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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8월2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수원] 인간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제1독서 예레 26,11-16.24
† 복음 마태 14,1-12
★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시도하였으나, 죄 없는 이의
피를 흘리게 하면 백성이 그 책임을 질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대신들과 백성은 그를 살려 두자고 한다(제1독서).
★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차지한 헤로데에게 부당하다고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 이
때문에 헤로데는 요한을 가두었으나 백성이 두려워 죽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헤로데는 괴로워하면서도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최후에 대한 상세한 정황을 알려 줍니다.
유다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살로메’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헤로디아의 딸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반드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내용은
헤로데의 마음입니다. 복음은 헤로데의 잘못된 행위가 무엇이며, 그의
불편한 심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뛰어난 철학자들의
윤리적 통찰의 도움으로 성찰해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에
대해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연회석 손님들 앞에서 춤추어 헤로데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기분이
들뜬 헤로데는 성급하게 약속은 하였으나 자신의 위신을 지키고자 요한을
죽이라는 명령 앞에서는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막강한 힘을 지닌 ‘폭군’이 과연 행복한지를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폭군은 결코 행복할 수
없는데, 그 마음이 서로 상반되는 원의와 욕구로 갈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행복한 사람의 특징을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좋은
‘벗’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행위를 수행하게 하는
덕은 다름 아니라 감정과 원의가 갈림 없이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데서
비롯됩니다.
헤로데에게도 회한과 일말의 양심은 있었을 것이고,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감정도 있었겠지만 혼동되고 무질서한 마음, 갈라진 원의는 올바른 행위의
기회를 놓치게 했습니다. 그의 불편한 심기의 본질은 여기에 있었고, 이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의 여러 욕구와 감정을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보며 조화와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세례자 요한의 모습
2014년 가해 8월2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 14,1-12
‘지금 당신의 양심에 털끝만큼도 걸리는 게 없다면 그건 기억력이 나쁘다는
신호입니다.’
어느 책에서 본 구절입니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합니다. 정말로 양심에
털끝만큼도 걸리는 것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기억력이 엄청나게 나쁘지
않은 한 양심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약점, 자신의 부족함을 늘 숨기기에 급급합니다.
자기 자신은 정의로우면서 그른 것이 전혀 없는 올바른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하고 또 그렇다고 말합니다. 결국 자기 기억력 나쁜 것을 티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과연 옳은 모습일까요? 기억력 나쁜 것을 티내기 보다는 자신의 단점과
부족함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분
앞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만 떳떳한 척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만큼 더욱 더 자신 있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두 명의 대조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임금입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그 반대인 임금의 분노를 사는 편을 택하지요. 그래서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헤로데 임금을 향해 부도덕하다고
여러 차례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데 임금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눈을 두려워합니다. 즉,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중에서 누구를 더 두려워해야 할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헤로데 임금처럼 자신의 체면을 중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을
그럴싸하게 포장할 뿐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역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삶. 그래서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하느님의 품 안에서 참 행복을 느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살다 보면 흔히 저지르게 되는 두 가지 실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면서도 끝까지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담긴 일에 대해 우리는 이 두 가지 실수를 계속 범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고, 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우리의 실수를 조금씩
줄여 나가야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모습은 헤로데 임금의 모습에서
벗어나, 참으로 주님을 증거했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 점점 가까워 질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빅토르 위고).
관점의 변화가 필요한 우리
종종 혼자서 여행을 합니다. 바쁜 일상의 삶을 뒤로 하고 하는 이 혼자의
여행은 너무나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기분은 하루 이틀일
뿐입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이때는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냥 함께 대화를 하고 싶어집니다.
‘좋은 사람만이 의미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외롭고 힘들 때에는 나쁜 사람 역시 내게 큰 의미 있는 사람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즉, 관점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관점의 변화를 통해 완성됩니다. 나만
옳다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여행길 안에서 변하고 변해서 주님의 뜻에
가장 맞는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인쳔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십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십시오.'
2014년 가해 8월2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마태오1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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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온갖 종류의 두려움을 체험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겠지만, 정당한 반응으로서 느끼게 되는
두려움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현상에 대해 복음적으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두려움을 감지한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을,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두려움에는 크게 건강한 두려움과 그렇지 못한 두려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건강한 두려움이라면 하나의 은총으로 받아들일 일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치유를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가 보여준 두려움을 소재로 해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헤로데가 보여준 두려움은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서 받게
될 지도 모를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밉고 달갑지 않고 거슬리는
존재였지만, 어떤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졌던 세례자 요한,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터에, 헤로디아의 딸의 요청이 발단이 되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다는 것은 성서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여간 그 사건으로 인해서 헤로데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인정인지, 아니면 징벌에 대한
두려움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 역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나 죄라고
여기는 것들 때문에, 많고 적게 두려움을 체험합니다.
예외인 사람이 있을까요? 글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식이라는 말을 쓸 때는 두 가지 면에서 식별해야 합니다.
하나는 뉘우침에서 나오는 죄의식과 다른 하나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죄의식입니다.
전자는 건강한 두려움이고 후자는 건강하지 못한 두려움입니다.
잘못된 두려움은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 두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또 다른 잘못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오히려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죄의식으로부터 올바르게 해방되기 위해서는 용서를 받았다는 체험,
그래서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체험이 중요합니다.
고해성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도 잘못된 죄의식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먼저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옳지 못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대상들의 아픔을 함께 하고 이해하려는,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서도 미안한 마음을 절감하면서,
뉘우치는 마음으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화해만이 서로를 치유하는
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중재가 필요함을 의식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필요합니다.
단 두려워할 일에 대해 두려워하는 우리이기를 기도해봅니다. (20130803)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2014년 가해 8월2일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 14,1-12
벽돌 한장이 모여서 큰 집이 됩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오늘은 제가 평소에 좋아하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잠시 무더위를 식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의 한 모퉁이가 깨끗해 졌습니다.
꽃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지구의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내 마음에 시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지구의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온 세상이 환하고 밝아졌습니다.”
짧은 시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세상이 바뀌겠어!, 나 혼자 한다고 세상이 깨끗해지겠어!, 전에도 해
보았지만 결국은 안 되고 말았잖아!,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우리도
그냥 묻어서 가지 머!,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지 머, 편한 게 좋은 거잖아!’
저도 이러게 지낼 때가 많았습니다. 보는 사람 없으면 교통신호를 어기기도
했고, 카메라 없으면 규정 속도를 위반하기도 했습니다. 친구들끼리 없는
친구를 흉보기도 했고, 주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또 다른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모해 보이지만 작은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이야기한 예레미야 예언자, 새로운
세상을 선포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도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 무모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의 외침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고 교황님께서 미사를 드리시는 대전까지 가고 있습니다. 교황님께
십자가를 선물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
단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밀양의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할머니들도
있습니다. 강정의 해군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동의
현장에서 부당함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대한 자본과 공권력
앞에서 아주 작게 느껴지고, 부질없는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외침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세상을 변화시켰음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벽돌 한 장이 모여서 큰 집이 됩니다. 별들이 있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인간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다
2014년 가해 8월2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복음: 마태오 14,1-12
< 인간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다 >
독일의 미네르란 목사는 “전쟁백서”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는 히틀러의 독재에 항거하다가 8년 동안 옥중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날 무렵 같은 꿈을 일곱 번이나 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 일렬로 줄을 서 있고 자신들의 삶에 대한 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도 그 줄에 끼어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은 옆의 사람을 볼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심판자 앞에서 오직 자신의
모습만 들여다보기도 버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앞 사람까지 차례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꾸
주위를 두리번대고 있더랍니다. 그리고 결국 미네르 목사와 눈이
마주쳤는데, ‘이 사람 때문입니다!’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
자세히 보니 자신 앞에 있는 그 사람이 ‘히틀러’였다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해져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네르야, 히틀러가 이렇게 된 것은 너의 탓이다. 네가 8년 동안 히틀러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비판만 했지 언제 이 사람에게 나를 알게 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니?”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가 그런 전쟁광이 된 것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고꾸라져 한참을 울었고, 그래서 써낸 책이 바로
‘전쟁백서’라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할 때는 반대로 자신을 정당화 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정당하니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이 되기 전이
이를 깨닫고 남을 비판하는 일을 접어야만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잡아서 사형에 처하려고 합니다.
그가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랑인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당당히 말합니다.
“이 내 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바르게 나를
처리하십시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 자신과 이 도성과 그 주민들은 죄 없는 이의 피를 흘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는 사람들이 두려움에 떱니다. 무슨 말 때문에
두려워했을까요? 바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내려치기 위해 돌을 들고
서있는 자칭 정의로운(?)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그리고 바닥에다 그들의 죄를 일일이 쓰시며 이렇게 되뇌셨을 것입니다.
‘너희들의 죄를 스스로 책임지고 싶다면...’
돌을 들고 있던 이들은 자신들이 돌을 던지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떳떳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앞서서 자신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할 뿐입니다. 남의 눈에 티가
보이면서 자신 눈 안에 들보를 어떻게 보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나쁜 의도가 자신의 들보를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려하지 않고 자신에게
여자를 만들어 준 하느님과 그 여자에게 핑계를 돌립니다. 그때 하느님은
아담의 죄가 무엇이라고 일일이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가 판단하는 것을
보시고는 바로 그를 죄인으로 단정하여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십니다.
판단하는 이의 죄를 일일이 따질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어서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 죄란 바로 자아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아 자체가 죄입니다. 그 죄가 나의 주인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판단하는 사람 자체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심판자이신데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서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루살렘 시민처럼 재빠르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은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에 그를 살려두기로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이 따르기 때문인데 남을 판단한 사람의 책임이란 바로
자신도 판단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내 탓이오!”를 세 번 외칩니다. 이것이 구원의 외침인
것입니다. 내 탓이라면 다른 사람 탓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처럼 자신의 탓을 인정하여 자비만을 바래야 하는
처지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정당하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밖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정당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도 동생도 판단하여 결국
아버지의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결코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다른 이를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하느님 중심의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8월2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예레26,11-16.24 마태14,1-12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 14,1-12
하느님 중심의 삶
제가 안식년을 맞이하여 수도원을 떠나 지나면서 깨닫는 바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수도원을 떠나 편히 쉬게 되었다고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이는 아주 짧은 생각입니다.
저에게 안식년 역시 '하느님을 찾는 여정'의 하나이자 '수도생활의 연장'
이기에 결코 긴장을 끈을 놓지 않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사람에 대한 여러 호칭이 생각납니다.
수도자, 수행자, 예언자, 구도자, 순례자, 순교자 등 최상의 호칭들입니다.
진정 이 호칭대로 '답게'살 때 하느님의 중심의 삶입니다.
몇가지 깨달음을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사람은 떠나도 하느님은 영원히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집'인 교회나 수도원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입니다.
제가 안식년을 맞이하여 수도원을 떠나 있어도 형제들은 한결같이 여기서
살아가고 있고, 수도원을 찾았던 형제자매들도 여전히, 끊임없이 하느님의
집인 여기 수도원을 찾습니다.
아무리 본당 신부가 좋아도 발령을 받아 타 본당으로 떠나면 신자들이 그
신부를 따라 가지 않고 여전히 제 본당에 머무는 것은 바로 사람이 아닌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느님을 믿는 것, 사람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 바로 이게 올바른 신앙행위요 가톨릭 신자들의 자랑입니다.
또 하나 모든 답은 하느님 안에, 미사안에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살다보면 참으로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며 그럴 때 마다 하느님 안에서,
미사 안에서 답을,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이래야 중심을, 길을 잃지 않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도 않고, 악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비로소 내적 안정과 평화의 삶입니다.
믿는 이들에겐 하느님 아닌 어느 곳에도 답은 없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다른 곳에서 답을 찾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이 거룩한 미사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 아닌, 미사 아닌 다른 곳에서 답을 찾을 때 혼란과
불안만 가중 될 뿐입니다.
믿는 이들의 답은 모두 하느님 안에, 미사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미사 안에서 주님을 만나 나를 발견할 때 저절로 풀리는 문제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이들의 모범이 바로 예언자요 순교자입니다.
대부분 순교로 마감한 예언자들의 운명입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과 독서의 예레미야가 좋은 모범입니다.
순교성지를 순례할 때 마다 새삼스레 깨닫는 진리가 있습니다.
전혀 무의미했던, 아무 것도 아녔던 땅이 순교성인으로 말미암아 성지가
됨으로 많은 믿는 이들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순교성인 하나로 먹고 사는 지역의 사람들도 참 많지 않습니까.
이 순교성지들 또한 하느님 중심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과 독서의 '예레미야'는 그 상황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언자이자 순교자인 두분은 그대로 주변을 환히 밝히는
하느님 중심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주연은 예레미야와 요한이고 그 나머지 모두는 중심을 에워싸고
있는, 중심을 잃은 악역들입니다. 중심은 의연하고 안정되어 보이는데
주변의 사람들은 웬지 혼란하고 불안해 보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상실에서 기인됨을 깨닫습니다.
이들의 중심 자리에 서서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레미야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이 집과 도성에 대하여 여러분이 들으신 이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바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 답을, 살길을 찾으라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하느님 중심 자리에 자리 잡았기에 이렇게 두려움
없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 역시 흡사합니다.
예언자이자 순교자인 요한과 예수님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이 허약한 우유부단한 헤로데는 불안에 전전긍긍입니다.
-예수님의 출현과 소문에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 살아 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멘붕 상태에 빠진 헤로데 임금의 중심 없는 허약한 삶이 적나라하게
들어납니다. 중심을 잃으면 온갖 탁한 감정에, 주변의 온갖 유혹에
휘말리게 되어 불안과 혼란만 가중될 뿐입니다.
문제는 모두, 늘 우리 안에 있고 답은 모두, 늘 우리의 중심인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 거룩한 미사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 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시편145,15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고독하고 겸손했던 의인 세례자 요한
2014년 가해 8월2일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고독하고 겸손했던 의인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 하면 즉시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가장
우세한 이미지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구약시대 마지막 대예언자’, ‘세례의
원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강직한
예언자’, 그래서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던 ‘멋진 의인’이란 이미지가
강렬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세례자 요한의 삶은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엄청 큽니다. ‘나에게로 향하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끊임없이 내 뒤에 서 계신 예수님께로 돌리는’ 고독과
겸손의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코너가 있는데,
‘닭치고’입니다. 기억력이 몹시 약한 닭에 착안해서 금세 잊어먹고
깜박깜박하는 사람들을 풍자하는 코너입니다. 닭들 참으로 재미있는
동물입니다.
이런 비유도 있더군요. 수탉들은 자기의 울음소리로 태양과 온 세상을
잠에서 깨운다고 확신한답니다. 그래서 자기가 없으면 새날이 밝아올
수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러나 진실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닭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입니다. 태양은 새벽의 여명을 통해 수탉들에게 새날이
밝아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정신없이 자고 있던 수탉들은 아스라이
전해오는 여명을 온몸으로 느끼고 잠에서 깨어납니다. 수탉은 우주의
심장인 태양이 세상에 보내는 빛과 따뜻함을 세상에 전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수탉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잠에서 깨운다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착각, 나약한 우리가 가장 쉽게 범하게 되는 오류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사실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나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시편작가의 말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난다긴다하지만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연기 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 존재입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 그리고 삶 앞에 가장 필요한 자세는 ‘겸손’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정말이지 탁월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때, 그야말로 잘 나가던
때, 그를 바라보던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대단했습니다. 촌철살인 같던
메시지, 극도로 청빈했던 삶, 강직한 인품, 쌍날칼보다 날카롭던 그의
설교...그의 삶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던지 그를 따르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한때 ‘세례자 요한 당(黨)’까지 형성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명료한 신원의식과 명확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저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진 자,
자신은 길이 아니라 이정표,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주인·왕이 아니라 종,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때가 이르자, 즉 구세사의 주인공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자 스스로를 소멸시켜나가기 시작합니다.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완전히 낮추며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 오랜
세월 공들여 양성시켰던 제자들도 미련 없이 예수님께로 떠나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완벽히 소멸되기 위해 헤로데 왕가의 타락을 공개적으로
거듭 질타합니다. 그 결과 순교라는 완벽한 소멸을 맞이합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수도회] 불편한 진실[단상]
2014년 가해 8월2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이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6,11-16.24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연중 제17주간 토요일(2014년 8월 2일) 불편한 진실
헤로데는 예수님 안에서 세례자 요한을 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예언자의 열정으로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간단한 인물이 아닙니다. 불같은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가까이 가길
사람들은 두려워 했습니다. 산들바람같이 속삭이는 말이 아니라 잠자는
양심을 깨우는 천둥같은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살아 있을 때에는 그들을 증오하고 박해하다가 그들이 죽고 나면 비로소
기념비를 세워주었습니다. 더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귀는 본능적으로 감미로운 말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몸에 좋은 약이
쓴 것처럼 듣기 싫은 말은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우리 삶을 다시금
진지하게 보도록 합니다. ‘불편한 진실’을 올바로 듣고 판단하는 감각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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