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요한복음 20:1~18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을 막달라 마리아의 경험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막달라 마리아의 체험을 통하여 주님의 부활의 그 날에 있었던 일들을 함께 보고 듣고 경험하는 복된 시간을 함께 갖도록 합시다.
첫째로,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에 달려간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함께 살펴본 대로 예수님이 묻힌 무덤에 막달라 마리아뿐 아니라 다른 마리아와 이모 살로메가 함께 갔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만을 주목하여 첫 부활절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인데 예수님의 무덤의 돌이 굴려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은 없어졌으니, 무덤 안에 나타난 천사들이 그녀에게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니 가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갑적스런 일을 겪을 때에 마리아는 너무 놀라고 두려워서 이것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두려움 속에서 가슴이 뛰었기에 한걸음에 시몬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달려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없어졌고 그 안에 어떤 이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전하라고 말하더라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말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둔 것 같은데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울먹이며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자 사도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만이 즉각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4절에 보니 둘이 같이 달음질을 하였으나 그 다른 제자 곧 사도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사도 요한은 젊으니까 더 빨리 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덤에 도착했을 때에는 밖에서 허리를 구부려 열려진 무덤 너머에 예수님의 수의였던 세마포는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뒤늦게 도착하였지만 오자마자 그대로 무덤으로 달려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있었던 무덤 속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을 그 자리에는 세마포 옷만 그대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좀 떨어진 곳에 쌌던 그대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들어가서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있을 때에 사도 요한도 뒤늦게 무덤에 들어가서 함께 보았습니다.
그들이 보니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한다면 시체만 가져가고 시체를 싼 세마포를 놓고 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 그 당시에 세마포가 비싸기 때문에 도둑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면 세마포만 두고 시신만 가져갈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도둑들이 굳이 세마포 수의를 벗겨놓고 예수님의 시신만 가져 가려고 했다 한다면, 그 시신 사이에 넣어놓았던 향품과 몰약들이 세마포에 달려붙어 있기 때문에 그 세마포를 벗겨내는 과정에서 세마포가 더러워지고 무덤 안은 몹시 어지러지고 더러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세마포는 차분하게 예수님의 몸을 감싼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또한 머리를 감싼 수건도 시신에게서 벗겨내려고 한다면 그 수건도 흐터러진 모양으로 바닥에 널려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7절에 기록된 대로 그 수건 역시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대로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단어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는 단어는 ‘엔튜리쏘’라는 단어는 ‘감싸다, 돌돌 말어 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머리 수건이 잘 정리되어 보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무덤에 남아 있는 세마포와 수건은 정리되어 있었고 무덤 안에서 예수님의 시신만이 차분하게 사라진 모습으로 정리된 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간 것도 절대 아니고, 예수님의 몸은 그를 싸고 있던 모든 수의와 수건을 놓고 홀연히 쏙 빠져나가신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그 현장을 확인한 사도 요한은 들어가 보고 믿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믿더라’는 뜻은 천사로부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을 들었노라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사도가 이제 확인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라고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기록을 보면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그 날 아침에 취한 행동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달리다가 사도 요한은 먼저 달려 무덤에 도착했지만 신중한 성격의 요한은 무덤 앞에서 머뭇거립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느리지만 무덤에 도착하자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곧장 무덤에 들어가서 살핍니다. 그제서야 요한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고 하는 이러한 자세한 기록들은 그 현장을 직접 보고 경험한 자들의 그 날 아침의 모습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 기록 의도는 그의 기록한 내용이 완전히 진실한 증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세마포와 수건이 남겨진 모습에 대한 기록도 사실 그대로의 진실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 증언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빈 무덤에 놓여진 세마포와 한쪽에 차분하게 개켜 놓여 있는 수건은 예수님의 몸을 누군가 훔쳐간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그의 몸이 순식간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수의와 수건을 그대로 둔 채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무덤에서 나오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요나 선지자가 고래 뱃속에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오듯이 살아나신 것입니다. 구약의 다윗이 시편 16:10 말씀에 노래하듯이,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라는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여러 차례 예고하신 바 자기가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말씀이 이처럼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가 보았고 두 사도가 가서 보았던 바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과 그 안에 시신은 없고 시신을 감싼 세마포와 수건이 가지런히 그대로 놓여 있다는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한 진실임을 우리도 믿고 이 부활 신앙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빈 무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곧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는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그 무덤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체포될 위험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도망쳐서 대제사장에게 보고하고 그들이 더 많은 병사들을 보내어 무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사도들이 현장에 있는 것이 발견되면 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해갔다는 누명을 씌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속히 그 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집에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자기 어머니 살로메에게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속히 전하려고 달려갔을 것입니다. 가서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는데 이상한 일은 세마포와 머리를 싼 수건이 그대로 있고 누군가가 도둑질해간 아무런 흔적이 없으니 예수님이 혹시 부활한 것 아니냐 하고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 베드로나 요한과 달리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무덤을 떠나기에는 마리아는 너무 슬프고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녀는 무덤 바깥에서 계속하여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11절에 나오는 ‘울다’는 이 원문 단어 ‘클라오’는 대성통곡을 한다는 말입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그 동생들이 무덤에서 ‘곡한다’고 했을 때 이 단어가 쓰여졌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새벽 닭이 울었을 때에 자기 죄를 깨달은 베드로가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고 했을 때의 그 단어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통곡하듯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일도 너무나 억울하고 슬프고 가슴 아픈데, 이제 예수님의 시신마저 누군가에게 빼앗겨 없어졌다는 일은 마리아로 하여금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되어 이렇게 홀로 무덤 곁에서 통곡하며 떠날 수 없게 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토록 무덤 곁을 떠나지 못하고 한없이 통곡하며 울게 했을까요? 이는 그녀의 깊은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컸기에 주님을 잃어버린 지금 그녀는 주님의 시신만이라도 정성껏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그 시신마저 잃어버린 일 때문에 가슴이 미어져서 이처럼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과연 어떤 사연이 있었습니까? 누가복음 8:2,3에 보면 이렇게 그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려 온갖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하고 충만하다는 뜻이니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지방 출신인 이 마리아가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우리는 짐작이 됩니다. 그녀는 가족들의 애물단지였을 것이요 동네의 소년들의 놀림감이었을 것입니다. 밤낮으로 귀신이 이 소녀를 끌고 산으로 들로 헤매게 했을 것이요 씻지도 못하고 머리 단장 한번 못하고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먹지도 제대로 못한 채 비참한 소녀 시절, 청년 시절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귀신의 속삭임과 세상의 비난과 조롱과 무시 속에서 마음 속 깊이 한없이 설움과 아픔과 절망 속에 살았을 이 여인이 어느날 예수님께 인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불쌍한 처녀를 긍휼이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시고 그 귀신들을 꾸짖어 단숨에 내쫓아주셨습니다. 귀신들이 온갖 소리를 질러대면서 그녀에게서 차례로 떠나고 난 후에 지쳐 쓰러졌던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에는 자기 눈앞에 온화하신 얼굴로 바라보는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녀에게 더 이상 내면에서 속살거리며 괴롭히는 악령들을 다 사라졌고 괴로움과 슬픔과 절망도 멀리 달아났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만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녀의 심령 속에 파도처럼 넘쳐 흘렀습니다. 그녀는 다른 어떤 것도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예수님을 위하여 섬기는 일만이 그녀의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귀신이 쫓겨나간 후부터 그녀는 은혜받아 주님을 지성으로 섬기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여제자의 일원이 되어 주님을 가까이 섬기는 일에 온전히 헌신해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크면 그만큼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너무 넘친 사람은 그 만큼 더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 많고 크고 무거운 빚을 깨끗하게 다 청산받은 사람은 적은 빚을 청산받은 사람보다 빚을 탕감해준 분을 그만큼 더 많이 사랑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예수님께서 이렇듯 죽어 매장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비참하고 가장 수치스럽게 죽었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예수님께로부터 더 이상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소망도 더 불이 꺼졌습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 마음 속에 여전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과거에 받았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입니다. 예수님이 유다 왕국을 회복할 왕이 될 것이라는 믿음도, 소망도 다 부서졌지만 마리아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주님에 대한 의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기억하며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사랑이요 의리인 것입니다. 무덤을 떠나지 아니하며 통곡하면서 예수님의 시체라도 끝까지 되찾으려는 마리아의 마음은 주님을 향한 의리 있는 사랑입니다.
이런 의리 있는 사랑은 옛날 다윗 시대 압살롬의 난 때도 있었습니다. 유다 왕국의 왕 다윗이 그 노년에 그 아들 압살롬의 반란 때문에 예루살렘 성에서 피난길에 올라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예루살렘 성에서 떠나 정처없이 나그네 길을 갈 때였습니다. 앞길이 뻔한 너무나 비참한 피난길에 놀랍게도 다윗과의 의리를 지키는 진실한 친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늙은 친구 후새가 그 중에 하나였습니다. 또한 최근에 다윗의 군대에 들어온 이방 블레셋의 가드 성 출신 잇대라는 용병대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하나임 땅에도 길리앗 사람 바리실래와 몇몇 부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도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예로, 블레셋 용병 대장 잇대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잇대가 그의 부하 6백명과 더불어 왕 다윗의 앞에 호위하며 예루살렘 성을 따라 나설 때 다윗이 잇대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고 말했습니다. 이는 압살롬이 자칭 왕이 되어 자기를 치려고 군대를 소집한 마당에 이방인 잇대가 불리한 다윗 자신을 따라와서 나그네처럼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가만히 여기 머물러서 누가 왕이 되는지를 보고 그의 군대에 머물면 될 것이라고 충고해줍니다. 그리고 다윗은 잇대에게 은혜와 진리가 있기를 원한다고 축복해줍니다. 그러나 잇대는 다윗에게 이렇게 굳게 맹세하며 대답했습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사무엘하 15:21)
잇대는 자기가 이익보다 의리를 지키겠다고 다윗과 생사를 함께 할 것이라고 맹세한 것입니다. 훗날 잇대는 다윗 군대의 삼분의 일을 맡아서 압살롬 군대를 격파하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잇대는 자기가 떠돌이 생활할 때 자기를 기꺼이 받아준 다윗 왕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이번에는 다윗 왕이 곤경에 빠졌을 때에 그 의리를 지켜서 다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고백한 그대로 다윗의 승리를 위한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예표였던 다윗 시대에 다윗에게 의리를 지켰던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께 의리를 지키며 그를 끝까지 사랑하였던 막달라 마리아처럼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받은 크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 의리를 끝까지 지켜 충성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할렐루야.
셋째로, 부활의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무덤을 떠나지 못하며 울면서 허리를 구부려 무덤 안을 보고 있을 때에 무덤 안에 두 명의 천사가 나타나 그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어디 있는지 모르는 예수님의 시신을 어서 빨리 되찾아 정중하고 고귀하게 무덤에 안장하고자 하는 갈망만이 마음에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주님은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자 뒤돌아섰습니다. 그러나 너무 울어서 시야가 흐리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흔히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하였듯이 마리아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그 동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인 줄 알고 말하기를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의 시신만 찾는데 그녀의 모든 마음이 집중되어서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찾기까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듯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마리아야”
이 말을 듣자마자 마리아는 즉시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었습니다. 자기를 그 동안 종종 불러주셨던 사랑의 목자의 음성을 어찌 그의 양이 못 알아듣겠습니까? 요한복음 10:3,27 말씀에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니라”
고 하신 말씀대로, 마리아는 즉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예수님을 향하여 ‘랍오니여’, ‘선생님’하고 부르며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얼마나 마리아가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벅찼겠습니까?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자기 앞에 다시 나타나서 자기를 만나주셨으니, 이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녀는 이제는 결코 예수님을 다시는 잃지 아니하려는 듯이 예수님을 꼭 붙들고 결코 놓아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다시 잃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이제는 사랑하는 예수님을 결코 결코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그녀의 두 손으로 예수님을 꼭 붙들었을 것입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은 인자하게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여기서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신 뜻은 마리아에게 자신을 아예 만지지도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 하신 후에 제자 도마에게도 “내 손가락을 내 손에 넣고 내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그 날 아침에 다른 여인들이 그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을 때에도 내버려 두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를 붙들지 말라는 말은 아예 만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과 함께 있던 것과 같은 일상적인 교제를 나누는 그런 관계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이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머잖아 하나님께 올라가는 승천을 하고 그 후에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어 성령 안에서 그의 백성들과 교제하며 영원히 그들과 함께 있는 새로운 영적 교제 관계가 이루어질 것을 이렇게 마리아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처럼 울면서 예수님의 무덤을 끝까지 떠나지 아니하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만나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기로는 부활의 주님을 맨처음 만날 사람은 사도들이거나 그의 육신의 모친 마리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가장 비천하고 소박하고 연약한 한 여인, 오랫동안 일곱 귀신에게 시달리며 비참한 소녀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던 이 가련한 여인에게 부활하신 후 자기를 처음으로 나타내주시는 은혜와 특권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는 이전에 예수님께서 초기 사역하실 때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최초로 직접 계시해주신 사람이 바로 오랫동안 기박한 상처를 입고 깊은 죄책감과 괴로움 속에서 살았던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주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과거의 상처가 아무리 크고 우리 과거에 얼마나 많은 죄가 있는가도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그를 진실하게 사랑하며 그를 열렬히 찾는 자들은 어떤 외모도 보지 않으시고 주님은 그러한 사람을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천한 자자라도 주님은 그 순수한 사랑과 충성과 헌신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와 함께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시고 만나주시고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지극히 존귀하게 붙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과거에 아무리 큰 상처와 실패와 핸디캡(handicap)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귀한 영광을 주시고 주의 능한 손길로 붙잡아 주의 영광을 위하여 귀하게 써주심을 믿고 그 과거의 쓰라린 실패와 상처와 쓰디쓴 아픔을 걸림돌로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일러주신 요한복음 15장 9절의 이 말씀을 늘 기억합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막달라 마리아는 고침받은 후에도 그 마음에 과거에 자신이 일곱 귀신들렸던 것을 자주 생각하면서 자격지심, 자기 비하에 빠져서 다른 제자들과 믿음의 언니 자매들과 함께 있을 때 비교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그녀를 부활하신 후 첫 번째로 만나주심으로써 그녀를 기쁘게 해주셨습니다. 그녀의 한없는 사랑을 보상해주셨습니다. 그녀를 지극히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실패와 상처를 잊고 주님의 그 넓은 사랑을 믿고 그 사랑 안에서 힘을 냅시다.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그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아픈 과거, 실패, 상처들을 주님은 다 알고 계시지만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더 불쌍히 여기시고 더 사랑해주시고 더 귀하게 여기시고 더 붙들어 쓰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안에 푹 잠겨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부활의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계시해주시는 복된 격려의 메시지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