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nternational Consortium of Investigative Journalists, ICIJ)가 발표한 전세계 주요 정치지도자, 억만장자 기업인, 유명 연예인 등의 역외 탈세와 부적절한 투자 등 비리 의혹을 폭로한 소위 '판도라 페이퍼스(판도라 보고서, 이하 보고서)'의 후폭풍은 러시아 정·재계에도 밀어닥치는 모양새다.
러시아 언론들은 4일 '판도라 보고서'에 이름이 오른 주요 인사들의 비밀스럽고 부적절한 해외 투자 내역 등을 소개한 뒤 일부 당사자들의 해명을 전했다.
푸틴대통령과의 사이에 딸을 낳은 것으로 알려진 스베틀라나/사진출처:러시아 언론
'판도라 페이퍼스'는 ICIJ에 참여한 BBC, 워싱턴포스트, 르몽드 등 117개국 159개 미디어에서 600여명의 언론인이 전 세계 14개 서비스 기업에서 유출된 약 1,200만개 파일을 검토, 분석하고 추적한 내용을 담은 방대한 보고서다. 담겨진 기록은 1970년대 것도 있지만, 대부분 1996∼2020년 내용이라고 한다.
이 보고서는 지난 2016년 나온 ‘파나마 페이퍼스’에 이은 ICIJ의 기획및 탐사 보고서 제 2탄이다. 당시 '파나마 페이퍼스'에서 거론된 주요 인사들의 일부는 현직에서 사임하거나 검찰 수사를 받는 등 국제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이번 '판도라 페이퍼스'도 당사자들에게 적지 않는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ICIJ는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인도양 섬나라 세이셸, 홍콩, 중미의 벨리즈 등 잘 알려진 역외 피난처에 등록된 계좌를 파헤쳤다고 밝혔다. 사우스다코타주 81개, 플로리다주 37개 등 미국에서 설립된 신탁사에도 일부 비밀 계좌가 있다고 전했다.
푸틴 대통령의 숨겨진 딸(위)을 파헤친 탐사보도매체 '프로엑트' 보도 내용/유튜브 캡처
이 보고서에 나오는 각 국가의 지도자급 인사 330여명 중 러시아인은 대여섯명 정도다. 영국 가디언과 미국 워싱턴 포스트 등 서방 언론은 푸틴 대통령의 '숨겨진 딸'을 낳은 것으로 믿고 있는 한 여성과 '푸틴의 이미지 메이커'로 알려진 측근 방송인을 부각시켰지만, 현지 언론은 푸틴 대통령과의 연관성을 배제하고 당사자 이름과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다뤘다.
우선, 스베틀라나 크리보노기크(46. Cветлана Кривоногих, 러시아발음으로는 크리보노기흐)다. 러시아탐사보도매체에 의해 푸틴 대통령과 사이에서 딸을 낳은 것으로 알려진 여성이다. 크렘린은 '숨겨진 딸'의 존재에 대해 '악의적인 가짜 뉴스'로 규정하고, 해당 매체를 외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외국 대리인'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탐사보도매체 프로엑트가 푸틴 대통령의 세번째 딸(추정) 찾았다는 지난해 11월의 기사 묶음/얀덱스 캡처
판도라 보고서에 따르면 크리보노기크는 역외 회사를 통해 모나코에 410만 달러(약 48억6670만원)에 달하는 고급 아파트를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의 공식 직함은 '방크 러시아'의 주주다.
다른 한명은 콘스탄틴 에른스트(Константин Эрнст)다. 푸틴 대통령을 '철의 의지를 가진 러시아의 구원자'라는 이미지를 만든 러시아 TV 채널 '러시아-1'의 대표(гендиректор)다. 그는 지난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의 개막·폐막식 진행을 맡은 뒤 모스크바 내 수십 개의 극장 등을 민영화하는 국가 사업에 파트너가 됐으나, 역외 회사의 이름으로 이 사실을 숨겼다고 파나마 보고서는 폭로했다. 유출된 기밀 문서에 따르면 에른스트가 가진 자산 지분의 가치는 2019년 기준으로 1억4천만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에른스트는 민영화 사업과 관련해 '페이퍼(비밀) 회사'를 만든 적도 없고, 민영화 사업참여가 소치올림픽에 대한 보상도 아니라고 반박했다.
각국 정부 전현직 수장의 역외 활동 자료 폭로/얀덱스 캡처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4일 '판도라 페이퍼스'의 폭로에 대해 "보고서에서 (비리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보지도 못했고, 굳이 확인할 이유도 없다"고 논평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폭로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이 바로 미국"이라며 "미국내 역외 탈세 등 비리 문제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두 사람외에 보고서에 거론된 러시아 주요인사는 국영 방산업체 '로스텍'의 세르게이 체메조프(Сергей Чемезов) 대표와 현지 국민은행격인 '스베르 방크'의 게르만 그레프 행장이다. 체메조프는 스페인에 타인 명의로 빌라와 호화요트를 소유하는 등 역외 자산이 3억달러 상당에 이르고, 그레프 행장은 싱가포르와 파나마 등에 5천만 달러 이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해외로 도피한 올리가르히 레오니드 레베데프 전 상원의원의 이름도 나온다. 석유 재벌이자 영화 제작자이기도 한 레베데프는 러시아 사법당국이 그가 회삿돈 2억2천만 달러를 횡령했다며 수사에 착수하자 2016년 러시아를 떠났다.
구소련권에서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카자흐스탄의 초대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등이 폭로 대상에 포함됐다. 젤렌스키 대통령는 대선에 출마하기 전 친구에게 넘긴 회사에서 여전히 비밀리에 수익을 얻고 있으며,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은 84개의 역외 회사를 통해 7억 달러 상당의 부동산을 런던 등 해외에 두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도 6개 역외기업이 참여한 주식 교환으로 3,000만 달러를 받는 등 지속적으로 수익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