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암의 봄
곡성에는 목사동면이라는 다소 특이한 지명이 있습니다.
木을 분해하면 十 八이 되니, 18寺 동네입니다.
이곳에 18개의 절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단순한 전설로 여길 수 없는 이유는
이 지역의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아미산(587m) 때문입니다.
원래 아미산(峨眉山)은 중국 스찬성에 위치한
해발 3000미터 급의 높은 산으로
중국식 발음으로는 어메이산입니다.
오대산, 보타산, 주화산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불교 성지로서
보현보살을 상징하는 산입니다.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목사동면의 아미산에도 틀림없이
18개의 절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절이 사라지고 천태암 하나만
외롭게 남아 아미산을 지키고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지켜본 천태암 미루나무
천태암(天台庵)은 경주 석굴암보다 86년이나 앞선 신라 문무왕 5년(서기 665) 혜암 율사(慧庵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명맥만 이어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 명종 25년 (서기 1195)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이곳을 찾아와 법당을 중창하고 석굴에 16 아라한을 모시고 머물면서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미산과 천태암이라는 절 이름도 보조국사 지눌이 있었던 시기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보조국사 우리나라 불교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인물입니다. 국사 즉 왕의 스승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기반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지배계급의 기복 신앙으로 전락했던 고려 불교를 개혁하여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이 지눌 대사의 가장 큰 업적입니다. 개혁의 원동력이 되는 정혜결사를 조직하고 수선사 운동을 전개하여 송광사를 기반으로 고려 불교에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을 창시하였습니다. 그렇게 왕성한 개혁 활동을 전개하던 당시 머물고 있었던 곳이 바로 이곳 아미산 천태암이었습니다.
보조국사 지눌의 안식처였던 곳
숭유억불 정책이 기승을 부리던 조선 시대에도 천태암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태암은 창건 이래 오늘날까지 지눌 대사의 법통을 계승한 고승들의 수행처로서 명맥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 불교사의 큰 발자취가 남아 있는 천태암은 지금까지 은둔의 성지로 감춰져 있다가 현 천태암 주지인 대주 스님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대대적인 조사 끝에 마침내 2019년 12월 문화관광부로부터 전통사찰로 지정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시대적 특색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다고 인정되는 사찰, 한국 고유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건축사의 흐름을 간직한 사찰, 한국 문화의 생성과 변화의 모형이 되는 사찰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정하여 보존 관리합니다.
따라서 이는 그동안 구전되어 오던 천태암의 불교 성지로서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작고 아담한 암자
천태암은 아미산 서쪽 산등성이 500m 지점에 요새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구례 사성암과 유사한 형태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접근이 무척 힘들었겠지만 다행히 지금은 콘크리트로 포장된 임도가 절 입구까지 나 있어 좀 가파르긴 하지만 일반 승용차로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습니다. 요사채와 대웅전 그리고 산신각으로 이루어진 아주 작은 암자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정말 대단합니다. 구례 사성암 못지않을 정도로 대단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절 마당에 서면 오른쪽부터 광주 무등산, 중앙에 화순 모후산 그리고 왼쪽에 송광사를 품은 조계산이 백아산을 비롯한 크고 작은 산들을 거느리고 호위하듯 펼쳐져 있습니다. 대웅전 뒤쪽에는 창건 당시부터 있었다는 석굴법당이 있고 산신각에서 정상을 향해 조금 올라가면 지눌 국사가 참선 수행했다는 좌선대 터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미산 정상에 오르면 지리산을 비롯한 무수한 산 너울이 파도처럼 일렁입니다.
천태암을 호위하는 듯, 구름 위로 고개를 내민 명산들
무엇보다 이토록 높은 고지에 자리 잡은 작은 암자가 천오백 년 장구한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장엄한 풍경도 크게 한몫했겠지만 이론상으로는 지하수맥이 흐를 수 없는 이곳에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바위틈에서 솟구친다는 점도 스님들의 수행을 돕는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보조국사 지눌은 아미산 천태암에 6~8년을 머물면서 조계산을 오가며 송광사 불사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그 길을 오가기 위해 천태암에서 송광사까지 토성칠교라는 일곱 개의 다리를 놓았다고 합니다. 집권층에 의해 타락했던 불교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던 보조국사가 머물렀던 천태암이 전통사찰 지정을 계기로, 종교를 떠나 우리 모두에게 진한 힐링을 안겨주는 마음의 안식처로 자리 잡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출처] 은둔의 성지 아미산 천태암이 전통사찰로 지정된 이유는|작성자 곡성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