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나뭇조각은 진짜 | 자기를 잃어버리지 말자. 자기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건 다 잃어도 좋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니체(Nietzsche) 하면 아모르파티amor fati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사실 저도 요즘에는 아모르파티라고 하면 니체보다는 가수 김연자가 더 많이 연상됩니다만, 원작자는 니체가 맞습니다^^ 번역하면 운명애(運命愛)라고 나오지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 정도 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자신의 책임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하고 개척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것은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은 본인들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부정적으로 취급합니다. 그 결과 신에게 의지하게 되죠. 니체는 이 불완전성이 인간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일부이므로 긍정해야 한다는 거죠. 결국 삶을 긍정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념이나 포기와 같은 수동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덮어놓고 낙관하는 자기 최면도 아닙니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전투준비에 가깝습니다. 어제보다 나아지려는 사전 필수 전투준비태세입니다. 이 준비가 되지 않으면 시작하기 어렵습니다. 자꾸 다른 출발점에 가서 서있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없고, 자존감이 떨어지면 그렇게 됩니다. 자꾸 자신의 내면을 타인의 외면과 비교하고 셀프 좌절을 반복합니다. 스스로를 보는 그대로 세상이 나를 봅니다. 자신의 가치가 눈곱만큼밖에 되지 않는다고 여기면, 실제 세상으로부터 얻을수 있는 것은 눈곱입니다. 자신의 본질만은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괴테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동등한 위치에 두려고 애쓰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은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대부분 자기 멋대로 타인을 이해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 왜곡된 시선에 왜 움츠려들다보면, 자신을 보는 스스로의 시선마저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은 자존감의 부재와 함께 커집니다.
니체가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비행술을 가르칩니다.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자신의 삶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세계로 날아가려는 자는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또한 심각해지지 말고 세상을 가벼운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니체는 말합니다. 이는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사상적 토대가 됩니다. 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춤추는 법과 웃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춤추고 웃으려면 즐거워야 합니다. 그 시작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정녕 설사 자신을 미워한다고 해도, 자신만은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유형의 화신이 바로 조르바죠.
다음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주인공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조르바의 할아버지가 돌아오시자 평생 좋은 일이라곤 못 해 본 염소 도둑인 옛 친구가 선물을 요구하며 '그래, 이놈아 성지를 다녀왔으니 내 선물로 성스러운 십자가 한 귀퉁이쯤은 뜯어 왔겠지?' 그래서 할아버지는 ‘당연하지, 우리가 어떤 사인가? 오늘 밤 우리 집으로 오게나. 올 때 신부님도 좀 모셔오고 말일세. 그 성스러운 물건을 건네려면 축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새끼 돼지 구이도 좀 가져오고 포도주도 한 통 가져 와. ’ 그날 밤 할아버지는 벌레 먹은 문설주에서 쌀알 정도 될까 말까 한 나무를 떼어 냈어요. 할아버지는 이걸 보드라운 천 조각에 싸고 기름을 떨어뜨린 다음 기다렸지요. 얼마 뒤 친구가 돼지 구이와 포도주를 들고 신부님과 함께 나타났어요. 신부님은 축복을 해 주고 할아버지는 이 귀한 나뭇조각을 친구에게 전해 주는 의식까지 치르고 돼지를 뜯기 시작했다죠. 거짓말이 아니에요. 보스. 문제는 사나이는 이 귀한 나뭇조각 앞에 절을 하더니 끈으로 꿰어 목에 걸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답니다. 그는 산으로 들어가 아르마톨과 틀레프트 산적 떼에 가담해서 투르크 마을을 불태우는 일에 앞장섰어요. 총탄이 날아오는 데도 겁 없이 돌아다녔답니다. 성지에서 가져 온 거룩한 십자가 조각이 있는데 무서울 게 있겠습니까?“ 조르바가 호탕하게 웃었다. “만사가 다 그런 겁니다..., 믿음이 있나요? 그렇다면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도 거룩한 물건이 되는 겁니다. 믿음이 없다면? 그야 말로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나뭇조각이 되고 마는 거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민음사>
카잔차스키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시 이야기했지만, 사실 어느 나무나 모두 십자가를 만드는 재료가 되니까 모든 나뭇조각은 '진짜'일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만 보고 그것을 만든 나뭇조각을 보지 않는 거지요. 그리고 우리 모두 진짜죠. 존재만으로 모두 소중합니다.
<의식혁명>이라는 책에서 저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의식의 수준과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의식의 수준이 낮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것입니다. 이것은 남이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에너지입니다. 소유가 의식수준을 결정하는 거죠. 한 차원 높은 단계는 내가 하는 일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 존재를 규명합니다. 대표적으로 직업이 되겠죠. 이 경우에도 의사, 판사, 검사가 일용직 노동자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되죠. 소유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규정하는 것보다 고매하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는 이 역시 위험합니다. 직업적으로 무능하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자체가 훼손되기도 합니다.
행위보다 수준높은 최종단계는 그냥 자신의 존재 자체입니다. 19세기 미국시인 왈트 휘트먼이 "나는 있다.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라고 말했습니다만,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호킨스 박사는 소유하는 having 것이나 행doing하는 수준보다 존재 being하는 수준에서 힘과 에너지가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성공을 위해서는 가장 큰 에너지를 이용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내 존재에서 우러나오는 에너지라는 얘기죠.
소유나 행위의 단계까지는 자존감이 아닌 자부심이라는 감정이 작용합니다. 자부심은 외적 조건에 의존하는 감정입니다. 따라서 조건이 달라지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자부심이 수치심으로 바뀌는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곤두박질친 자부심을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되는 감정은 분노입니다. 상처받은 자부심이 분노를 만들어냅니다. 자부심은 본질적으로 파괴적입니다. 잘못되는 경우 자기 자신까지 파괴할수도 있습니다. 자부심은 커질수록 내면은 취약해집니다. 때론 자부심이 많은 성취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만큼 상처받기도 쉽다는 거죠. 언론과 대중매체에 많이 나오는 유명 논객들중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부심에 가득차 있죠. 그래서 비판과 공격을 끌어들입니다. 자부심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분노하고 이를 SNS에 쏟아부어 다시 다른 사람을 공격합니다.
자존감은 존재의 차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자부심과는 전혀 다릅니다. 자부심이 외적인 자기 과시라면, 자존감은 내적인 감사에 가깝습니다. 자부심을 포기하면, 다시 말해 행위의 수준에서 자기를 규정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존감이 생겨납니다. '진짜 나'를 찾는데 힌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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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존재만으로 모두 소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