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만에 수다원과를 성취한 디파마(붓다의 딸, 세상을 비추다)
디파마의 본명은 나니 발라 바루와이다.
그녀는 1911, 03, 25에 미얀마 국경에서 멀지 않은 인도 동북부(현재는 방글라데쉬 칫타공)에서 태어났다.
인도에서 불교가 단절되었다고 역사에서 말하지만 사실 인도 동북부는 불교가 단절된 적이 없었다.
그녀가 태어난 마을은 전통적인 불교문화를 간직한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웃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자비와 보시가 일상화된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어린 나니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지만 절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탑에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먹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식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녀는 지능과 지혜는 천재보다 뛰어났지만, 당시 인도 풍습에 따라 공부를 그만두고 12살에 결혼해야만 했다.
그녀의 남편은 이웃마을 청년이었다.
결혼 일주일 후 남편은 직업 때문에 미얀마로 넘어갔다.
그녀도 2년 후 미얀마로 넘어갔지만 낮선 환경과 언어소통이 안 되어 극심한 외로움을 겪었다.
나니는 18살에 어머니를 잃고, 그 슬픔이 몇 년간 이어졌다.
그녀와 남편은 오계를 잘 지키고 스님들에게 공양올리기를 즐겨했다.
나니는 남편에게 명상공부를 시작하겠다고 했지만 남편은 나이들어서 해도 된다고 거절했다.
1941년 일본이 미얀마를 침략했을 때 나니 가족은 무섭고 힘든 시기를 보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그녀는 이제 명상을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20년 동안이나 오지 않던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그 아이는 몇 개월 후에 죽게되고, 그로부터 4년 후인 나이 39살에 딸 디파를 낳았다.
디파는 빛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녀는 디파마(빛의 어머니)가 되었다.
다음해에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 나니는 남편에게 제발 명상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도 남편은 거절했다.
나니는 그럼 집을 나가겠다고 남편을 협박했다.
남편과 이웃 사람들은 나니가 집을 나갈까봐 감시했다.
그녀는 고혈압으로 쓰러져 침상을 떠나지 못했고 절망감에 죽기만 바랄뿐이었다.
1957년 어느 날 피곤에 지친 남편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10년 사이에 남편과 두 아이를 잃고, 7살 여아를 가진 미망인이 되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인도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고,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죽은 남편의 사진을 끌어안고 우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후 몇 년 동안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이제 나니는 명상수행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는 것을 느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음상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그때 꿈에 부처님이 나타났다.
빛나는 모습으로 나타난 부처님은 법구경에 나오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재가신도 이야기에 나오는 게송을 들려주었다.
애욕이 슬픔을 낳고
애욕이 집착을 낳는다.
애욕에서 벗어나면 슬픔이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게송 212)
잠에서 깬 나니는 마음이 깨끗해지고 편안해졌다.
그녀는 현재 상황과 관계없이 명상을 공부해야 하며 모든 슬픔과 집착에서 벗어난 평화의 길은 명상수행 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나니는 평생 불교신자로 살았지만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는 실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부처님의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임을 알았다.
나니는 재산과 집을 이웃에게 맡기고 딸 디파를 부탁하고 양곤에 았는 까마윳 사원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사원에 입방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어느 날 행선하는 중에 꼼짝할 수 없고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몇 분간 가만히 있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커다란 개가 다리를 물고 있었다.
나니는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나니는 병원치료를 다녔고 건강이 악화되어 사원에서도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했다.
집에 오니 갑자기 떠난 엄마가 돌아오자 어린 딸은 엄마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나니는 집에서 몇 년간 꾸준히 위빠사나 수행을 했다.
언젠가 다시 집을 떠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기회가 왔다.
나니는 스승 아나가리까 무닌드라를 알게 되었고, 무닌드라는 그녀에게 타타나 예이따 사원을 추천했다.
그곳에는 유명한 스님이자 학자인 마하시 사야도께서 지도하는 곳이었다.
다행히 나니의 여동생 헤마가 미얀마로 와서 딸 디파를 돌보게 되었다.
그녀는 첫번째처럼 급하고 충동적인 마음이 아닌 좀더 신중한 마음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했다.
수행 셋째날부터 더 깊은 몰입에 들어갔고 식욕과 수면욕도 사라졌다.
나니는 무닌드라의 요청으로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에 참여했는데, 설법이 끝난 후 몸이 뻣뻣해지면서 의식의 심연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부터 나니의 수행은 극적으로 빠르게 전진했다.
도과의 성취 직전인 통찰지가 현전하는 단계에 올라섰다.
나니는 눈부시게 빛나는 빛을 경험했고 주변이 모두 헤체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몸, 명상홀의 바닥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한 낮의 순간이 고요하고 섬세한 순간으로 바뀌었고 즉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니는 후에 그 빛나는 순간에 대해 '나는 알지 못했다'라고 했지만, 그후로 나니의 삶은 심오해졌고 수다원과, 즉 성인의 흐름에 든 이가 되었다.
고요와 평온을 찾아 30년간 헤매던 여인이 53살이 되어 단 6일만의 수행으로 수다원과에 도달한 것이다.
몸도 건강해졌고 그녀를 괴롭혔던 슬픔과 두려움도 사라졌다.
전에 없던 편안함과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명확한 판단력이 생겼다.
디파마는 사원에서 두 달 더 수행한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몇 주 후 또 다시 사원에 갔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굉장한 경험을 했다.
육체적 정신적 상태가 다시 변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의 변한 모습에 놀라워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여인이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바꼈기 때문이다.
디파마는 말했다.
"나는 이제 아프지 않고 마음속에 아무것도 맺힌 게 없습니다. 슬픔도 괴로움도 없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여러분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술이 아닙니다. 그저 수행법을 따라하기만 하면 됩니다."
디파마의 변한 모습에 그녀의 친구들과 가족이 수행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디파마의 여동생 헤마와 그녀의 남편, 딸 디파도 수행에 동참했다.
말을 삼가고 조용히 식사하며 계율을 지켰다.
다파마는 늘 말했다.
"위빠사나 수행만이 마음에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여동생과 그녀의 남편과 아들, 딸 디파가 수행에 정통해지고 선정을 성취하거나 도과를 얻었다.
나중에 그녀는 인도 꼴까따로 이주해 작은 아파트에 살았다.
디파마는 그 작은 아파트에 불상을 모시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했다.
그때 미국의 1세대 위빠사나 명상지도자들(Jack Kornfield, Sharon Salzberg, and Joseph Goldstein)이 그녀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배웠다.
또한 그녀는 미국에 초정되어 많은 이들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치기도 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부모의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찍 결혼해서 가난하게 살다가 두 자식과 남편을 잃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 건강까지 잃었던 한 여인이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한 지 6일만에 수다원과를 성취하게 한 원인이 무엇일까?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원래 총명하고 지혜로워서일까?
전생바라밀이 있어서일까?
스승을 잘 만나서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나는 '절박감'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첫댓글 사두를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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