관이 있는 길이다.
동쪽으로는 창덕궁의 별궁인 창경궁과 맞닿아 있으며 창덕궁과 같은 시기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편입된 종묘에서 넘어오는 구름다리가 걸쳐져있기도 하다.
돈화문을 들어서니 홍단풍 청단풍의 형형색색의 단풍이 곱게 물들어 색감의 아름다움을 보이고있다. 오래된 향나무가 입구에 누워 오는이를 맞이한다.
서울에 남아있는 옛날 다리중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금천교를 지나 인정전으로 들어간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으뜸되는 건물로 왕의 즉위식, 세자책봉등 국가의 대소사를 맞이하는 곳이기도 하다.
밑으로는 품계석이 놓여있어 국가의 대소사에 정1품부터 품계별로 양쪽으로 도열하여 행사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조선의 건물은 지을때부터 용도와 권위가 있어서 그 순서는 대략 "전당합각제헌루정" 이란 순서이다.
전은 건물중에 가장 격이 높아서 임금이나 왕비가 사용하는 공간을 전이라 한다. 일상적인 활동공간이기보다 공식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당은 전에 비해서 규모는 떨어지지 않으나 격은 한단계 낮은 건물이다. 일상적인 활동공간으로 쓰인다.
합이나 각은 전이나 당의 부속 건물일수 있으며 전이나 당을 보위하는 건물이다.
재화 헌은 왕실 가족이나 궁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쓰는 활동공간이다.
재는 숙식등 기거용으로 , 독서등 사색의 공간이며
헌은 일상적 주거 공간보다 공무적기능이 강한 경우가 많다.
누는 바닥이 지면에서 한길정도 의 마루로 되어있는경우가 많으며
정은 흔히 정자라 부르는 휴식공간을 말한다.
창덕궁안에는 이런 규모의 건물이 즐비하다.
인정전을 지나니 우측에 순종황제의 어차가 놓여있던 건물에 차는 없고 덩그러니 빈 건물이다.
그러고 보니 경복궁옆 고궁 박물관 지하에 캐딜락 자동차 두대가 대각으로 전시되어 있는것이 생각난다.
곳곳에 잔듸밭이 있는것으로 보아 궁궐의 건물이 많이 없어졌나 보다.
궁궐에는 기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에 지금보이는 궁궐에서 잔디밭은
건물의 묘터라고 보면 될 것이다.
옆길을 따라 걷노라니 우측의 언덕배기에 문이 서있다.
종묘에서 창경궁으로 넘어오는 다리를 지나면 보이는 문이다. 그 길따라 내려가면 창경궁이다.
낙선재에 이르니 입구에 잘 보존되어 새로 단청한 건물들보다 훨씬 오래된듯한 모습에 단아하고
위엄은 있지 않으나 주거 공간으로서 활동 공간으로서 품위와 품격을 갖춘 모습에 정숙함을 느낀다. 이 곳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아니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왕의 부인인 이방자여사가 살던 곳이다.
오래도록 즐겁게 살라하는 의미의 장락문을 통해서 바라보이는 낙선재 지붕 넘어 보이는 팔각정의 머리모양은 사각의 장락문과 낙선재의 누각 그리고 지붕위의 팔각모양은 무어라 말 할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게한다.
일본에 볼모가 되어 일본의 여성과 결혼한 비운의 황태자 그리고 황태자 비!!!
그리고 이국의 땅에서 남편을 보내고 20년이상 살아온 일본인, 그러나 우리의 마지막 황태자비!!
그래서인지 건물의 형태와 자세는 우리의 모습이지만 정원의 잘 가꾸어진 소나무의 생김새며 관리 상태는 분명 일본 정원의 모습과 흡사한 느낌을 받는다.
남향으로 정리된 마루에 앉아 이방자 여사가 이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당시를 생각해본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이왕가, 이씨조선, 이왕실 이라 부르며 순종을 이왕, 고종을 이태왕이라 불렀다.
이때의 왕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아니라 일본에서 처럼 천왕밑에 한 귀족 가문과 같은 폄하된 의도이다.
낙선재를 벗어나 창경궁의 담벼락을 사이로 단풍색이 이쁘다.
카메라를 연실 눌러 댄다.
언덕길은 흙길이면 족한데 굳이 세면으로 포장을 한것으로 보아 군사문화의 잔재가 보이는듯하다. 언덕을 지나니 부용지 연못이 나타나며 부영정에서 바라본 건너편의 2층에 자리한 규장각이 양지바른 남향으로 차분히 앉아있다.
조선의 22대왕 정조대왕은 즉위식에 나의 아버지는 사도세자라 하며 젊은 할머니 정순왕후 세력과 각을 세우고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규장각을 세우고 인재를 길러내며 화성을 쌓아 세력을 키운다. 본래 규장각은 왕의 글이나 왕실의 족보 물품을 보관하던 작은 서고에 지나지 않던 규장각을 국내외도서를 다수 소장한 왕립도서관으로 젊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 연구소로 다시 그인재들이 성장함에따라 왕의 비서실, 정책실, 감사실, 출판소등과같이 그기능을 확대해 나갔다.
탕평책을 추진하던 중추기구로 삼아 세종때의 집현전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양대 교육기관이라 할수 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지만 정조,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5대문종,등이 뜻하지 않은 변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여기 이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부용지 옆의 매점에는 우리의 공예품을 취급한다.
기껏해야 궁궐이라 약간 차이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전국 어디서나 볼수 있는 정도의 공예품이다. 해마다 미술대학에서 졸업하는 전공자들은 많은 데 이곳에 종사하는 공예인들은 왜 없는지...
국가에서 공예작품을 공모하기도 하고 공예인들을 구체적으로 대우해야 할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전통문화를 전승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일본인들이 많이와서 우리의 문화를 본다 아니 오히려 자기네 나라 옛 선조들의 모습을 보는것이라 보면 훨씬 타당하지 않을까?
우리의 70년대처럼 호크 달닌 검정 교복을 입고 단체로 수학여행온 학생들이며,
작은 가방에 명찰을 가슴에 달고 단체로온 노인들에게 우리의 관광 산업에 대한 바닥을 보이는것 같아 창피하기도 하다.
일본의 관광 산업은 아마 임진 왜란이후 굳게 닫은 우리의 조선 중기보다 도요도미히데요시의 패전후 시모노세끼항의 열린 발상에서의 문화적 의식은 현재 까지 일본이 잘살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토양이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관광지 마다 독창적인 공예품이 즐비하고 같은 관광지라도 옆집과 물건이 다르고 다른 관광지에는 또다른 내용의 관광 상품이 진열되어 관광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호기심을 같게하여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모습을 보기에 우리의 현실과 늘 비교가 되어 부끄럽게 만든다.
작은 물병을 사서 물한모금 마신다.
우측으로 보이는 현대식 건물이 담장넘어로 보인다. 창경궁의 식물원이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식물원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자연에 조화를 이룬 후원의 아름다움을 일거에 깨뜨리는 몰지각한 건물의 모습을 보며 오른쪽으로 눈을 돌린 내가 바보스럽다.
직진하는 곳에는 들어가지 마시요라는 푯말과 문화재청 직원이 서있다. 그곳으로 옥류천 가는 길이기에 아마 예약된 관람객 아니며 들여보내지 않는 모양이다.
왼편으로는 큰 디긋자 모양의 돌문이 서 있다.
전서체로 불로문이라고 쓰여있다 . 늙지않는 문이란다.
커다란 바위를 잘쪼개어 큰 문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었을까, 한번 망치질 잘못하면 쪼개질 판이니 조심에 또 조심을 해서 시간 가는줄 모르게 만든 돌문이다.
돌문을 들어서니 반듯한 네모양의 연못이 나온다.
물이 꽤 많은 것으로 보아 못안에 우물이 서너개 정도는 있는것 같다.
제법 큰 잉어들이 돌아 다닌다.
왼편으로는 단청을 하지않아 소담스런 작은집 하나가 보인다.
화려한 후원과 단풍색과도 어울리지 않아 궁궐집이라기보다 민가의 조촐한 무슨 집인가하고 의아해 한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이름을 지어 기오헌이라 부른 독서하는 곳이라한다.
할아버지 정조를 기리며 규장각의 뒷편기슭에 규장각의 정신을 삼아 이곳에 독서하는곳으로 삼지 않았을까?
순조의 대리청정을 하다 3년만에 죽고 그의 아들 헌종으로부터 익종라는 묘호를 받으며 동구릉 초입 수릉에 계신다.
그 시기는 왕의 힘은 미약하고 세도 정치기였지 않았나.
정조의 기를 받아 왕권을 강화할려는 효명세자의 좌절된 꿈을 보는것 같다.
기오헌에서 정면은 연못이 하나있고 그 못엔 잘생긴 애련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그 오른쪽 위에는 금천교를 지나 연경당이라는 단청도 칠하지 않고 숲속 깊숙한 자락에 솟을 대문을 한 품위있는 건물이 있다.
대문의 편액을 보니 낙선재의 장낙원과 같은 이름이다.
즐겁게 오래도록 살자라는 신선이 되고픈 욕망을 가진자들이 살고 싶은 곳인가 보다.
대문은 굳게 닫혀있고 다음에 공개 되는 장소이라고 한다.
대문앞으로 약간의 공터에 낙엽이 겹겹이 쌓여있다.
카메라를 밑으로 하여 낙엽과 대문자락을 찍어 본다.
대문 사이로 안을 들여다 본다. 들어가서 안을 곡 보고싶은 곳이다.
언덕을 따라 정리되지 않은 돌계단을 오르니 건물이 보인다.
숙종임금께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 한다.
짐의나라, 왕의나라...
궁궐을 돌아보며 왕과 왕의 가족들을 위한 공간으로 너무많은 민중들의 피와땀이 서려있는곳이며
그 가치를 너무 싶게 보는것은 아닌지 새삼 시대적인 운을 느껴본다.
[펌글]
돈화문을 들어서 금천교위의 돌짐승,등에 흰색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지웠으면 좋겠다. 금천교는 태종때 세워 아직까지 남아있으니 아마도 조선 건축물중에서 가장 오래되지 않았나 싶다.
창덕궁에는 인정전, 창경궁에는 명정전, 경복궁에는 근정전, 경운궁에는 중화전, 경희궁에는 숭정전이라는 법전이이있다.
이방자 영왕의 부인이 살던 낙선재 후원의 모습이다.
낙선재 정문의 장낙원 현판앞에서 천천히 들어서며 본 모습이다.
낙선재에서 영왕의 부인은 무슨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규장각이 있던 주합루와 부용정 그리고 영화당이있는 연못이다.
중앙에 둥그런 섬을 만들어 소나무를 심어 풍경을 한껏 운치있게 만들었다.
규장각이 있던 주합루다.
양쪽의 작은 문으로 신하는 들어갈 수 있으며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면서 몸과 마음을 항상 겸손하라라는 의미인것 같다.
효명세자가 독서를 하는 기오헌이다.
홍단풍의 색감이 너무 이쁘다.
연경당의 모습이다.
카메라를 낮게 놓고 낙엽과 함께찍은 솟을 대문.
오른쪽 담장넘어 어지럽게 지어진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빌라들의 모습에서
금호문으로 나가야하는 관람객들에게 마지막으로 단풍의 때깔을 보여주기위한 은행나무의 몸짓을 보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