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2.25. 사순절 둘째 주일
예배 시편 / 시편 37편 1-11절
찬송 / 496장 · 십자가로 가까이
성서 / 이사야 42장 1-4절, 마가복음 8장 27-34절
말씀 /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그는 소리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이사야 42장 2-3절)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마가복음 8장 34절)
김윤식 목사
어떤 사람이 새를 분양하는 곳에서 앵무새 한 마리를 데려와 집에 들였습니다. 그는 앵무새를 정성껏 돌보며,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할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지요. 그런데 앵무새가 말을 하기는커녕 어딘가 불편해 보였습니다. 그러자 부리나케 가게에 달려가 점원에 물었답니다. 점원은 그에게 앵무새가 매달리는 사다리를 추천했습니다. 잘 매달려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리라는 기대였겠지요. 그러나 소용이 없었답니다. 앵무새의 주인은 가게를 매일같이 드나들며 그다음 날에는 거울을 샀고, 그다음 날에는 자그마한 장식용 나무를 사고, 그다음 날에는 값비싼 앵무새용 장난감까지 샀답니다. 대단한 정성이었지요. 이제 앵무새가 말하기만을 기다리면 되겠지요? 그런데 그다음 날 아침, 앵무새가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가 한마디 말을 남기고는 숨을 거뒀답니다. “그 가게에 먹을 거는 안 파니?” 어설픈 주인이 앵무새가 말할 거라는 기대에 정신이 팔려서, 온갖 잡동사니를 마련하느라 정작 앵무새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깜빡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모든 일이 그러하듯, 우리의 신앙도 가장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구별하는 지혜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신앙에서 그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지, 핵심인지, 본질인지 구별할 수 있는 시험지, 곧 시금석과 같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니, 무엇이어야 할까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고 전하고(고전 1:18-21),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했지요(갈 6:14).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할 만큼 언제나 십자가에 집중했습니다(고전 2:2). 한 마디로 사도 바울에게 십자가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고,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훗날,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도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한다”고 말하면서, 십자가가 없는 복음도 은혜도 허황한 것일 수 있음을 우리에게 경고했지요. 그를 따라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역시 십자가가 없는 복음과 은혜는 값싼 것이라고, 싸구려라고, 그러니까 십자가야말로 값진 은혜와 복음의 기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의 시금석이 되는 것, 그리스도인의 중심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 그리스도인의 심장에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란 무엇일까요? 본래 십자가는 아름답고 보기 좋은 상징이 아니라, 무섭고 끔찍한 사형 틀이었습니다. 이집트, 바벨론, 그리스를 지나 로마에까지 유행하며 전해진 십자가 형벌은, 제국이 사용하는 음흉하고도 파괴적인 권력 유지 수단이었고, 정치적인 통제 도구였지요. 예수님 당시 기록을 보면, 이 형벌은 주로 로마가 그 화려한 로마의 평화를 선전할 때 제국의 평화를 위협한다고 여기는 자들, 곧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킨 사람을 고문과 폭력으로 통제하는 도구였습니다. 로마의 평화라는 거대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제국과, 귀족, 그리고 주인을 위협하는 노예들에게 본보기로 처형을 하던 것이 십자가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란 권력자가 힘없는 사람들을 마음껏 다스리고, 부자가 가난한 이들을 다스리고, 주인이 노예들을 다스리도록 하는 공포와 억압으로 가득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란 도무지 끝을 모르는 무소불위한 권력의 승리의 상징이요, 힘없는 이들의 구원과 자유를 향한 외침의 패배와 숙명을 확인하는 제국의 도구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셨지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제국은 저 무서운 형벌 틀로, 사람들의 자유도, 희망도, 구원도 모조리 뽑아 버렸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해 저 무서운 십자가로 승승장구하는 폭력과 불의를 드러내시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과 희망, 그리고 구원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저 넓고 높은 곳을 향해 가는 로마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향해 순명하며, 묵묵히 걸어가셨지요. 예수께서는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 복종하기를 거부하시고, 다만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빌 2:6-8). 제국은 십자가로 사람들의 자유와 희망의 싹을 뽑았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를 사랑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 죽기까지 내어주심으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요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믿음의 길을 보여주시고, 자기 자신을 비우고 내어주는 사랑의 길을 보여주시고, 약함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시험지요,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아니, 십자가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믿음의 중심이요, 생활과 신앙의 핵심이며, 그 시금석이 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본받는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되고, 십자가를 본받는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되고, 십자가를 본받고 살아내는 희망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본회퍼의 말대로 십자가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요, 값싼 싸구려 신앙이 되고 말 겁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믿음의 시험지로, 시금석으로 삼는다면, 지금처럼 십자가를 내세우며, 약한 이들에게 갖가지 혐오를 일삼고, 불의와 폭력과 전쟁을 일으키는 일에 앞장설 수 있을까요?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우리의 마음에 중심에 둔다면, 어찌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힘없는 교인들을 희롱하고, 교회를 헐값에 팔아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 배를 채우는 것에도 만족을 못 해 자기 자녀에게 세습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뜨거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뜨거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어떤 믿음이고 사랑이며 소망인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그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는지가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불의와 폭력과 전쟁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참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시금석을 세워주셨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동안 우리가 다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생활을 돌아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삶으로 살아내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가 모두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서의 말씀으로 마가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장면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만약, 마가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를 뽑아 보라고 한다면 마가복음 8장 29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이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묻고 또 물어 가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때까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다가 그 정체가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질문이 이 단락에서 비로소 대답되는 것이지요. 비록, 마가복음 1장 1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복음으로 시작하지만, 정작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오해했지요. 먼저,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가족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다녔지요(막 3:20-21).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면서,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리는 사람이라고 모함합니다(막 3:22). 헤롯은 예수의 이름이 알려지자 자기가 목을 벤 세례요한이 살아났다고, 반사회적인 불순분자로 이해했습니다(막 6:14-16). 헤롯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왕의 곁에 있던 다른 이들은 옛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 같다고 했습니다(막 6:15). 그렇게 마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을 이해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본문에서 다른 제자들도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한다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답게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했지요. 이어지는 말씀에서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십니다(막 8:31). 예수께서 가시는 길이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으신 것에 대한 답을 해 주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분이시며, 고난의 길, 바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갑자기 화가 나서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고 항의합니다. 그가 이해한 예수님의 길이 예수님이 가시려는 십자가의 길과 달랐기 때문일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서 지긋지긋한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길 기도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시면, 누가 그 옆에 앉을지, 그 옆자리를 두고 다툰 걸 기억해 보면 제자들은 분명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잘못 이해했던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바싹 잡아당기며 항의한 베드로를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꾸짖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무리들을 불러 놓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려는 사람들에게,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나보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인정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믿음과,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그 희생의 길을 따르라는 말씀이지요. 십자가를 지신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폭력과 복수가 아니라 낮아지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길을 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십자가가 없다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부정하시고, 부활의 영광과 기쁨의 감격을 누리지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다만, 우리의 길이 나의 일과 나의 생각으로 가득하고, 나만 인정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는 길로, 자기를 낮추고 비움으로 가볍고 기쁜 찬미의 길로, 무엇보다 생명과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주님께서 함께 걸어가시는 십자가의 길로 우리가 걸어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또 무엇으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다만,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을 더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긍휼로 가능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볼 때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 말씀으로 받아 읽은 말씀에는 긍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일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종이지요. 오늘 본문은 흔히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네 가지 본문 가운데 첫 본문입니다(사 49:1-7, 50:4-9, 52:13-53:1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는 사람, 당신의 일꾼, 곧 종을 보고 계십니다. 그를 붙들어 주시지요.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셨고, 마음으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종이라고 해서 억압하거나 군림하시지 않고, 다만 그에게 당신의 따스한 영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종과 함께하신다는 것이지요. 그가 하는 일은 모든 이들에게 정의를 베푸는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처럼 사람을 힘과 폭력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다정한 친구처럼 소리 지르지 않고 조용히 말을 건네지요. 상하고 다친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낙담한 사람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버려진 이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사소한 것도 작은 것도 무시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그러하시듯 긍휼히 여깁니다. 긍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일꾼이자 종이 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긍휼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에도 긍휼로 함께해 주십니다. 십자가의 길이란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는 길이요, 낮아지는 길이며, 나를 내어주는 길입니다. 다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도 그 긍휼한 마음으로 자기 십자기를 지고, 주님을 따라 우리의 삶으로 십자가를 살아내고,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 십자가를 담아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도 겸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기를,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뜻과 형상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