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요일 오후/오탁번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 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에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시 읽기> 토요일 오후/오탁번
오탁번의 시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것을 한 편 고르라면 저는 물어볼 것도 없이 <토요일 오후>를 택할 것입니다. 오탁번의 시세계는 아주 진지하기 이를 데 없어, 그 속에서 웃음의 요소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이 작품만은 읽으면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게 할 만큼 재미있습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금의 첫 부분부터 흥분하는지 좀 궁금하실 겁니다. 그래서 우선 시의전문을 전하기로 합니다.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 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일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에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한
강남구에세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토요일 오후> 전문
바로 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쓴 오탁번은 1943년생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이순을 앞둔 나이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우리 문단에서 신춘문예 연속 세 번을 당선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한 번도 당선되기가 어려운 신춘문예에 그것도 연속하여 세 번이나 당선한 것입니다. 1966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24세 때, 그는 『동아일보』에 동화 <철이와 아버지>가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다시 1967년 25세 때, 그는 『중앙일보』에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1969년 27세 때, 그는 『대한일보』에 소설 <처형의 땅>이 당선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동화, 시, 소설 세 분야에서 연속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이후 그는 동화작가보다는 소설가로 그리고 시인으로 활동하여 6권의 소설집과 3권의 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위의 시 <토요일 오후>는 그의 제3시집 《생각나지 않은 꿈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오탁번은 아주 섬세한 감정과 감각 그리고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시인입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거나 뭔가를 주장하기보다 세세하게 관찰하고 고백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이런 오탁번의 시는 민중시가 기세를 올리던 1980년대보다 일상시나 고백시가 호소력을 가진 1990년대의 문단 분위기와 더 잘 어울립니다. 여러분은 위 인용된 시 <토요일 오후>를 보면서도 그점을 조금 느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오탁번의 시 <토요일 오후>를 본격적으로 감상해봅시다. 시심을 살려내기 위하여 이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저와 함께 이 시를 감상해보지요.
오탁번의 시 <토요일 오후>는 우선 소시민들의 작은 생활세계, 작은 기쁨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시에서 영웅과 같은 대단한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내가 역사를 바꾸겠다느니, 내가 인류를 구원하겠다느니, 내가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겠다느니, 내가 세계의 진실을 다 안다느니 하는 식의 영웅적 인물들에 그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대신 그는 우리가 때로 소시민적인 인간이라고, 또 그러한 삶이라고 비판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보통 인간들의 자그마한 삶과 그러한 삶을 꾸려가는 선남선녀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소시민들과 그들의 삶을 무조건 긍정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소민적인 인관과 그들의 삶이 어떤 한계 위에 놓여 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소민들이 삶이 놓여 있는 한계를 고스란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소시민들의 작고 평범한 삶을 소중한 것으로 들춰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탁번은 소시민들의 한계를 그의 시 <토요일 오후>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그들은 힘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 안에서 자족하듯, 아니 체념하듯 하루하루 삶을 살아갑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일주일의 노동을 거부하지 않한 채, 이미 만들어져 있는 제도에 순응하며 토요일 오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또한 국가가 그들을 위하여(?) 못된 장면은 가위질을 하고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를 상영해도 아무 불평 없이 그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것말고도 서울시가 시민들을 위하여(?) 그들 방식대로 만들어놓은 한강시민공원으로 작은 행복을 위하여 놀이를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과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주어지니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거나 화해하며 그들만의 작은 삶을 아기자기하게 꾸려나갈 뿐입니다. 그들의 최대 과제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어떻게 행복의 높이를 키워가느냐 하는 것이고, 그런 꿈을 위하여 베란다에 행운목을 키우듯 그들의 삶에 물기를 더해갈 뿐입니다.
이 시의 화자이자 시인인 오탁번은 자기 자신 역시 이러한 소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소시민적 삶 속에서 자기 역시 행복의 순간을 체험한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소시민적인 기쁨과 행복은 토요일 오후의 여유로운 시간을 맞이한 가운데서 딸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애정 속에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자라고 있는 행운목의 잎을 감상하는 데서 지나간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되살리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거창한 ‘대사건’의 연속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역사 교과서는 참으로 많고 많은 대사건으로 역사를 채색하고 있지만, 그것의 이면을 잘 들여다보면 인간들의 삶과 그들이 만든 역사란, 일상의 연속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산하게 아침밥을 먹고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고, 그 가운데서 어제와 비슷한 일을 오늘도, 오늘과 비슷한 일을 내일도 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약간의 피로 속에서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고, 우리는 편안한 못으로 갈아 입은 채 9시 뉴스를 보고 세상을 개탄하다 잠이 들곤합니다. 이러는 사이에 아이들은 자라서 결혼을 하고 한때 힘을 자랑했던 젊은이들은 서서히 나이를 먹어갑니다. 삶이 대사건의 연속인 줄 알았던 사람들, 아니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저의 이 말을 들으면서 실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이 이렇게 쩨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일상을 소중하게 가꾸지 않고는 결코 행복한 삶을 만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탁번의 시 <토요일 오후>에서 빛나는 부분은 그가 일상인의 작은 기쁨과 행복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사실 이외에 신화적 시간이라고 말할 만한 시간을 새로이 찾아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신화적 시간이라는 말이 조금 낯설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것 같아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제가 말하는 신화적 시간이란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온전한 통합이 이루어졌던 시간을 뜻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알기 이전과 같은 시간, 혹은 신의 사랑을 받아 노동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에덴 동산에서의 시간 같은 것을 신화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이런 시간을 다시 바꾸어 표현한다면 낙원이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는 실낙원의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단절의 거리를 메우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탁번이 어떻게 신화적 시간을 찾아내고 있는지 그 점을 알아보기 위해 그의 시 <토요일 오후>의 해당 부분만 다시 옮겨보기로 하겠습니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오탁번의 시 <토요일 오후>가 가장 재미있는 작품으로, 그리고 일상의 소시민적인 삶의 세계를 말하면서도 그 이상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작품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위의 인용 부분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그 광경이 어리 속에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평소 우리가 쓰기를 꺼려하는 ‘불알’이라는 말이 그렇게 재미있게 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신화적 시간’이라고 말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잠시 뒤에 이 신화적 시간에 대하여 논의해 보기로 하고 다른 이야기를 조금만 할까요.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몇 살 때까지 엄마 혹은 아빠와 목욕을 했습니까?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 그건 너무하다고요? 그러면 유치원 시절까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여러분들은 분명 엄마 혹은 아빠와 성의 같음과 다름에 관계없이 같은 목욕탕에 속에서 목욕을 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조금 나이가 들면, 목욕탕 앞까지는 부녀 혹은 모자가 같이 가지만, 목욕탕 입구에 씌어진 남녀 표시의 간판을 보며 서로 다른 길을 찾아 쓸쓸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저는 엄마 혹은 아빠와 부끄러움 없이 함께 목욕할 수 있었던 시절까지를 인간사에 깃들인 ‘신화의 시간’이라고 규정합니다. 그 시간 속에는 너와 나, 선과 악 같은 이분법의 횡포가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벗었어도 부끄럽지 않았던 것처럼 그 시간 속에는 우리는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도대체 부끄럽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의 구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불교에서는 분별심 내지는 시비지심이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분별심과 시비지심이 생기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너와 나를 구별하고 그 속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최대 목표 가운데 하나는 분별심과 시비지심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이미 우리의 눈은 밝아졌고, 우리의 몸은 수없이 많은 분별의 논리로 가득 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분별심과 시비지심이 끼어들지 않은 세계를 그리워합니다. 우리는 신화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습니다. 오탁번은 그의 체험 속에서 신화의 시간을 찾아내고 있는 것인데. 그것의 한 구체적 현장이 딸과 목욕하던 때입니다.
오탁번이 아버지가 되어 어느 토요일 오후 딸과 목욕을 함께 할 때, 딸은 아버지의 가장 은밀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놀았습니다. 딸은 그것이(아버지의 불알) 무엇인지 분별하기 이전의 존재입니다. 딸은 인간이 최초의 신화적 시간에 가졌던 순진성과 순수성을 그대로 안고, 아버지의 불알을 장난감 삼아 놀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딸아이는 그가 갖고 놀던 아버지의 불알을 보고 자기 식대로 묻습니다. 뭐라고 물었다지요? 아, 인용문 혹에 나와 있습니다. “이게 구슬이나”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 물음을 받고 아빠는 이미 분별심을 가진 인간으로서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빠인 오탁번은 이런 자신의 대답 내용을 성찰하며 이것이야말로 내가 세상의 분별 논리를 제대로 가르친 것이라고 다소 쓸쓸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그는 어른들의 분별세계를 딸에게 가르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서 쓸쓸한 심정을 맛본 것입니다. 그런데 아빠의 이런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아직 신화적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딸은 또다시 아빠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그것은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 “아빠 이게 불알이나?”하고 묻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구슬과 불알, 진짜와 가짜, 너와 나 사이의 분별을 하기 이전 상태에서, 그야말로 신화적 인간과 그 문법으로 살아가는 딸의 행동이, 이들을 구별하며 살아가는 세속적 인간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빠인 오탁번은 딸과 가졌던 신화적 시간 때문에 무한한 행복을 맛봅니다. 그의 토요일 오후가 무진장의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신화적 시간이 토요일 속에 깃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재미있고 아름다운, 그리고 감동적인 신화적 시간의 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딸은 커감에 따라 그들 사이의 이 신화적 시간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아빠의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놀던 신화적 시간의 주인공-딸은 어느새 중학교 2학년 학생이 되었고, 그는 학생답게 불알과 구슬을 구별하는 것을 물론 아빠에게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할 줄 압니다. 불알과 구슬을 구별한다는 것과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한다는 것은 그가 세속의 문법을 익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딸은 신화적 시간 속에서 자신이 보여줬던 일들을 부끄러워합니다. 이런 부끄러움은 딸아이가 세속적인 시간의 논리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아빠인 오탁번은 딸과 가졌던 그 신화적 시간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딸을 보며 신화적 시간이 연속되는 느낌을 갖습니다. 딸은 그에게 신화적 시간을 되돌려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모의고사에서 열 문제나 틀리는 딸이지만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이라고 말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그것을 신화적인 만남의 산물입니다.
오탁번의 이런 경험은 부녀간의 작은 추억거리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잘한 삶 속에서 하루치의 행복을 조그맣게 만들어가는 소시민들에게 이런 추억거리는 숨겨진 보석과 같이 소중합니다. 하루의 삶이 피곤하고 어두울 때, 그들은 숨겨진 이 추억의 보석을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꺼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불알과 구슬을 구별하지 못하던 신화적 시간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어져 나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사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화적 시간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오탁번의 시 <토요일 오후>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와 함께 잃어버린 신화적 시간을 찾아낸 기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화적 시간은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신화의 힘’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